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연재] <세종실록>으로 거슬러 오르다 ①인간 세종
“신하는 ‘몸 아끼라’지만 물러가 쉴 곳이 없는 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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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 위의 정치’ 청산 위해 세종은 잠들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대내외적으로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 양상과 사뭇 닮았다. 그 때문에 세종 시절과 오늘을 비교하는 학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세종은 정치·경제·문화 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아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한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성인군자였을까. <세종실록> 속의 세종은 무척 부지런하면서 주어진 목표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술수와 위협도 가했던 냉정한 현실정치가로 나타나 있다. 고뇌와 번민도 많았을 터다. 세종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 건국 초기의 국가 혼란과 대외관계를 극복하고 성난 민심을 다스리며 체제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국가 CEO로서 정치적 혜안과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으로 經國의 리더십을 발휘한 그를 몇 차례에 걸쳐 재조명한다. “나는 세종이 되고 싶었는데 태종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보다.”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 청와대 참모들에게 던졌다는 이 말은 엄밀히 말하면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새 시대의 장남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역할에 머무를 것 같다”는 지난해 대통령의 발언에 비추어볼 때, 노 대통령에게 태종은 창업기의 막내 주자로 인식되는 듯싶다. “해방을 맞으면서 이전 역사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군사정부 시절의 잘못된 역사가 정리되지 않았다”, “소득 2만 달러의 선진 시대에 대비한 역사 정리로 질적 업그레이드의 사회적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중앙일보> 2004.8.24) 잘 알려진 것처럼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는(1400) 등 군제를 개편했고, 세제개혁(貢賦) 및 토지조사(量田) 사업을 실시해(1401∼13)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 천도를 감행해(1405) ‘국기’(國基)를 닦은 것도 그였다. 무엇보다 그는 명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 조선 왕조의 ‘국격’(國格)을 높이는 한편 이를 통해 왜구와 야인의 약탈을 크게 줄였다. 태조 이성계가 세워놓은 국가의 기반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의 걸림돌’을 제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경제가 ‘제2의 도약’을 한 가운데 ‘민주주의가 공고화’하는 선진시대를 준비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는 이 점에서 태종과 닮았다. 그 의지가 실제로 실행될 것인지, 그리고 노대통령의 ‘역사 정리’가 태종의 ‘정치적 설거지’와 같은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세종에 대한 노대통령의 부정확한 인식이다. ‘새 시대의 장남’으로서 세종의 역할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태종이 설거지하고 차려 놓은 밥상에 앉아 고상하게 식사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집권했던 15세기 전반은 대내외적 혼란기였다.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야인들은 ‘국경과 해안을 제멋대로 침략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세종실록> 01. 06. 09)이 연례행사처럼 거듭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차린 밥상 받은 것 아니다 뿐만 아니라 환관 출신 명나라 사신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뇌물 요구와, 황제의 - 타타르(達達) 정벌을 위한 - 파병요청과 말 2만 필 요구 사건(<세종실록> 32. 01. 13) 등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은 가뭄과 홍수로 인해 ‘흉작이 아닌 해가 없었으며’(<세종실록> 19. 08. 28) ‘창고가 거의 비어 백성을 구휼할 수도 없는’(<세종실록> 04. 07. 09)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세종 역시 태종에 이어 구시대의 또 다른 막내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세종을 조선 왕조의 새로운 시대, 즉 수성기(守成期)의 군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일련의 위기를 극복하여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지고 인구가 많아지게’ 하는 등 ‘우리나라 만년의 기틀을’(이이 <율곡전서> 동호문답) 세우게 한 세종의 정치 리더십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세종의 시대는 그 이전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보여주어야 하는 때였다. 세종이 보기에 그 이전의 시대는 ‘말 위(馬上)에서 정치’를 하는 시기였다. 태조 이성계는 그야말로 말 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활 하나로 고려 왕조를 쓰러뜨린 무장(武將)이었다. 부왕 이방원 역시 고려의 문과에 급제했다고는 하나 집안을 일으키고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바빠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세종 자신이 즉위한 해까지도 계속되는 정치적 ‘설거지 작업’에서 나타나듯, 태종 역시 ‘마상정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주먹의 힘을 권리로, 복종의 심리를 의무 관념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절대 ‘말 위에서 잡은 정권’은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이른바 ‘문화적인 정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권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정치로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을 세종은 배워서 알고 있었다. 이 점에서 좌사간 허성(許誠) 등이 “문화적인 정치를 하는 시대에는 본시 나라를 창설할 시기와는 같지 않아서(守文之世, 固與創業之時不同, <세종실록> 08. 01. 26) 법과 제도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올바른 지적이었다. 그런데 세종의 정치를 살펴보기 이전에 태종의 정치적 설거지 작업의 의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세종이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어 왕위에 오른 다음까지도 계속된 일련의 ‘왕자의 난’과 ‘외척 제거 작업’이 세종의 정치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태종에 의해 수행된 ‘피의 숙청’에 대해 세종은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종이 태종의 ‘설거지 작업’을 묵인 내지 승인했다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있다. 자신의 재위 기간에 발생한 심온(沈溫)의 숙청 과정에서의 세종의 태도가 그것이다. ‘강상인의 옥사(獄事)’(1418년 7월)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외척에 대한 태종의 작심한 듯한 태도와 냉혹한 권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상왕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傳位)한 지 겨우 보름 가량 지난 8월의 어느날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 등을 의금부에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자신이 전위할 때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고 말했음에도 강상인은 임금에게만 아뢰고 태종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다. 사실 강상인은 태종이 즉위하기 전부터의 가신(家臣)으로, 30여 년 동안 태종을 보좌해 온 측근 인사였다(<세종실록> 00. 08. 29). 그런 그를 태종은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해 “국가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심온이 말했음을 자백하게 했다(<세종실록> 00. 11. 22).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던 심온은 귀국하자마자 강상인의 이 자백 때문에 수모자(首謀者)로 몰려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렀다. 심온이 천거한 사람과 그를 좇던 사람들도 모두 파면된 것은 물론이다. 병권 장악이 ‘化家爲國’의 으뜸 조건 그런데 세종은 자신의 장인인 심온이 죽음에 이를 상황에서도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는다. 사건은 시종 상왕인 태종에 의해 주도되었다. 심지어 박은 등 여러 신하가 “그 아비에게 죄가 있으니 그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세종실록> 00. 11. 23)고 하여 왕비 폐출(廢黜)을 주장할 때까지도 세종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이 기간 거의 매일 태종에게 문안하고 경연에 나가거나 국학(國學)에 거동하는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세종은 상왕인 태종이 자신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태종 및 신하들과 연회에 참석하여 밤늦게까지 춤을 췄다(<세종실록> 00. 12. 24). 태종의 일처리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동조 내지 승인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태도다. 자신의 신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들을 생각할 때 - ‘폐비의 문제’에 대해 국왕인 세종이 어떤 의견을 표명했다면 상왕이라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결국 왕비는 보전되었다). 그렇다면 태종의 일처리를 세종이 묵인 내지 승인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필자는 태종이야말로 조선 왕조를 국가로 인식한 최초의 국왕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공신과 심지어 태조 이성계마저 ‘화가위국’(化家爲國)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왕씨 가문이 차지했던 옥새를 이씨 가문이 얻은 것 정도로 이해하거나, 자신들이 지지하던 이성계 일파가 모든 가문의 으뜸 자리(宗室)를 차지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방원은 세자 시절 사병을 혁파한 직후 화가위국과 관련한 조영무(趙英茂)의 “세자의 가르침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한”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아직도 대부분의 공신이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 자리에서 서유(徐愈)는 송나라 태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궁내에서 장상(將相)에게 잔치를 벌였을 때의 일을 통해 화가위국의 의미를 말했다. 서유에 따르면 “잔치에 참여한 장상들이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즐기심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자 태조는 ‘나는 즐겁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에 장상들은 ‘천하가 이미 정(定)하여졌는데 폐하께서는 왜 즐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태조는 ‘애초에 경들이 병권을 쥐고 나를 능히 추대하여 천자로 삼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경들의 휘하 장사(將士)들도 경들을 추대하여 장상을 삼기를, 또한 경이 짐(朕)을 추대한 것 같이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 아닌 태종이 국가 의미 처음 살려
물론 정도전을 비롯한 몇몇 정치가들은 새로운 문명국 조선 왕조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집안을 일으키는 일’과 ‘국가를 만드는 일’ 사이에 놓인 중대한 격절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의 경우만 해도 나라를 설계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국가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이 태조의 선호에 따라 장자 방우가 아니라 말자(末子) 방석을 왕위 계승권자로 내세울 때, 명의 지나친 요구(표전문 사건)에 대해 요동 정벌 기도(攻遼企圖)로 맞설 때의 태도가 그것이다. 이방원의 관점에서 볼 때 정도전은 집안을 가지런히 만드는 일(齊家, 장자상속)은 물론, 유능한 자에게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원칙도 깨뜨린 정치가였다. 그는 재상 중심의 정치(?宰論)를 고집한 나머지 국가가 재상이나 국왕과 같은 정치 행위자나 유교 이념보다 초월적 존재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 점에서 국가는 여러 가문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가문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숭고하고도 독자적인 실체라는 점, 따라서 국가를 위해서라면 때로 군주는 공신과 친지, 가족까지 숙청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국왕 자신의 몸까지 바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태종의 생각은 독특한 것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나 대마도 정벌군의 보고를 통해 중국 사람이나 ‘섬에 있는 왜인은 우리나라 민족과 종류가 다르다’(<세종실록> 01. 07. 06)는 것을 깨달았으며, 고려 말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죽은 뒤에도 아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날에는 비가 오도록 하겠다”(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태종조고사본말)고 하여, 국가에 기여할 것을 다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조선 왕조를 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태종의 국가관을 - 원문에 ‘국가’(國家)로 표기되는 태종의 ‘국가’를 근대적 의미의 국가 개념과 비교하는 일은 여기서는 하지 않기로 한다 - 세종은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태종의 정치적 설거지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옥사’로 인해 죽은 심온을 복권시키려는 시도를 차단했다(<세종실록> 13. 09. 08).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종은 태종이 ‘발견’한 국가의 존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시대에 ‘문화의 정치’로 전환시켜 공고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젊고 유능한 집현전의 문신들에게 역사와 고제(古制)를 연구하게 하는 한편, 한 달에 평균 5회꼴로 열린 국정 세미나(經筵)에서 국가 방책을 의논하여 결정하게 했다(재위 32년간 총 1,898회의 경연 개최). 결과적으로 세종은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전제·수취제도·군사제도·국가의례 등) 국토를 개척, 확장하였으며(4군6진 및 대마도 정벌), 한글을 창제하고, ‘자주적’ 음악(雅樂)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 왕조를 체제안정기로 접어들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이런 굵직굵직하면서도 다채로운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그 탁월한 정치 리더십의 비결은 무엇일까. “짐이 물러가 쉴 곳 어디인가”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덟 살에 제위(帝位)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영지(芝草)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天書)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J. Spence, <강희제> 上諭 238) 청나라에 의한 평화시대(Pax Sinica)를 연 ‘중국의 계몽군주’(F. Voltaire) 강희제(康熙帝)의 진솔한 자기 회고록이다. 그는 자신이 ‘삼번의 난’을 정벌하고 고비사막을 건너 ‘타타르 원정’을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먼 곳에서 온 자를 부드럽게 대하고, 능력 있는 자를 가까이 두며, 세금을 낮추어 백성의 재력을 넉넉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항상 부지런했으며 조심스러웠고 (…) 수십 년 동안을 하루같이 온 마음과 힘을 다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는 “옛날의 제왕 가운데 혹 수명이 길지 못했던 자들에 대해 사론(史論)에서는 너무나 방탕하고 주색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대체로 평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너무 번거로우므로 힘들고 고달픈 바를 감당하지 못해서 (일찍 죽은 것)”라고 변론했다. 그에 따르면 “옛 사람들은 언제나 ‘제왕은 마땅히 크고 중요한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순간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기기 때문”에 국가의 최고책임자는 매사를 꼼꼼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같은 책, 234) 강희제는 늙은 대신들이 올린 “물러가 쉬기를 청하는 상주(上奏)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다”고 했다. “너희는 물러가 쉴 곳이라도 있지만, 짐은 물러가 쉴 곳이 어디 있는가.” 이는 “군주는 원래 편안히 쉬는 바가 없고, 은퇴하여 자취를 감출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고급 노예와도 같은 군주의 운명에 대한 그의 솔직한 술회다. 그는 1717년에 내린 이 고별 상유(上諭)의 끝 부분에서 자신이 “50여 년 동안 태평스러운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천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과 “내 삶이 평온한 죽음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란다”(같은 책, 240)는 지극히 평범한 소망을 피력했다. 세종의 정치를 살펴보는 이 자리에서 갑자기 강희제의 고백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세종의 정치 역시 강희제의 치세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처음부터 영웅이나 성왕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그들이 훌륭한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영웅이 되고 성왕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종이 사망했을 때, 사관은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던 임금’이었다고 평했다. 즉, 그는 즉위한 이후 ‘매일 사경(四更, 새벽1~3시)이 되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세종실록> 32. 02. 17)는 것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어려서부터 ‘책을 놓지 않았다’(手不釋卷)는 점을 들 수 있다. 세종은 실제로 책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형 양녕을 제치고 왕위 계승권자가 될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도 ‘공부하기를 좋아한다’(好學)는 것이었다.(<세종실록 > 즉위년 총서)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세종에게 독서는 일종의 피난처, 즉 ‘물러가 쉴 곳’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탈을 지켜보았다. 어제의 혁명 동지가 오늘에는 정적이 되어 서로 칼끝을 겨누는 모습도 보아왔다. 그가 태어난 영추문(경복궁 서문) 맞은 편의 준수방(俊秀坊)은 권력의 자기장(磁氣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권력의 자기장은 어린 세종의 형제들을 옥죄거나 유혹했다. 세종은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던 지도자 어린 세종이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광적으로 독서에 집착한 것은 이 점에서 그의 형 양녕이 주색잡기에 탐닉한 것과 다르지 않다. 서로 도피처가 달랐을 뿐이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권력의 자기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재위 중반기에 의정부 서사제(敍事制)를 시행하여(1436) 권한을 대신들에게 위임한 것이라든지, 신료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기어이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고(1443) 한글을 창제하는 데 몰두한 일 등이 그 대표적 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 세종의 고민으로부터 그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군주’(한영우) 내지 ‘해동의 요순’(海東堯舜, (<세종실록> 32. 02. 17) 또는 ‘동방의 성주(聖主)’(이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 덧칠해진 세종이 아닌 맨얼굴의 세종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종실록>의 세계를 여행하고자 한다. 거기에는 온천을 찾아 또는 사냥을 위해 멀리 황해도까지 떠나는 국왕의 모습도 있고, 조선 후기에는 좀체 찾아볼 수 없는 농담하는 군주의 얼굴도 있다. 또한 세제 개혁을 위해 무지렁이 농민들에게 찬반 의사를 묻는 자상한 개혁군주의 음성도 있으며, 중대한 대외정책 결정을 앞둔 최고 지도자의 고뇌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여행에서 우리는 때로 온화한 세종의 얼굴 다른 편의 ‘독재자’의 모습도 보게 되며, 말년에 두 아들을 잃고 소현왕후 심씨까지 사망한 가운데 부처에 의지하려는 고독한 임금의 영혼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좋은 정치의 한국적 모형’과, 잘된 정치와 잘못한 정치를 구분해 볼 수 있는 ‘정치적 판단의 기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호 계속) |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aks.ac.kr) | [2004년 10월호] 2004.09.17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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