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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100人·53]언론·문인 조수일

by 아름다운비행 2021. 1. 23.

[인천인물100人·53] 언론·문인 조수일

지홍구 기자 / 발행일 2006-08-10 제14면 


>53< 언론 ·문인 조수일

힘 있는 글이 좋아 한 평생을 신문기자로 살면서도 인천문단 바로세우기에 앞장섰던 문인 조수일(趙守逸). 그는 지난 1950년 지방신문 기자로 첫 발을 내디딘 뒤 1973년 언론 통폐합이 단행되기까지 인천 지역언론인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조씨는 본업외에 크고 작은 문단작업에 바삐 참여하며 6·25 전쟁이후에는 인천문단을 태동시킨 1세대 주역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직후 신문과 인천문인을 연결해 출판로를 열어줬고, 문인들의 만남의 공간인 다방도 제공했다. 이는 자연스레 그가 인천 인천문인들의 '구심점'으로 작용하게 된 단초가 된다.

▲ 2. 1960년대 문인협회 인천지부 초대지부장 시절, 앞줄 맨좌측이 조수일, 가운데 한복착용자 서정주. 맨우측 꽃다발 조연현.

 

그의 이런 노력은 인천지역 문인들에 의해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초대지부장 추대란 영예로 이어지면서 더욱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인천시민의 자긍심이라 할 만한 두 가지 궤적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1952년 1월 '초원' 잡지에 실린 '문화인순방기'.


지난 1950년 집필한 영화 `사랑의 교실' 시나리오와 1957년 발간한 소설동인지 `해협'이 그 것. 사랑의 교실은 개봉 며칠만에 상영금지가 되는데 상영금지 이유와 시나리오 내용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미궁속이다.

해협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란 주장이 인천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중앙문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학계 일부에선 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씨의 뛰어난 업적이 사실상 어둠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인천문학의 역사는 짧다. 대체로 100여년을 잡는다. 조씨의 둘째 아들 우성(60·시인)씨는 지난 1883년 개항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던 신 문화의 굴절된 수용을 인천의 문화적 시발점이라고 정의했다. 활발한 문학활동 시기래야 1945년 광복후가 고작인데 이때 쌓인 문화적 기반마저도 한국전쟁(6·25전쟁) 발발로 초토화 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전쟁은 인천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제2의 시발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제작한 `인천시사'에서는 인천의 문학적 기초를 다시 바로 세우려 노력한 문사들로 6·25 전쟁 직전 결성되었던 문총(文總) 인천지부 결성자들을 들고있다. 조씨는 당시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수복과 함께 `인천문총구국대'로 개칭되는데 문총 서울 본부가 전시(戰時) 비상조치로 그 명칭을 `문총구국대'로 임시 개칭하고 활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문총구국대 초대 지대장은 전쟁전 인천시장을 지낸 표양문, 부지대장은 의학박사이며 향토사학자인 신태범과 화가 우문국이, 뒤에 이경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이 부지대장이 됐다. 총무국장에 조병화, 선전국장에 이인식, 차장에 유희강 그리고 조수일과 최성진, 이민, 최성연, 박세림, 장인식, 김차영, 김응태, 김양수, 김영달, 박윤섭, 최영섭, 백석두 등이 회원이었다.

이들은 `멸공 문화인 궐기대회' `시낭독' 등을 열었다. 그 무렵 인천의 문인들은 지역적인 사정상 그리고 열악한 출판사 사정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작품집을 낸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문총구국대가 기념행사 때마다 주로 행하는 시화전과 문학강연회를 통한 작품 발표의 기회가 고작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주요 문인들과 행보를 같이하는데 50년대를 마감할 무렵 문총구국대의 많은 문인들이 서울로 이주하거나 중앙 문단으로 활동무대를 변경하면서 인천문단을 지키는 몇 안되는 문인이었다. 김동리, 박목월 등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아들 우성씨는 자신이 한양대 입학시험을 보러갔을 때 면접관이던 박목월이 면접보다 말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줬다는 일화도 전했다.

조씨는 1950년 11월 전황을 보도한 유일한 지역신문인 인천신보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군의 정훈국에 소속돼 전방의 뉴스를 인천신보에 보도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기도 했던 인천신보는 1953년 정전 협정이 성립된 뒤 인천에서 다시 발행된다. 1959년 9월 '기호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다시 1960년 7월 경인일보의 전신인 '경기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는 데 인천문인들의 작품이 이곳에 많이 발표됐다.

그는 인천문단에서 어떤 위치였을까? 1952년 1월 잡지 `초원'에 실린 `문화인 순방기'(8~9페이지)는 그를 `몇 사람 없는 인천 문단의 한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글에는 영화 `사랑의 교실' 원작자인 그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있는데 당시 문인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던 신포동 `유토피아' 다방도 가난한 문인을 위해 그가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잡지 초원은 또 그가 기자로서 근무시간이 끝나면 유토피아 다방에 들러 대부분의 시간을 창작구상에 매달렸다고 밝혔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조씨가 인천지역의 몇 안되는 문인으로 꼽히고 있었지만 이를 증명 할 만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잡지 기사에 따르면 조씨는 1952년 전부터 문인으로서 활동이 활발했음을 미뤄 짐작 할 수 있는데 문단데뷔 시기가 언제인지조차 가늠키가 어려울 정도다. 다만 가족과 지인의 말을 모으면 대략 1949년 상업일보 인천지사장 등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으로 추정될 뿐이다.

 

▲1945년 11월 24일. 조수일씨를 인천항항만사무소 소장으로 임명한다는 주한미군정청의 서신.

조씨 가족들은 “아버님이 학창시절부터 습작을 많이 했지만 호구지책에 바빠 본격적인 습작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때 시작했고 해사국에 근무할 때까지 습작은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본격적인 글을 쓰게된 시기는 신문사에 들어가면서 부터”란 증언도 있었다. 이런 증언으로 볼때 조수일은 전쟁전 근무했던 신문사 시절부터 초원잡지가 발간되던 1952년 1월(1950년 9월 인천신보사에 입사한 조수일은 당시 2년차 기자, 그러나 나이는 42세 였음)전까지 인천지역 문인으로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조우성과 문학평론가 김양수(73)씨에 따르면 당시 조씨는 유토피아 다방에서 주로 시화전을 열었고 수필과 같은 산문은 주로 자신이 근무하던 인천신보에 발표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작품이 신문에 실렸지만 제대로 남아있지가 못하다. 그가 세상에 내논 소설도 1966년 양지사 발행 한국단편소설선집(하)에 실린 `용우물'이 유일하다. 아들 조우성 시인은 “자식이 불비해 글을 많이 모아 유고집을 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1957년 3월 발간된 '해협'. 표지는 동양화가 우문국이, 제호는 검여 유희강 선생이 썼다.

조씨의 또 다른 공로는 척박한 토양에 놓인 인천문인들을 신문과 연결시켜 날개를 펼수 있도록 도와준 점. 윤부현, 이광훈, 심창화, 김창흡, 김창황씨 등이 그의 도움으로 탄생한 문인들이다.

1956년 조씨는 인천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인천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김창흡, 김창황씨와는 1957년 소설동인지 `해협'을 발간, 인천의 문학적 토대를 한 단계 높였다. `해협'은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다, 아니다'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동인지'란 인천문인의 주장을 중앙문단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천 문인과 시민이 규명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긴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12일. 인천 동방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사랑의 교실'의 시나리오도 그의 작품이다. 당시 인천지역은 10여편의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서울과 쌍벽을 이루는 영화의 도시였다. `사랑의 교실'은 서울 국도극장에서도 동시상영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상영 며칠만에 작품내용이 사회적 관념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경기도 경찰국으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는다. 얼마뒤 전쟁이 발발해 영화와 시나리오 내용, 상영금지 이유 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씨는 한국전쟁후 인천문단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자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남겨진 작품도 얼 마 없어 작가로서 어떠했는지는 여기에 싣지 못했다. 하지만 인천문단이 1962년 2월 17일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초대 지부장으로 조씨를 추대한 것은 인천 문인들의 활동무대를 비옥하게 다져온 공로가 분명 투영된 결과다.


당시 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던 김양수씨는 “조수일, 한상억, 조병화, 이인석 등이 인천에 문학적 분위기를 조성해 한국전쟁 이후의 인천문단을 만드신 분들”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96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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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100人·53]차남 조우성씨의 아버지 회고

"문단에 턱걸이하자 아끼시던 만년필 선물"

지홍구 기자 / 발행일 2006-08-10 제14면 

 

인천지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차남 조우성(60·인천 광성고 교사)씨는 “내가 문인으로 활동하게 된 데는 아버님의 영향이 컸다”고 밝혔다.

어린시절 조씨의 양철도당집 안방은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조씨는 “내 키도 훨씬 넘는 높이였는데 그 책들이 무슨 내용인지는 20대에 들어서야 겨우 살펴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르낭의 예수의 생애, 서정주 선생의 화사집, 황순원 선생의 학, 김동리 선생의 실존무 등은 그 시절 아버님 책장에서 내가 뽑아들었던 책들”이라고 회고했다.

`새벗' `학원' `논단'과 같은 잡지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수필가 최정삼씨가 운영하는 서점(문조사·文潮社)에서 책을 쉽게 빌려볼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우성씨는 말했다.

천연색 사진으로 무장된 귀한 사진잡지를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겐 영화와 형광등에 얽힌 일화도 좋은 추억거리. 아버지와 교분이 두터웠던 인천문화원 어른들이 영사기를 직접 집에 갖고 와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상영했던 `메인 주(州)의 덩어리', `리버티 뉴스' 같은 영화들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또 “백열등 밖에 모르고 살던 때 아버님이 미군부대에서 구해온 형광등을 켜자 온 동네가 환호성을 질렀던 일, 저녁때마다 무슨 통과 의례 모양 끓여먹던 향기 짙은 커피 향”도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특히 조씨는 아버지가 시인이 되겠다고 허둥대던 자신을 유독 아낀 것으로 기억했다. 조씨는 “문단에 겨우 턱걸이를 하자 애지중지하던 만년필 `파커 61'을 선뜻 내주신 그 손의 온기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며 “엄격했지만 인간미가 넘쳐나는 언론인이자 문인이고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아버님의 모습이 그립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