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73] 인천야구 중흥의 기수 유완식
시대를 풍미한 투수 '한국의 사이 영'
김영준 기자 / 발행일 2007-04-11 제0면
>73< 인천야구 중흥의 기수 유완식
'미국에 사이 영이 있다면, 우리에겐 유완식이 있다'.
지난 달 29일 프로야구 SK 와이번스는 올해부터 지역 초·중·고교 야구 선수 중 한 해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에게 유완식 투수상을, 타자에겐 박현식 타격상을 수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SK 관계자는 "인천 야구에 지대한 업적을 쌓은 두 분의 야구인을 기리고 이들의 정신을 후배 야구인들이 계승해 앞으로 인천 야구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상을 제정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 1일 그 주인공, 유완식(88)옹을 만났다. 그의 아들 대용(50)씨와 함께였다. 유옹은 지난 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이야기의 대부분은 대용씨의 '통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옹은 해방 이후 '인천야구 중흥의 기수' '인천야구의 리더' '인천야구의 재건 기수' 등 인천야구와 관련된 명예로운 닉네임을 여럿 갖고 있다. 1930년만 해도 전국 최강을 자랑했던 인천야구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해방이 되던 1945년 초까지 암흑기라고 할 정도로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게 없다. 이런 인천야구는 그의 등장과 함께 다시 빛을 보게 된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백천. 보통학교 때 인천으로 유학왔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를 졸업하고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상고를 졸업했다. 그는 초창기 일본 유학생 중의 한 명이다. 이후 일본 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활동하다 해방 직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유 옹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보통학교 다니던 시절 야구 용구가 없어서 찜뽕(연식야구)을 했었어. 체격조건도 남들보다 좋았고 어릴적부터 거의 모든 운동을 잘했지. 마라톤은 물론 유단자였던 유도선수를 매트에 내칠 정도로 유도에도 소질 있었고. 그러다가 일본에서 정식야구를 배웠지"라고 지난 날을 회상했다, 당시 재밌는 일화도 많다. 대용씨는 "오사카 상고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마음은 프로팀인 한큐 브레이브스 한 곳에 가 있었다"면서 "아버지는 오직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서 온 유완식인데,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한큐 측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입단 의지를 알렸고, 젊은이의 당돌함과 야구에 대한 진심을 읽은 구단측이 입단 테스트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테스트에서 남다른 투구 폼과 뛰어난 타격 기량을 인정받아 입단에 성공한 그는 약관의 나이었던 1939년부터 7년간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포수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45년 6월 혼인을 위해 인천에 왔다가 해방을 맞게 되어 인천에 정착하게 된다.
해방 후 유완식이란 거물을 얻은 인천야구팀의 활약은 사회인 야구에서 두드러진다. 사회인 야구팀 '전인천군'은 유완식을 비롯해 동년배인 김선웅, 장영식, 박현덕 등 인천야구 1세대를 풍미했던 이들이 함께 했다. 전인천군은 그 멤버만큼이나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1947년 5월 제2회 4대 도시(인천 부산 광주 대구)대항 야구대회 우승, 그해 7월과 8월 전국지구대표야구쟁패전과 월계기대회 잇단 우승을 포함해 전국체전까지 한 해에 4개 대회 우승을 싹쓸이 하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야구용품에 얽힌 이야기는 따로 있다. 해방 후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던 시절, 야구 용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야구 용구들은 모두 미군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단다. "미군들이 처음에 우리를 얕잡아봤다가 큰코다쳤지. 이후 심기일전하더라고. 그리고는 자기들이 이길 때마다 기분 좋아서는 야구용품을 주고 갔지. 우리에게 미군들은 야구용품 공급책이나 마찬가지였어."
1954년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는 한국팀이 첫 번째로 해외에서 원정경기를 치른 대회였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 대회에 한국팀의 주축은 유완식, 박현식, 그리고 인천고를 갓 졸업한 팀의 막내 서동준이었다. 인천의 3인방이 우리 국가대표팀을 이끈 것이다. 당시 서동준은 19세, 유완식은 36세였다. 일본, 필리핀, 대만이 참여한 이 대회에서 대만을 상대로 4-2 역전승을 거두고 1승을 올리며 3위를 차지했다. 이는 의외의 결과였다. 해외 무대에 첫 선을 보인 한국팀이 이 대회에서 꼴찌를 차지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기 때문.
38세 되던 해 유완식은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당시만 해도 야구선수 나이 서른이면 '환갑'으로 불렸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선수관리가 없었던 시절 38세까지 선수 생활을 한 유완식은 말 그대로 '불사조'였던 것이다. 현역 은퇴 후 유완식은 기계부품 제작회사인 인천기공사를 운영하면서 후배들에게 자문 역할도 했으며 유옹은 대한야구협회 이사(1969)와 경기도야구협회 부회장(1975)을 역임했다.
2005년 4월 5일 프로야구 SK 와이번스의 홈 개막전에 여든여섯의 유완식은 시구자로 나섰다. 한국야구 100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해를 맞아 3만여 명의 팬이 스탠드를 채웠다. 당시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유옹은 "왕년에 야구 선수였는데 공이 원 바운드로 가는 바람에 창피했다"면서 웃음지었다.
현재 유옹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는 최근 것은 기억을 잘 못하며 과거 기억만을 떠올릴 뿐이란다. 또한 심장 기능도 약해져 배터리에 의해 그 기능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야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유옹의 곁에는 친구들이 있다. 하명호 전 인천시청 감독(동산고 졸업)과 주세현 전 제일은행 감독, '막내' 서동준(이상 인천고 졸업)씨 등은 매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듯 유옹의 야구경기는 과거 그의 친구들과 함께 여전히 진행중인지도 모른다. 특히 지역 연고 프로팀이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면서 그의 야구혼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김영준기자·kyj@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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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73] 인터뷰 / 前야구국가대표 서동준씨
"존경의 대상 유선생님 함께 뛴 것만도 큰 영광"
경인일보 / 발행일 2007-04-11 제0면
"초등학교 시절 존경의 대상이었던 유완식 선생님과 함께 1954년 대표팀이 됐습니다. 그 자체로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어요."
1950년대 초 인천고를 무적함대로 이끌었던 명투수 서동준(71)씨는 탁월한 실력으로 인해 졸업을 앞둔 1954년 12월 대표선수로 발탁, 필리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유완식 옹과 함께 출전했다.
서씨는 "초등학교 때 유 선생이 가끔 학교를 찾아와 귀엽다고 안아주셨다"면서 "상당히 어렵게 대하던 분이었는데 이러한 분과 한 팀에서 뛰게 되었을 때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야구 선진국인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고, 그 곳 프로까지 경험한 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투수로서 최고였다"면서 "선생님에게선 기술과 함께 정신적인 면에서도 배울게 많았다"고 덧붙였다.
서씨는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기억을 고교시절로 되돌렸다. "당시 인천고 사령탑이었던 김선웅 감독과 선생님은 친구 사이였어요. 또 예전 인고 자리가 선생님이 운영했던 인천기공과 가까웠고. 때문에 우리들이 연습할 시간이면 운동장을 찾아와서는 그야말로 훈수를 많이 뒀지요. 같은 투수로서 커브 그립을 알려주기도 했고…."
이제 반세기가 훌쩍 흘러서 그 대선배와 오랜 친구로 유 선생님의 기억력 회복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같이 마작을 즐기고 있는 서씨. "오늘(3일)도 선생님과 마작 하는 날이에요. 조금 있다가 인천 배다리 사거리의 인천기공 자리로 가야돼요."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자택에서 만난 서씨는 시계를 보고는 야구 선배의 건강을 위해 기꺼운 발걸음으로 인천행을 재촉했다.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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