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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윤응념·유두희 국가가 본격조명 나선다

by 아름다운비행 2007. 11. 19.
인천인물 윤응념·유두희 국가가 본격조명 나선다
경인일보 소개, 학계 주목 독립활동 인정땐 서훈 권고

2007년 01월 16일 (화) 정진오 schild@kyeongin.com

 

일제시대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인천 인물' 2명이 진실규명 차원에서 국가기관의 조사대상으로 결정될 것으로 보여 그 결과가 관심을 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과 유두희(1901~1945) 등 2명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2월 말까지 조사개시 여부를 최종 판단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지만 이들 2명의 중량감으로 볼 때 조사가 이뤄질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2명은 특히 경인일보의 특별기획 '격동 한세기,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에 각각 소개돼 학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윤응념은 2004년 12월 23일자 14면에, 유두희는 2005년 3월 10일자 14면에 각각 보도됐다.

조사기간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가 필요하며 이들의 항일 독립운동 행적이 뚜렷하다는 결론에 다다르면 위원회는 국가보훈처 등에 이를 통보, 서훈을 권고하게 된다.

윤응념은 1923년 9월 27세의 나이로 일제에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당시 신문들은 '인천사건', '인천의 중대 사건' 등으로 시시각각 보도할 정도로 전국적 관심을 끌었다. 이 사건은 윤응념이 주도해 인천항 부근의 영종·대부·장봉·시·신불도 등 섬의 부호들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일제는 윤응념이 권총으로 부호들을 협박, 강도짓을 한 것으로 몰아 15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윤응념에 대한 기록은 인천광역시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역에서조차 철저히 외면 받아왔다.

유두희는 1920년대부터 인천지역 노동, 교육, 언론 등 각종 단체의 주요 인사명단에 이름 석자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 사회운동이 곧 일제에 대한 강력한 항거였던 것이다. 그는 옥고를 치르다 얻은 병으로 숨진 뒤 6개월여 뒤인 1946년 5월 노동절 기념식에 표창까지 받았으나 이후엔 '일제 때부터 이름있는 인천지역 공산주의자'로 내몰려 냉대 받아왔다.

위원회의 조사가 끝나면 인천지역, 아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새로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