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66] 항일독립운동가 권평근
광복햇살 마음껏 누리지도 못하고… 일제 총탄에 스러진 영웅이어라
정진오 기자 / 발행일 2007-02-07 제0면
>66< 항일독립운동가 권평근
해방직후 한국인이 일본인 소녀들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이 담긴 책 '요코 이야기'가 큰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역사를 왜곡했다는 얘기와 눈으로 본 것을 문학적으로 그렸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이 논쟁은 한참을 더 가야 정리될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해방 이후 인천 땅에서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항일독립운동가인 권평근선생의 이야기다.
이 부분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떻게 됐길래 해방이 되었는데 일본 경찰이 우리민족의 가슴에 총질을 했다는 것인가.
그것도 '해방군'이라는 미군이 우리 땅을 처음 밟던 날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간 자리에서였다.
미군은 그 사건을 정당하다고 덮어버렸고, 대한민국은 6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조사 중이다. 분명한 것은 일제가 뒤꽁무니를 빼야 할 때 인천의 우국지사를 벌건 대낮에 총으로 쏴 죽였다는 점이다.
「인천 조선해방의 사절로 지난 8일에 인천항에는 미국군의 입항이 시작되자 이날의 반가움을 참지 못하여 미군을 환영키 위하여 인천보안대원과 조선 노동조합원 등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노동조합위원장인 권평근(權平根·47)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고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26)도 등허리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리고 중상자와 경상자 14명을 내어 도립의원에 수용하고 응급치료중인데 이 사건의 전말을 미군 CIC에서 조사중이다. 이에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도 미군을 통하여 일본관헌에 대하여 엄중 항의중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 부근에서 있었던 미군환영행사 중 일본경찰의 발포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1945년 9월 12일자) 기사다. 권평근(1900~1945). 인천지역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던 그는 그렇게 광복의 햇살을 채 한 달도 보지 못하고 일제의 총탄에 쓰러졌다.
지난 5일 권평근 선생의 딸 명숙(68)씨를 만났다. 명숙씨의 딸(유경미)이 경영하는 서울 영등포의 한 학원에서다. 칠순을 바라보는 명숙씨는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몇 차례나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숨진 사건의 실체가 아직까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숙씨를 비롯한 가족은 2005년 3월 1일을 잊을 수가 없다. 청년·노동운동의 발판이 됐고, 인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권평근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내려진 것이다.
선생이 숨진 지 60년 만의 일이었다. 나라가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줬지만 9월 8일의 그 사건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건국훈장은 생전의 항일운동의 유공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권평근 선생이 일본 경찰의 손에 의해 숨진 이 사건은 다행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해 진실을 밝혀 낼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건은 패망한 일제와 그 바통을 이어받은 미군 사이의 묵계가 있었기에 묻혔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건 사흘 뒤인 9월 11일자 미국 '뉴욕타임즈'는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면서 당시 국내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를 꼬집었다고 한다.
60년 넘게 묻혀 있는 이 사건이 당시 인천에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충격파였다.
1945년 9월 22일자 해방일보는 '9월 8일의 미군 환영인파에 대한 발사로 인명의 희생이 있었음을 항의하는 시위가 인천에서 6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행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건 이후 지역사회가 얼마나 들끓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장례식도 건국준비위원회 주도로 치러졌다. 당시 매일신보는 '지난 8일에 연합군 환영을 나가다가 일본인 순사의 불법한 발포로 말미암아 즉사한 노동조합 인천중앙위원장인 권평근과 보안대원 이석우의 시민장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 지난 10일 오전 10시에 전 시민의 참열 아래 엄숙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날은 미군측으로서 각 장교들 30여 명이 여러 차례로 조문을 하였으며 장의위원장 박남칠(朴南七)의 조사를 비롯하여 각 단체 대표의 조사가 있은 다음 악대를 선두로 시가행렬을 하여 엄숙하고도 장중히 장지인 주안정(朱安町)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고 성대하고도 장엄했던 장례식 모습을 전했다. 장례식 장소는 중구 인형극장이었다.
권평근 선생에 대한 추모물결은 이듬해 5월까지가 고작이다. 추모비 건립 움직임과 표창까지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대중일보는 1945년 11월 10일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 연합국의 미국이 인천항에 상륙케 되자 이를 환영나간 우리의 건국투사인 고 권평근씨외 보안대원 이석우 양씨들에 경관이 불법 발사를 한 사실은 천인이 공노할 큰 사실의 하나이었는데 이에 인천시 인민위원회에서는 이 두 투사를 추모하는 의미로서 발사 당한 그 자리에 건국투사의 추모비석을 세우고자 방금 준비중이다'라고 사건 2개월여가 지나도록 끊이지 않던 사회적 추모분위기를 전했다. 또 1946년 5월 3일에는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펼쳐진 인천노동절 기념행사장에서 표창이 있었다.
권평근 선생은 강화에서 태어났고, 인천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 신간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딸 명숙씨는 아버지가 합일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배재학당을 다니다 그만 둔 것으로 기억했다.
19세 때는 고향 강화에서 3·1운동 시위대열의 선봉에 섰다가 3년여 동안이나 충청도에서 피신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1921년엔 강화 양도면 조산교회의 '조산엡웟청년회'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이 때 선생은 의사부장을 맡았다.
1926년 11월에 중국 중산대학에 입학하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명부'엔 선생을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당국의 집중 감시대상 인물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1930년 1월 6일 인천노동조합 제2차 정기총회에서 조직선전부장으로 선임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그의 노동운동은 항일투쟁이었다. 이후 몇 차례 더 검거 투옥된다.
특히 그는 1931년의 '인천방향전환사건'의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방향전환사건이란 1931년 7월 중국의 만보산 사건(기차 폭발로 많은 중국인이 죽자 이 사고를 한국인이 일으켰다는 일본의 계략 때문에 만주에 있던 한국인들이 큰 피해를 당했음) 이후 인천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습격하는 폭동 소요사태가 연일 벌어지자 폭동의 방향을 전환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했다는 것을 말한다. 권평근 선생은 이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당시 이 사건 최고형이었다.
권평근 선생은 여운형이나 조봉암과도 각별한 관계였다고 한다. 특히 조봉암은 선생의 '3년상' 내내 제삿날마다 집을 찾았다고 한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국가기관이 나서 해방직후 일본경찰의 발포사건을 조사한다고 하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17757
- - - - -
[인천인물 100人·66] 인터뷰/ 권평근선생 막내 딸 명숙씨
사건전말 불분명… 과거사정리위 조사에 '기대'
정진오 기자 / 발행일 2007-02-07 제0면
"어머니는 어린 우리가 엉엉 울까봐 아버지 장례식에서도 울지를 못하셨어요. 나중엔 우리 딸들도 어머니가 슬퍼하실까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권평근 선생의 막내 딸 명숙(68)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렇게도 고생하셨던 어머니가 끝내 훈장받는 것도 못보시고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면서도 "이젠 아버지에게 왜 일본경찰이 총질을 했는지 확실히 밝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2005년에 건국훈장을 받았으면서도 그 훈장엔 아버지 권평근 선생이 숨진 사건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숙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만을 바라고 있다.
명숙씨는 아버지의 길지 않은 삶이 무척이나 험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어머니에게서 들은 게 대부분이다. 강화에도 땅이 있었고, 인천에 집도 3채나 됐다고 한다. 또 운수업도 크게 했다고 한다. 물론 태평양전쟁 말미에 트럭을 일제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권평근 선생은 또 결혼을 세번이나 한 것으로 호적에 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명숙씨의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두 딸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숙씨는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어머니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형무소를 찾아가며 옥바라지를 했는데, 그 이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 해주셨다"면서 "출옥 이후엔 아버지 어머니가 부두에서 팥죽장사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5살 꼬마이던 명숙씨는 지금도 영정사진 밑에 쓰여 있던 '건국투사 권평근-건국준비위원회'란 문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17758
'역사 3 - 인천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인물 100人·68] 독립유공자 송암 유경근 (0) | 2021.01.24 |
---|---|
[인천인물 100人·67] 민족운동가 이동휘 (0) | 2021.01.24 |
[인천인물100人·53]언론·문인 조수일 (0) | 2021.01.23 |
[인천인물 100人·65] 화가 김영건 (0) | 2021.01.05 |
[인천인물 100人 · 64]'아시아의 야구철인' 박현식 (0) | 2021.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