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61]손승용 목사
종교인으로… 언론인으로… 구국계몽·독립운동 열정 지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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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낯선 이름이다.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구국교육운동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의 생애와 이력은 아직까지 역사 속에 가라앉아 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나서는 성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뒤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교육에 힘을 쏟았던 시기의 자취를 찾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인천에 머문 기간은 약 8년. 그의 생애 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그가 인천에 뿌린 씨앗은 결코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동포 우리 민족아, 우리의 독립만세를 위해 자유정신을 진흥하여라'.
손승용 목사가 남긴 수첩에 적혀있는 창가 중 일부다. 20페이지 정도의 조그만 수첩에는 애국정신이 물씬 묻어나는 창가들이 그의 자필로 빽빽이 적혀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은 창가들로 보인다. 그는 이 수첩을 항상 몸에 지니고,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창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막 전래된 기독교는 민족운동의 자궁역할을 했다. 국권침탈 위기에 놓인 시기 뜻있는 인사들이 기독교 아래 모여들었고,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구국교육운동과 결합됐다. 신앙과 교육의 합일은 특히 강화에서 감리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손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첩과 가족 사진 몇장 외 손 목사와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다. 전면에 드러나기 보단 후방에서 조력자로 활동한 그였기에 언론사(言論史)와 감리교에 남은 흔적을 제외하곤 이름 석자 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흔적들과 손 목사를 연구하는 이성진(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씨 등의 조언으로 그의 생애를 어렵게 짜맞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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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10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찍은 사진. 인천으로 내려오기 직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 ||
1900년 5월 손 목사는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 그가 인천에 내려온 건 조원시(George Heber Jones, 경인일보 2005년 9월15일자 14면보도) 목사의 초빙 때문이었다. 당시 제물포교회(내리교회) 담임이었던 조 목사는 영화학당을 책임지고 운영할 교사가 없어 적임자를 찾던 중이었다. 손 목사는 양반출신에 신문화에 대한 지식이 깊을 뿐 아니라 애국사상도 투철한 최적임자였다.
손 목사는 교사로 부임하자 학업에 게으르거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단호히 그만두게 했다. 엄정한 성격의 일면이 드러나는 동시에 서당식으로 운영됐던 영화학당을 근대식 학교로 전환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손 목사는 기독교를 통해 애국충정과 개화지식을 갖춘, 쓸모있고 강한 인재를 키워내려 했던 것이다. 조원시 목사는 1901년 연례보고서에서 '손씨는 훌륭한 교사고, 엄격한 훈육가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이쪽으로 펼쳐진 분야가 가장 유망하다'고 손 목사를 극찬했다.
1903년 영화학당은 미 감리회 한국선교부에 의지하지 않는 사립 영화학교로 인가를 받는다. 이 때 손 목사는 근대식 정규학교로 인가받기 위한 실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정규학교에 맞는 새 학칙을 제정하고, 학제도 개편했다. 이후 영화학교는 타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몰릴 정도로 활성화된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 손 목사는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교육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해에 치러진 졸업식 사진에선 당시 영화학교를 감싸고 있었던 강한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졸업식 때도 교사 앞에 십자가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한 것이다. 요 시기 영화학교를 거쳐간 그의 제자들로는 이미 경인일보가 '인천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보도한 하상훈과 유두희 등이 있다.
1906년 손 목사는 민족정신의 씨앗을 뿌린 영화학교를 떠나 강화읍 잠두교회 담임을 맡는다. 1908년엔 조원시 목사 등과 함께 잠두의숙을 교회 부설 제일합일남학교로 다시 세웠다. 이듬해엔 제일합일여학교를 세웠고, 두 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때 개교기념일을 5월 31일로 정했다. 손 목사는 합일학교 외에도 강화에서 활동한 약 5년간 교회부설 매일학교를 확산시키는 등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강화에 왔을 때 5개 였던 매일학교는 3년 만에 17개로 늘어났고, 교동에서도 2개였던 매일학교가 같은 기간 13개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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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승용 목사의 몇 안되는 유품 중 하나인 수첩.그의 애국 정신이 녹아있는 창가가 빼곡히 적혀 있다. | ||
합일초등학교 옆쪽으로 강화중앙감리교회도 보였다. 옛 잠두교회다. 잠두(蠶頭)는 한자 그대로 누에 머리. 지형이 툭 튀어나온 형상이라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현재도 교회부설 유치원 이름은 '잠두유치원'이었다. 교회 1층 전시실에는 1대 담임인 조원시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옆으로 5대 담임인 손 목사의 사진도 보였다.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인천 강화에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기억되고 있었다. 이은용 장로는 "손 목사는 20세기 초 강화 기독교와 교육운동사에서 굉장히 비중있는 인물"이라며 "특히 손 목사의 활동 시기는 이동휘가 강화에서 보창학교를 세우고 구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시기와 절묘하게 겹친다"고 말했다.
이동휘가 보창학교운동을 시작한 건 1905년이다. 보창학교운동의 중심이 감리교였고, 이동휘와 손 목사의 독립협회 시절 인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이 연계했을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동휘가 전면에 나서 학교를 세웠다면, 손 목사는 교회를 기반으로 학교의 틀을 다지는 등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게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해석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 독립운동가 중 한명으로 자리잡은 이동휘와 달리 손 목사의 활동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성진씨는 "관직생활과 영화학교에서 쌓은 경험, 여기에 교육운동에 대한 손 목사의 열정을 감안하면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이 부분이 앞으로 우리가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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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합일초등학교 전경. 오른쪽건물이 서 있는 곳이 남학교 자리였고, 왼쪽 조그만 야산에 여학교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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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61] 인터뷰/ 손승용 목사 손자 손동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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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용 목사의 손자 손동옥(61)씨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얘기를 아버지께 들었다"며 "인천에서 활동할 당시 고향에 가족들은 다 남겨두고 생계는 뒤안시 했다고 아버지가 가끔 원망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손씨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건 "전쟁이 나자 공산군에게 발각돼 불이익을 당할까봐 우려한 아버지가 할아버지 유품과 자료들이 든 궤짝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설명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손 목사 자료는 조그만 수첩과 사진 서너 장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유언 한 마디. 그 유언은 '내 앞에서 울지 마라'였다. 손씨는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으로 남긴 건 없지만, 할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애착과 독실한 신앙심을 물려줬다"며 "그 영향을 받아서인 지 아버지도 교육자셨고, 우리 형제들 가운데도 2명이 전·현직 교사"라고 말했다.
손씨는 "현재 할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며 "많이 늦었지만 당신이 하셨던 일만이라도 정확히 파악해, 후대에 물려주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김창훈 chkim@kyeongin.com / 2006년 12월 1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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