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72] 독립운동가 유완무
백범 탈옥계획 주도, 만주·연해주서 무장투쟁 운동… 이국땅에 묻혀진 '항일정신'
김명호 기자 / 발행일 2007-03-28 제0면
>72< 독립운동가 유완무
100여년 전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어간 독립투사의 한(恨)은 풀릴 것인가?
인천지역 독립투사 가운데 한 사람인 유완무(柳完茂·1861~?)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그가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어떤 항일투쟁을 했었는지에 대한 비밀이 역사의 어두운 터널을 나와 서서히 빛을 보고 있다.
유완무는 백범 김구 선생의 활동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인물로 백범 일지에 기록되고 있지만 그의 말년 행적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런 그의 항일운동 활약상이 정부의 공개조사로 제대로 조명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는 백범 김구가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 감리서에 투옥돼 있을 당시 백범 탈옥 계획을 세운 것으로 백범일지에 나타난다. 특히 그는 김창수(金昌洙) 라는 백범의 원래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줬고, 호를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으로 바꿔줬다고 백범은 술회하고 있다.
열 다섯 살이나 많던 유완무가 김창수란 이름을 고친 이유를 독립운동을 하는데 불편했기 때문이라고 백범은 덧붙이고 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선생이 일본군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 감리서에 있을 때 유완무가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모험대를 조직해 인천항 주요 기점마다 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김창수(백범 김구)를 구출해 내는 계획을 짰다' 란 대목도 있고, '감옥에서 탈출한 백범이 이런 그의 노력에 감탄해 유완무를 만나기 위해 한성 공덕리에 사는 유완무의 동서 박병태의 집에 찾아가 그를 만났다'는 얘기도 있다.
백범은 유완무를 '평생친구'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그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갔다고는 하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다. 또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역시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유완무를 새롭게 조명할 단서는 그의 고향 인천에서 제공됐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이희환 박사 등 지역 향토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를 중심으로 유완무에 대한 재조명 노력이 이뤄져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본격적인 조사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유완무는 1861년(철종 12년) 부평부 시천리 (始川里) 진주 유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현재 이곳은 인천시 서구 시천동으로 흔히 시시내 유(柳)씨로 불리는 진주 유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검여 유희강 선생도 바로 이곳 시천동 출신이다. 현재 이곳엔 유씨 집안 5~6가구만 남아 있다. 이 곳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한 유흥규(85)씨는 유완무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떠올렸다.
유씨는 "선생님(유완무)은 심씨와 결혼하셨고, 희달, 희영이라는 이름의 아들 둘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딸을 두었다"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정의감이 커 동네에서는 일찍부터 궂은 일을 도맡아 왔다"고 말했다.
또 유완무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충청도 지방 등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지역에서의 정확한 활동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그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만주로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떠난 이후의 행적은 더욱 가려져 있다. 다만 해방직전까지 큰아들 희달씨는 고향을 왕래했다고 한다.
유완무가 어떻게 피살됐는지에 대한 단초가 최근 나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완무의 죽음을 피살로 단정짓고 있다. 이는 독립신문 1920년 5월15일자의 '범윤(範允)이 일시의 감정으로써 그 중견인물된 유완무(柳完茂)를 살해한 그것이 또한 군심수습(軍心收拾)하는 여부(與否)에 막대한 원인이 되엿다'는 대목에 근거하고 있다.
또 1912년 러시아에서 한국 독립투사들에 의해 발간되던 권업신문 1912년 11월17일자는 '백초 유완무씨가 애국 열심을 품고 러·청 양국 영지로 다년 분후하다가 일초에 어떤 흉한에게 피살되고 지금 육년이 되도록 그 죽엄도 찾지 못하고 그 죽은 원인도 발현하지 못하고 이 안건을 한의심 구름 속에 부쳐둠은 일반 마음가진 자들의 부끄러운 매며 애통한 바이러니 근일에 북간도 등지에 유하는 몇몇 지사들이 이 일을 발현하려고 국력으로 모사하여 중국 관청에 교섭하며 마침내 흉한 몇몇을 잡아 재판정에서 공초를 받았는데… 대략이 죄와 같더라' 고 보도하고 있다.
유완무 살해사건을 조사했던 경무국비밀조사안에는 그가 '1909년 2월24일 만주지역 훈춘(渾春)에서 어떤 괴한 5~6명에 끌려가 살해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독립신문이다. 살해의 주범으로 이범윤(李範允) 장군을 지목한 것이다.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1907년 간도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러시아와 간도지역을 왕래하며 독립무장단체에 무기 등을 공급하고 간도 영토문제로 청나라와 교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이범윤이 직접 살해했는지, 아니면 자객을 동원해 암살을 지시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완무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유완무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철행 팀장은 "이범윤은 복벽주의(왕권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 성향이 강한 무장독립운동 세력으로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 활동했었는데 이 시기에 유완무와도 함께 손잡고 무장투쟁운동을 했다는 조사자료가 있다"면서 "유완무가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을 했다면 이범윤과 이념상의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독립운동가 사이에선 이데올로기 논쟁이 살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유완무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꽤 영향력이 컸고, 간도문제와 관련 이범윤과 함께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살해된 뒤 독립군의 마음을 다잡는 게 문제가 될 만큼 무장독립단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안창호 선생이 미주지역에서 발행했던 신한민보(新韓民報)에 따르면 그는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설립에 블라디보스토크 신입회원으로 참여했다. 북간도 활동과 관련해서는 이회영(李會榮), 이상설(李相卨), 여준(呂準) 등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설치계획을 세웠고,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그의 비중에 비해 연구작업이나 조명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동안 지역사회는 물론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세기 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인천의 독립운동가 유완무가 이번 기회에 우리 역사에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명호기자·boq79@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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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72] 인터뷰 / 조철행 과거사정리위 조사1국팀장
"유완무 조사착수 연말 유공자보고서 제출"
경인일보 / 발행일 2007-03-28 제0면
"아직도 러시아와 만주 일대에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1국 조철행 팀장은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을 도맡아 연구하고 있다. 그가 올해 독립운동 유공자 신청을 받고 그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인물은 7명. 이 중 인천출신 독립운동가 유완무도 있다.
조 팀장은 "아직도 1945년 이후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한 항일 독립투사들이 많다"며 "역사적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좌·우익을 떠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완무는 백범일지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발행되는 당시 신문 등을 종합해 볼 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이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팀장은 "과거사위원회에서 유완무의 경우 올해 6월부터 조사를 착수해 올해 말에는 독립운동 유공자로 정부측에 정식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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