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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59. 김선웅 - 전 인천고 야구부 감독

by 아름다운비행 2007.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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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인천상업학교 선수들.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김선웅 감독이다(`인천야구 한세기'에서 발췌).


[인천인물100人·59]전 인천고 야구부감독 김선웅

2006년 11월 30일 (목) 임성훈 hoon@kyeongin.com




▲ 1948년 인천상업학교 선수들.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김선웅 감독이다(`인천야구 한세기'에서 발췌).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한무리의 야구 꿈나무를 이끌고 허름한 시장의 음식점을 찾아 당시 최고의 영양식이었던 `꿀꿀이죽'으로 꿈나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이가 있었다. 허겁지겁 꿀꿀이죽을 한 순간에 뚝딱 비워버리는 꿈나무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 그가 바로 `한국야구 100년을 빛낸 10명' 중 한사람으로 인천고 야구 감독을 지낸 故 김선웅(金善雄·1919.4.3~1978.3.28) 감독이다.
 `인천야구의 대부', `영원한 인고 감독'. 그의 야구사랑은 이같은 수식어를 이름 앞에 올려놓았다.
 김선웅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4월3일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이어 4세 때 인천으로 건너와 평생을 인천의 야구발전에 헌신했다. 특히 그가 감독을 맡던 인천고의 50년대는 그야말로 `야구의 황금기'였다.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상업학교 24회인 그는 재학시절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선수의 길을 걸었다.

그가 학생선수 시절 남긴 기록 중 하나는 좌익수 장영식(인천상업 24회)과 함께 마지막 한국인 선수로 일본 갑자원(甲子園) 대회(1932년 제22회 대회) 본선에 참가했다는 점.

갑자원 대회는 일본 조일신문사 주최로 창설된 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로 선수들이 지역 예선을 통과해서 본선 무대를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인기를 끌던 `꿈의 제전'이었다.

`인천야구 한 세기'에 따르면 당시 인천시민들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인천고의 고시엔 대회 진출이 확정된 후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일본 오사카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이 대회에 피지배 민족인 조선인이 참가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갑자원 개막 직전 1932년 8월10일 끝난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을 차지해 국내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 등 항일 감정이 비등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선웅과 장영식이 제2의 손기정과 같은 쾌거를 또 한번 이루는 게 `조선인의 꿈'이었다고 `인천야구 한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 대회 이후 김선웅은 형(김선영)이 경영하는 삼화정미소의 전무로 근무하면서 해방을 맞았다.

당시 정미소는 조선인이 할 수 있었던 대규모 기업에 속했었고 그는 이 같은 물질적 기반을 바탕으로 해방 후 인천지역 최초의 성인 야구팀인 `전인천군'을 조직하는 데 기여하면서 전인천군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학생선수 시절 이름을 날리던 그는 해방후 1950년에 모교의 감독을 맡아 야구 인생을 이어갔다.

김선웅이 감독을 맡으면서 인천고 야구부는 1952년 10월 열린 제33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제5회 쌍용기대회 우승(1953년), 제8·9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1953, 1954년), 제8회 황금사자기 야구대회 우승(1954년), 학도호국단 주최 체육대회 야구 우승(1955년) 등 일일이 열거하기 벅찬 성적들이 그의 지휘아래 쏟아져 나왔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처럼 화려한 성적을 이끌어내면서도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줄곧 무보수로 일했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재를 털어 수시로 선수들의 영양보충을 시켜주는 등 헌신적인 후배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선웅의 제자인 김재은(75·인천고 제49회) 인천고 야구동문회 고문은 “당시만 해도 점심을 굶고 연습을 하러 나오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감독님께서는 `운동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면서 수시로 선수들을 창영학교 앞 시장으로 데려가 `꿀꿀이죽'을 사주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감독으로서의 김선웅은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 또는 덕장(德將)에 가까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 한 일간지에는 김영조 전 국가대표 감독이 기록한 김선웅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의 성격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인천고 감독 김선웅은 위기나 찬스 때면 땅을 손톱으로 긁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날(제10회 청룡기대회 인천고·동산고 결승전) 결승전이 끝났을 땐 열손가락에 모두 피가 맺혀 있었다.”

후에 김선웅의 이같은 버릇은 사실 그의 독특한 `사인'이라는 부인 손경옥 여사의 증언이 나와 흥미를 자아내기도 했다.

김선웅은 1960년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시작으로 1961년 경기도야구협회장, 인고야구동문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야구 감독직을 떠나 야구행정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가 1978년 3월28일 지병인 간경화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토록 사랑했던 야구인생도 접었다.

`인천야구 한 세기'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가 보여주었던 야구에 대한 열정이 소개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반신마비 상태에서 당시 인천고 감독이었던 박정석 감독을 불러 일본어 야구교본을 구술해 받아 적도록 했다. 이 야구교본은 야구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일제시대부터 모아둔 것으로 그가 감독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침서이자 선진야구를 인천고 야구부에 접목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부축을 받으면서 운동장에 나가 후배들을 격려하고 돌봐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을 인천의 야구 발전을 위해 바치신 선생님의 웅지는 태양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들을 감싸주리라.”

“야구를 좋아하고 제자를 사랑하여 인천야구계의 스승이 된 이가 계셨으니 그가 바로 여기 누워계신 김선웅 선생님이시다.”

제자들이 마련한 그의 추도비는 그의 외길 야구인생을 함축하고 있었다.

 

2006년 11월30일 경인일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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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김재은씨가 본 김선웅 감독

 

= 제자 김재은시가 본 김선웅 감독 =

2006년 11월 30일 (목) 경인일보 webmaster@kyeongin.com


“제자들을 가족처럼, 친동생처럼 돌봐주신 분이었지….”

김선웅 감독의 제자 김재은(75·현 인천고 야구동문회 고문·서예가)씨는 김 감독과의 각별한 인연을 잊지 못한다. 바로 김 감독의 야구 유니폼을 물려받은 `행운'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해방후 인천에 상륙한 미군팀과 인천팀이 친선경기를 하던 날, 인고 전신인 인천상업학교 학생으로 담장으로 넘어가는 공을 챙기며 `배트 보이' 역할을 했던 김씨는 이날 김 감독을 처음 만났다.

“시합이 끝나고 한 선수의 배트에 글러브를 낀 도구를 하나 맡아 어깨에 짊어지고 도원고개를 넘어오는 데 누군가가 `너 야구가 좋으냐'하고 묻는거야. 그래서 `좋다'고 말했더니 다음날 다시 만나자고 해서 찾아갔는데 유니폼을 건네주시면서 열심히 야구를 하라고 격려해주시더군.”

그런데 옷이 너무 컸다. 상의가 마치 오버코트 같았다.

그때 김 감독은 웃으면서 “줄여입고 야구장에 나와라. 야구복은 내가 연습할 때 입었던 것이고 스타킹은 일본 갑자원 대회에 출전했을 때 신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날 야구복을 줄여 입고 야구장에 나갔더니 모두들 `꼬마 야구선수'라고 놀리는 거야. 그래도 야구복을 처음으로 입은, 해방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학생선수라는 자부심에 기쁨에 들떠 있었지.”

변변한 야구도구가 없어 부러진 배트는 못을 박아 전기테이프로 감아 쓰고, 실이 뜯어진 공은 구두 수선할 때 쓰는 밀초를 실에 발라서 꿰매어 쓰곤 했던 시절에 `대선배'의 유니폼, 그것도 갑자원 대회 출전 당시의 스타킹을 `하사'(?) 받았으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같은 인연으로 김씨는 인천고 야구선수에 이어 경기도 야구협회 총무 및 이사, 전무이사, 인고야구동문회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야구 행정가로서 김 감독의 바통을 이어갔다.

그는 김 감독을 `온화하면서도 강렬한 지도력을 갖춘 감독'으로 기억했다.

“그 분이 운동 열심히 하라고 창영학교 앞 시장에서 사주시던 꿀꿀이죽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후배 양성에 무진 애를 쓰신 분이었는데….”

김씨는 김 감독이 타계한 후 애통한 마음을 글로 남겨 그의 추도비에 새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