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人"자를 가리켜 우리는 서로 기대어 선 모양이라고 한다.
서로 도우며 산다는 뜻이리라.
역사도 또한, 독자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항해왕 엔리케 왕자에 대해서 글을 옮겨 적은 적이 있다.
포르투갈의 국세 확장기인 14세기에 왕자의 신분으로서 대양항해를 꿈꾸며 포르투갈이 전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의 한 축이 되었던 인물.
서양 諸國이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다른 각도에서 또 다른 논점을 제공하는 일이니 그 점에 관해서는 여기서는 論外로 하자.
그 시기, 이베리아반도는 기독교세력에 몰려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수세에 몰리던 시기였고, 육식을 즐겨하던 서양인들에게 향신료인 후추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으나 이슬람인들에 의해 상권을 장악당한 그들에게는 원산지인 인도, 동남아 등지에서 직접 무역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점점 커져가던 시기였다.
또한 그 시기는 세계역사상으로도 그때까지 가지고 오던 패러다임의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움직임이 태동되던 시기이다. 교황이 절대자적 권력과 정신적인 군주로 지배하던 그 시기, 지구는 둥글다라는 시각이 서양의 많은 식자들 사이에는 보편적인 상식으로 이미 자리잡고 있었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세계역사를 보면 서로 왕래가 없었을 것 같은 동양과 서양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발되고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적잖이 볼 수 있다. 마치 에너지의 공명처럼. '101마리 원숭이'로 비유되는, 서로 교류가 없던 따로 떨어진 섬에 있던 다른 원숭이들도 일제히 바닷물에 감자를 씻어 먹었다는 '놀라운' 사건, 역사 속에 그런 사건은 많이 존재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항해학교를 만들고 바람의 힘으로 항해하는 범선이 바람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는 항해법을 발견해 내고 한 엔리케 왕자, 그가 왜 인도를 향한 뱃길개척의 탐험에 뛰어든 것인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다만 종교적 경제적 원인 외에 미지의 세게에 대한 탐험심을 그 원동력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이 1488년 희망봉을 돌파하고 인도로의 뱃길을 연 그 이면에는 아마도 인도양을 건너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 스페인에 처음으로 나타난 "신라인(新羅人)"이 그 動因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에 관한 기고문 하나를 여기에 옮겨 적는다.
좌경화된 인터넷 매체로 보이는 '통일뉴스'에 실린 연작물이다.
연작물중의 하나로서, 다양한 각도에서 신라인의 진취성을 추적해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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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연작물 전체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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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 ‘라’의 세계-3 | [새창] | 서현우 | 2007-03-13 | |||
·[통일문화] ‘라’의 세계 -2 | [새창] | 서현우 | 2007-02-23 | |||
·[통일문화] 8. ‘라’의 세계 -1 | [새창] | 서현우 | 2007-02-13 | |||
·[통일문화] 7.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2 | [새창] | 서현우 | 2007-02-02 | |||
·[통일문화] 6.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1 | [새창] | 서현우 | 2007-0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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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 5. 천하전여총도, 정화선단의 비밀 | [새창] | 서현우 | 2007-01-23 | |||
·[통일문화] 4.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천하의 중심 한반도 | [새창] | 서현우 | 2007-01-19 | |||
·[통일문화] 3. 최한기.김정호의 '지구전후도' | [새창] | 서현우 | 2007-01-16 | |||
·[통일문화] 2. 역사의 수수께끼, '캘리포니아 섬' | [새창] | 서현우 | 2007-01-12 | |||
·[통일문화] 1. '세계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천하전여총도' | [새창] | 서현우 | 2007-0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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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1 | ||||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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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해상왕의 세계
1.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우리는 그동안 육지를 중심으로만 우리 역사를 생각해 왔다. 전 지구적 차원으로 보아도 지표면의 70퍼센트가 바다이며, 그나마 우리역사가 오늘에까지 단절 없이 이어온 무대로서의 한반도 또한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말이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이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바다엔 수많은 해양종족이 존재하며, 수많은 민족이 바다를 무대로 부침을 반복해왔다. 우리 역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실상 우리 민족은 자연조건에서만이 아니라, 바다를 육지 이상의 활동무대로 삼아온 바다의 민족이었다.
이제부터 독자들과 더불어 우리 조상들의 바다를 찾아 머나먼 항해를 시작하자.
1410년대 중순, 이베리아 반도.
700여 년 지속된 아랍(무어인)의 통치가 황혼에 접어든지 오래, 이베리아 반도 전역엔 폭풍전야의 긴장 국면이 지속되고 있었다. 반도 남단의 그라나다에 간신히 버티고 앉은 마지막 사라센 왕국 나스르 왕조를 한 축으로 하고, 이에 대항하여 이교도 왕조를 몰아내려는 카스티야와 아르곤의 두 왕국 및 대서양 연안에서 국력강화에 고군분투하는 포르투갈 왕국 등의 기독교 세력이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 형세였다. 카스티야와 아르곤 사이에 끼여 명맥 유지에 급급한 바스크인의 나바라 왕국은 세력균형에 큰 의미가 없었다.
그즈음 한 무리의 이방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단에 나타났다. 이방인들은 반도의 주민들이 여태 본 적이 없는 낯선 인종들이었다. 그들은 무어인도, 베르베르인도, 니그로도, 투르크인도, 페르시아인도 아니었다. 단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에다, 찌들대로 찌든 초췌한 모습에도 형형한 눈빛과 구리 빛 얼굴이 바다의 용사임을 알리고 있었다.
▲ 15C 초.중반 통일 직전의 이베리아 반도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저마다 말하길, 말로만 듣던 키타이인이라 하기도 하고, 인디언이라 하기도 하고, 또 지팡구인이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들을 안내해온 무어인은 그들을 신라인이라 했다.
“신라, 신라가 어디 있지?”
이구동성 궁금증을 나타내자, 한 노인이 나섰다.
“신라는 동방에 있는 황금이 넘치는 나라요.”
노인은 학자풍의 무어인이었다.
이방인들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서 온 뱃사람들이었다. 아랍세계에선 여전히 신라인으로 불리고 있는 이들은 일찍이 대양을 누벼온 백제-신라의 후예들이자, 백제의 패망 이후, 중국대륙 동안을 거점으로 황해-동중국해의 동아지중해와 인도양을 넘나들던 해상왕들이었다.
그런 이들은 원명元明 교체기의 20여 년 해란과 명 제국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대륙을 탈출한 50여만 해이海夷들의 일부로서 동남아 파림빙(巴林憑-팔렘방)과 인도 고리(古里-캘리컷), 아라비아의 자비드(예멘의 수도)를 전전하다, 유라시아의 서쪽 끝까지 흘러든 것이었다.
이들은 강수(綱首-선장), 소공(梳工-키잡이), 도장(都匠-기사장), 선공(船工-목공), 단공(鍛工-대장장이), 번장(番匠-도목공), 암해자(暗海者-항해사) 등으로 뭉친 해상결사의 일원이기도 했다.
머나먼 타향에 이른 이방인들은 곧장 낙담하고 만다. 나스르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에 몰아닥친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다. 기독교 세력에 의한 왕조 존망의 위기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술탄 유스프3세가 죽자, 술탄 계승을 둘러싼 끊임없는 궁전암투에 접어든 것이다.
아랍계 무어인 왕국에선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인도양 연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명나라 대선단(정화 선단)이 인도양 제해권을 장악한 이상, 명 조정에 반기를 들었던 그들로선 인도양에서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했다. 인도의 고리古里(캘리컷)에서 접한 소문도 있었다. 함께 중국대륙을 탈출한 후 파림빙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진조의陳祖義가 명나라로 끌려갔다는 내용이었다. 진조의는 필경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논의 끝에 이방인들은 무어인의 왕국을 벗어나, 기독교 진영으로 건너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모험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독교 진영에선 가는 곳마다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이방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바다의 얘기는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방인들이 들려주는 바깥세계는 온통 놀랍고 흥미로운 것으로 가득했다. 오로지 지중해 세계에다, 간혹 바람에 실려 오는 인도와 기타이의 몇 가닥 편린만이 세상의 전부이던 그들에게 동방제국諸國과 넓고 넓은 바다의 얘기들은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한 줄 몰랐다.
이방인들이 보여준 세련된 나침반(신라침반), 항해용 물시계(동호銅壺) 등의 물건은 그들보다 우수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암해도와 양갱(洋更-항법서)만은 비밀로 취급했다. 그것은 그들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신라, 신라! 이방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가는 곳마다 인파로 넘쳐나고, 주빈의 자리를 차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인들에게 권력의 손길이 닿았다. 최초의 손길은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코에 의해서였다. 아비스 왕조의 초대 왕인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서 역사상 항해왕자로 유명한 그 엔리코 왕자였다.
이로서 조선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지리지식이 최초로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이듬해 대서양의 마데이라 제도에 이어, 몇 년 후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곤 식민정책을 서두른다.
또한 그 와중에 싸그레스 해양학교가 문을 연다. 이로서 동방의 지리지식에 눈 뜬 포르투갈은 아랍세계 각지로 신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정보원을 파견하는 한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장기 계획에 착수한다. 당시 지중해 중개항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발흥으로 인해 차단당해 있었다. 어쨌든 포르투갈의 이러한 노력은 아라비아를 통해 중국 정화 선단의 항해 성과를 일부 흡수하기까지 한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신라인들은 각각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갈리시아 등에 정착하고, 누군가는 프랑스 발로아 왕조의 사절인 짠 니코에 의해 프랑스로 건너가는가 하면, 이탈리아 및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까지 그 흔적을 남긴다.
그러한 와중에 지도학 상에 수수께끼 같은 일이 일어난다. 1400년에 이르기까지 고작 지중해 중심의 세칭 T-O지도 수준에 머물던 것이, 갑작스레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을 담은 지도가 제작되는가 하면,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카리브 해의 섬들과, 또 그린란드가 뚜렷이 묘사된 지도가 출현하기도 한다.
이어 세기 말에 이르자, 포르투갈의 궁전도서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마틴 베하임(독일)에 의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전모가 담긴 최초의 지구의가 제작된다. 선박에 있어선 기존의 갤리선과 캐러벨선 수준을 뛰어넘는 카략선이 건조되고 침경항법이 등장한다.
1469년 아르곤의 페르디난드 왕자와의 결혼동맹을 발판으로, 1479년 카스티야-아르곤 통합 국왕에 오른 이사벨라 여왕은 1492년 1월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국왕 아부 압달라 무아마드 12세(보아브딜)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2월에 스페인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사벨라 여왕은 통일과 동시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당시 야전 사령부 겸 임시 궁전이던 코르도바의 알 카사르로 불러 미뤄왔던 서인도로의 항해를 승인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492년 8월 항해 준비를 마친 콜럼버스는 3 대의 선박과 90여 명의 승무원으로 세비야의 팔로스 항을 출항하여 역사적인 신대륙 항해에 나선다.
신라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뿌린 씨앗은 두어 세대가 지난 뒤, 그렇게 열매를 맺는다. 그렇지만 항해의 주역은 유럽인이었고, 그 무렵 신라인들은 이미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은 필자의 상상이자, 가설이다. 아마 독자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선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것인데, 지금부터 그 근거를 하나씩 드러내어 역사의 개연성을 음미해 보자.
먼저 15~16C 중세 유럽에서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지도상의 수수께끼를 들 수 있다. 우리는 1장에서 이미 남극대륙의 존재가 나타나는 16C 지도를 확인한 바 있다. 그렇기에 여기선 논외로 하고, 15C 초부터 나타난 여타 지도의 수수께끼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15C 이전의 시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세칭 T-O지도가 그 주류를 이룬 가운데, 14C 후반에 이르러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지도상의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래는 T-O 지도의 기본 구도와, 14C 후반의 한 지도이다.
▲ T-O 지도의 기본구도, 동서방향을 수직 축으로 하여 구성한 지도인데, T자의 수평선은 소아시아를, 수직선은 지중해를 묘사하고 있다. T자를 이루는 두 선이 교차하는 부분이 예루살렘이고, O자는 구형을 나타낸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 1375년 아브라함 크레스쿠 지도. 당시 알려진 세계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 1424년 주아네 피치가노 해도. 붉은 색의 부분이 오늘날의 푸에르토리코 등이 위치한 카리브 해의 안틸레스 제도라고 한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 1440년 빈 랜드 지도. 그린란드 섬의 윤곽이 오늘날의 지도와 거의 흡사하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 1459년 프라 마우로 지도. 남반구를 위로 하여 그려진 지도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남단이 나타난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더하여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프라 마우로 지도에 나타난 아프리카 대륙의 전모와, 동시에 포르투갈이 보인 아프리카 남단 항로에 대한 집요함이다. 이 지도가 나오기까지의 14C 유럽은 앞서 살펴본 대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 그리고 실제 희망봉을 발견한 때는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488년으로,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의해서였다.
또한 프라 마우로 지도를 직접 확인한 영국의 연구가 개빈 멘지스에 의하면 지도상엔 중세 중국의 선박인 정크선과, 아프리카 남부에서만 서식하는 새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사실 중세 지리상의 발견을 낳은 유럽의 초기 탐험가들엔 공통적으로 비밀이 숨어 있다. 여기서 수세기에 걸쳐 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을 몰두하게 만든 마젤란과 콜럼버스의 비밀 하나씩을 소개하겠다. 마젤란의 전기에서 주로 ‘마젤란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과,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때 무명의 보잘것없는 함장 마젤란이 존재의 어두움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선언한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통로는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다. 나에게 함대를 달라. 그러면 내가 그 통로를 가르쳐 주고 동에서 서로 지구를 일주해 보이겠다.”
그는 포르투갈 왕궁의 비밀서고인 테소라리아에서 훔쳐본 극비지도를 떠올리며 확신하듯 말했다.
‘내가 본 지도에 의하면 그 섬이 이쯤에 존재하고 있었다.' -항해 도중 나타나지 않는 육지에 초조함을 달래며.
도대체 마젤란과 콜럼버스가 본 지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위대한 선행자는 대체 누구이며,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지도들이 마젤란과 콜럼버스에 전해졌단 말인가?
여기에다 16C의 포르투갈 역사가 안토니오 갈바웅(Antonio Galvao, ~1557)의 언급과, 지난 2004.5.7자 CBS노컷뉴스 기사를 덧붙여 보자.
1428년 포르투갈 왕의 장자인 동 페드루가… 로마와 베네치아까지 여행했다. 그곳에서 그는 세계 곳곳과 지구의 모양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한 장 챙겼다. 마젤란 해협은 ‘용의 꼬리’라 불렸으며….
지난 1539년 발간된 해양지도가 21세기 인공위성을 이용, 촬영한 지구표면의 온도를 나타내는 지도와 모양이 일치해 학자들이 놀라고 있다.… 미국 제임스포드 벨 박물관이 소장중인 북대서양 지도인 카르타 마리나(해양지도)를 조사하던 로드아일랜드 대학의 톰 로스비 교수는… 항로에는 용이 불을 뿜으며 선박을 덮치는 것으로 묘사한데 주목했다.… 용이 선박을 공격하는 것은 이 항로가 대단히 험해 해난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필자의 생각으론 용이라면 동양적 사고의 산물이지, 결코 유럽의 것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모본 지도를 모사한 것이거나, 그 영향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여겨져 중세 유럽지도의 기원을 짐작하게 한다.
개빈 멘지스는 이러한 15C 유럽 지도상의 갑작스런 변화를 외부의 요인, 즉 정화 선단의 항해 성과라고 확신했다. 필자의 판단 역시 그 점에선 별 차이가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정화 선단 외에 안틸레스 제도와 그린란드를 지도에 남길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멘지스는 그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정화 선단의 6차 항해(1421년 출항)에 주목하며, 그 항해야말로 최초의 세계주항이었다고 주장했다.(천하전여총도의 모본인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는 세계주항이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의 위 지도들과도 시기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다. (멘지스는 베네치아 상인인 니콜로 다 콘티의 1434년 출판 여행기를 언급하며, 콘티가 인도 캘리컷에서 정화 선단에 승선하여 호주 대륙을 거쳐 중국으로 갔음을 확신했다.)
어쨌든 독자들은 이쯤에서,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의 신라인을 끌어들인 이유가 될 수 있느냐며 의문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본 1402년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혼일강리도)를 기억할 것이다. 그곳엔 희망봉을 지나는 아프리카 동서해안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원나라 지도와 혼일강리도를 비교한 것이다.
▲ 원나라 지도와 혼일강리도(1420년 수정본)의 아프리카 부분. [자료사진 - 서현우] | ||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정황은 단지 필자가 스페인의 신라인을 들먹인 첫 번째 이유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근거는 이제부터다. 독자들은 아래의 발렌시아 지도에서 Silla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페인 발렌시아 주州 소재, 발렌시아 시市와 그 인근 지도. 발렌시아 시 남쪽에 Silla가 보인다.(붉은색 테두리는 필자) [자료사진 - 서현우] | ||
현재 스페인엔 위 Silla와 다른 스펠링의 Sila가 각각 카탈루니아 주의 바르셀로나 시 북부인근과, 갈리시아 주 오렌스 시에 존재한다.
필자가 처음으로 Silla와 Sila에 주목한 것은 칠레의 유명한 Silla 천문대에서 비롯되었다. Silla 천문대는 칠레 북부 아타가마 사막의 남쪽 끝 무렵, 안데스 산맥의 지류와 합류하는 지점의 Silla 산에 위치해 있다. 1960년대 유럽 10여 개국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건설한 뒤 현재까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천문대로 오로라 관측에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Silla란 이름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이곳만이 아니라, 컬럼비아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멕시코에도 존재한다. 또한 스펠링이 다른 Sila 또한 몇 군데 존재하는가 하면 심지어 Corea 지명도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라틴아메리카는 브라질을 제외하곤 스페인어 언어권 지역이다. 그런데 같은 지명이 넓은 분포를 나타낸다는 것은 이 지명이 남아메리카 인디오의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에서 이입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필자는 즉시 스페인의 지명을 뒤지기 시작하다, 결국 위의 Silla와 Sila의 두 지명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중 Silla가 현대 스페인어(국어인 카스텔라노)의 어휘로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민족국가인 스페인엔 현재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데 공용어로서 대표적 언어가 국어인 카스텔라노(카스티야어)와 카탈란(카탈루니아어), 갈레고(갈리시아어) 등인데, 카스텔라노의 Silla 외에 어떤 언어에도 Silla나 Sila, 또 Corea란 어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즉 Sila나 Corea는 오로지 지명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은 8C 초에서 15C 말까지 800여 년 아랍에 의한 피지배의 역사를 안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현대 스페인어엔 아랍의 영향이 많이 배어 있는데 특히 국어인 카스텔라노가 더욱 그러하다. 더불어 아랍의 영향은 지명에까지 영향을 미쳐 수도인 마드리드나, 과달라하라, 그라나다 등이 모두 아랍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멀리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도 아랍어에서 유래한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Silla가 스페인의 국어인 카스텔라노에서 어떤 뜻으로 쓰여 지고 있는가를, 또 아랍어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독자들은 그 연관관계를 통해 이들 Silla와 Sila가 갖는 우리 역사 속의 신라新羅와의 관련성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더하여 스페인의 신라인이란 또 다른 근거를 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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