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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人·61]손승용 목사

by 아름다운비행 2007. 9. 4.

[인천인물 100人·61]손승용 목사

종교인으로… 언론인으로… 구국계몽·독립운동 열정 지피다

 

 

 

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낯선 이름이다.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구국교육운동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의 생애와 이력은 아직까지 역사 속에 가라앉아 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나서는 성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뒤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교육에 힘을 쏟았던 시기의 자취를 찾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인천에 머문 기간은 약 8년. 그의 생애 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그가 인천에 뿌린 씨앗은 결코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동포 우리 민족아, 우리의 독립만세를 위해 자유정신을 진흥하여라'.

손승용 목사가 남긴 수첩에 적혀있는 창가 중 일부다. 20페이지 정도의 조그만 수첩에는 애국정신이 물씬 묻어나는 창가들이 그의 자필로 빽빽이 적혀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은 창가들로 보인다. 그는 이 수첩을 항상 몸에 지니고,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창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막 전래된 기독교는 민족운동의 자궁역할을 했다. 국권침탈 위기에 놓인 시기 뜻있는 인사들이 기독교 아래 모여들었고,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구국교육운동과 결합됐다. 신앙과 교육의 합일은 특히 강화에서 감리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손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첩과 가족 사진 몇장 외 손 목사와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다. 전면에 드러나기 보단 후방에서 조력자로 활동한 그였기에 언론사(言論史)와 감리교에 남은 흔적을 제외하곤 이름 석자 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흔적들과 손 목사를 연구하는 이성진(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씨 등의 조언으로 그의 생애를 어렵게 짜맞출 수 있었다.

 

 

 
 
  ▲ 지난 1910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찍은 사진. 인천으로 내려오기 직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손 목사의 고향은 전남 나주다. 양반 출신으로 줄곧 고향에서 한문학을 가르치다 30대에 들어 개화사상을 접한 뒤 서울로 상경, 관직생활을 했다. 개항과 함께 외세가 밀려드는 걸 직접 목격한 그는 1986년부터 독립협회에서 활동한다. 이때 맡은 일이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 기자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기자인 셈이다. 언론학계에선 그를 주필 서재필 다음인 조필이자, 실질적인 독립신문의 2인자로 인정하고 있다. 손 목사는 독립협회가 수구세력 단체인 황국협회와 어려운 싸움을 벌이던 시기 독립협회 중추원 의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당시 함께 활동한 회원들로는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이동휘, 이동녕, 주시경, 신채호 등이 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이동휘와는 약 10년 뒤 강화에서 교육구국운동을 벌이며 다시 엮이게 된다. 서재필이 국외로 추방되고,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독립신문을 운영하자 기자였던 손 목사는 그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다. 당시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였다.

1900년 5월 손 목사는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 그가 인천에 내려온 건 조원시(George Heber Jones, 경인일보 2005년 9월15일자 14면보도) 목사의 초빙 때문이었다. 당시 제물포교회(내리교회) 담임이었던 조 목사는 영화학당을 책임지고 운영할 교사가 없어 적임자를 찾던 중이었다. 손 목사는 양반출신에 신문화에 대한 지식이 깊을 뿐 아니라 애국사상도 투철한 최적임자였다.

손 목사는 교사로 부임하자 학업에 게으르거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단호히 그만두게 했다. 엄정한 성격의 일면이 드러나는 동시에 서당식으로 운영됐던 영화학당을 근대식 학교로 전환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손 목사는 기독교를 통해 애국충정과 개화지식을 갖춘, 쓸모있고 강한 인재를 키워내려 했던 것이다. 조원시 목사는 1901년 연례보고서에서 '손씨는 훌륭한 교사고, 엄격한 훈육가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이쪽으로 펼쳐진 분야가 가장 유망하다'고 손 목사를 극찬했다.

1903년 영화학당은 미 감리회 한국선교부에 의지하지 않는 사립 영화학교로 인가를 받는다. 이 때 손 목사는 근대식 정규학교로 인가받기 위한 실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정규학교에 맞는 새 학칙을 제정하고, 학제도 개편했다. 이후 영화학교는 타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몰릴 정도로 활성화된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 손 목사는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교육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해에 치러진 졸업식 사진에선 당시 영화학교를 감싸고 있었던 강한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졸업식 때도 교사 앞에 십자가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한 것이다. 요 시기 영화학교를 거쳐간 그의 제자들로는 이미 경인일보가 '인천인물 100인' 중 한명으로 보도한 하상훈과 유두희 등이 있다.

1906년 손 목사는 민족정신의 씨앗을 뿌린 영화학교를 떠나 강화읍 잠두교회 담임을 맡는다. 1908년엔 조원시 목사 등과 함께 잠두의숙을 교회 부설 제일합일남학교로 다시 세웠다. 이듬해엔 제일합일여학교를 세웠고, 두 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때 개교기념일을 5월 31일로 정했다. 손 목사는 합일학교 외에도 강화에서 활동한 약 5년간 교회부설 매일학교를 확산시키는 등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강화에 왔을 때 5개 였던 매일학교는 3년 만에 17개로 늘어났고, 교동에서도 2개였던 매일학교가 같은 기간 13개로 확대됐다.

 

 

 
 
  ▲ 손승용 목사의 몇 안되는 유품 중 하나인 수첩.그의 애국 정신이 녹아있는 창가가 빼곡히 적혀 있다.  
 
지난 12일 찾은 인천 강화군 합일초등학교에선 희미하게나마 손 목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학교에서 기념하는 공식 설립자는 손 목사가 아니지만 '합일초교 백년사'엔 그의 이름이 2대 설립자 겸 교장으로 기록돼있다. 이 학교엔 보통 가을에 여는 운동회를 봄에 하는 특이한 전통이 있다. 손 목사가 교장시절 정한 개교기념일에 100년 가까이 운동회를 맞춰온 것이다.

합일초등학교 옆쪽으로 강화중앙감리교회도 보였다. 옛 잠두교회다. 잠두(蠶頭)는 한자 그대로 누에 머리. 지형이 툭 튀어나온 형상이라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현재도 교회부설 유치원 이름은 '잠두유치원'이었다. 교회 1층 전시실에는 1대 담임인 조원시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옆으로 5대 담임인 손 목사의 사진도 보였다.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인천 강화에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기억되고 있었다. 이은용 장로는 "손 목사는 20세기 초 강화 기독교와 교육운동사에서 굉장히 비중있는 인물"이라며 "특히 손 목사의 활동 시기는 이동휘가 강화에서 보창학교를 세우고 구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시기와 절묘하게 겹친다"고 말했다.

이동휘가 보창학교운동을 시작한 건 1905년이다. 보창학교운동의 중심이 감리교였고, 이동휘와 손 목사의 독립협회 시절 인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이 연계했을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동휘가 전면에 나서 학교를 세웠다면, 손 목사는 교회를 기반으로 학교의 틀을 다지는 등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게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해석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 독립운동가 중 한명으로 자리잡은 이동휘와 달리 손 목사의 활동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성진씨는 "관직생활과 영화학교에서 쌓은 경험, 여기에 교육운동에 대한 손 목사의 열정을 감안하면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이 부분이 앞으로 우리가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 강화 합일초등학교 전경. 오른쪽건물이 서 있는 곳이 남학교 자리였고, 왼쪽 조그만 야산에 여학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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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61] 인터뷰/ 손승용 목사 손자 손동옥씨

 

 

 
  "6·25전쟁 때 할아버지 관련 자료들을 모두 없앤 게 안타깝습니다."
 손승용 목사의 손자 손동옥(61)씨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얘기를 아버지께 들었다"며 "인천에서 활동할 당시 고향에 가족들은 다 남겨두고 생계는 뒤안시 했다고 아버지가 가끔 원망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손씨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건 "전쟁이 나자 공산군에게 발각돼 불이익을 당할까봐 우려한 아버지가 할아버지 유품과 자료들이 든 궤짝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설명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손 목사 자료는 조그만 수첩과 사진 서너 장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유언 한 마디. 그 유언은 '내 앞에서 울지 마라'였다. 손씨는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으로 남긴 건 없지만, 할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애착과 독실한 신앙심을 물려줬다"며 "그 영향을 받아서인 지 아버지도 교육자셨고, 우리 형제들 가운데도 2명이 전·현직 교사"라고 말했다.
 손씨는 "현재 할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며 "많이 늦었지만 당신이 하셨던 일만이라도 정확히 파악해, 후대에 물려주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김창훈 chkim@kyeongin.com / 2006년 12월 14일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