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人] 31. 조원시 - 선교·사회사업 '불' 지피다

by 아름다운비행 2006. 10. 27.

 

 

 

   
 
  ▲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 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31. 초기 감리교 대표 '학자 선교사' 조원시

 “만일 딱 한 문장으로 선교사로서의 조원시 박사를 말한다면 이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깊은 동정심을 지닌 학자의 본능과 습관을 가진 분이었다.”

 인천내리교회 제2대 담임자 조원시(George Heber Jones, 1867~1919) 목사의 삶은 선교사 윌리엄 노블(William A, Noble)의 이같은 추모의 글로 압축된다.
 조원시 목사는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 초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학자 선교사'다.

 특히 선교활동은 물론 교육사업, 하와이 이민, 학술 연구 등 그가 인천에서 남긴 업적은 괄목할만하다.

 1867년 8월14일 뉴욕 주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난 조원시 목사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미북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서 1888년 5월14일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의 사역을 돕는 일로 한국생활을 시작한 그가 인천에 온 것은 1892년.

 그가 내리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펼친 1903년까지는 인천 강화지역에 가장 왕성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강화 교항교회, 홍의교회, 고비교회,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부평 굴재교회, 하리교회, 연압읍교회 등 수많은 감리교회들이 이 당시에 설립됐다.

 선교활동 외에 조원시목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교육사업이다.
 그가 인천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 또한 교육사업으로 배재학당 시절, 자신의 한국어 선생 부부를 인천으로 이주시켜 '소년 소녀 매일학교'(영화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조원시 목사는 한국 역사와 문화, 전통 종교에 대한 학술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한국어 사전을 직접 편찬해 한국어에 서툰 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문서 선교를 통해 인쇄 출판 분야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92년 루이스 로쓰와일러(Louis C. Rothweiler)와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찬송가를 편찬했으며 1892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 12월에는 제물포 우각현(현 영화학교 자리)에서 최초의 우리말 신학연구지인 '신학월보'를 창간, 사장 겸 주필로서 깊이 있는 논설들을 많이 남겼다.

 그가 창간한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장로교에서 발간한 'The Korea Field'와 함께 'The Korea Mission Field'로 통합됐는데, 이 통합잡지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사를 서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원시 목사가 인천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그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02년 12월22일 한국 최초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던 121명 가운데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하와이 이민을 실질적으로 주선하고 지원했던 주인공이 조원시 목사였다. 이어 조원시 목사는 1903년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오늘의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가 태동되도록 하기도 했다.

 김진형 목사(죽림교회 담임목사)는 '하와이 이민과 조원시'란 세미나 발표자료를 통해 조원시 목사가 하와이 이민에 적극적이었던 데 대해 “당시 극심한 가뭄이 중부지방을 휩쓰는 등 한국에서의 삶이 힘든 상황에서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낫고 신앙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조원시 목사는 1909년 5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1919년 5월11일 5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임성훈  hoon@kyeongin.com / 2005년 09월 15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