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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 (인물,소설 등)

<세종실록>으로 거슬러 오르다 · 최종회|황희가 본 세종 2

by 아름다운비행 2007. 3. 22.
[화제연재]<세종실록>으로 거슬러 오르다 · 최종회|황희가 본 세종 2
“재물·여색 탐하는 자 반드시 물리쳐라”
 

여진족의 터전이었던 만주지역의 한 농촌마을.

인재 골라낼 지도자의 식견 중요…어질고 정의로운 품성을 으뜸 평가

“조선이 다시 요동을 손에 넣는다면 중국도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 세종시대 명나라 궁중의 조선에 대한 평가이자 우려다. 세종의 어진 정치가 주변국에까지 알려지고 여진족·왜인 등의 귀화가 줄을 잇자 중국은 내심 이를 경계했다.
천자와 후궁들 사이의 추문이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세종의 이민족 포용정책과 그 바탕이 된 인사 원칙을 황희의 입을 통해 듣는다.


세종 임금의 치세(治世), 확실히 그것은 이 시대의 ‘국제적 사건’이었다. 1423년(세종 5년)을 전후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들어오는 주변국 사람들의 집단 귀화(歸化) 현상이 그것이다. 상(上)께서 어진 정치를 편다는 소문이 퍼진 결과였다.

세종 임금 시기의 귀화 현상은 과거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우선 규모로 볼 때, 과거에는 대체로 개인 수준에서 투화(投化)했으나 이제는 수십 명씩 집단 귀화 형태로 바뀌었다. 1423년 여름에는 대마도의 왜인 변삼보라(邊三甫羅) 등 24명이 각기 처자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본도(대마도)는 세금이 과중해 생계를 잇기 어려운데, 조선은 어진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직업을 얻어 편히 살려고”(세종실록, 세종 5년 5월21일, 이하에서는 5/5/21 식으로 약기함) 왔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인정(仁政)을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성덕(盛德)을 우러러 사모하여 귀화(歸化)해”(5/5/21) 왔다는 이들에게 상께서는 양식을 제공하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북변(北邊) 여진족의 귀화는 더욱 빈번했다. 개별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추장들이 집단으로 귀순하는 경우도 있었다. 건주여진의 천호(千戶) 관직에 있던 동화응합(童和應哈) 등이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는 “조선에서 살기를 원한다”(17/3/28)고 한 것이 그 한 예다.

수주(愁州)지역의 천호 거기대(巨其大) 등도 “조선에서 통사(通事)를 보내 부르면 동류들을 거느리고 정성을 바쳐 귀순(歸順)하겠다”(16/10/8)고 집단 귀화 의지를 전해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들을 ‘안접(安接)’시키면서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했다.

집단 귀화는 세종의 포용정책 성과

이들이 조선으로 귀화하려는 동기는 다양했다. 왜인 변삼보라나 신분이 낮은 여진족처럼 자국의 무거운 세금이나 심각한 식량난을 피해 탈출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에 비해 여진족 추장들의 경우는 조선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 또는 건주여진 이만주(李滿住)와의 갈등 때문에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명나라에서 관직을 부여받고 그 지역 여진족을 관할하려는 이만주의 조선 침입 계획 등 중요한 군사정보를 함께 가지고 오고는 했다. 압록강 주변의 4진(여연·무창·자성·우예)과 두만강 연안의 6진(종성·온성·경원·경흥·회령·부령)을 개척하는 등 ‘조종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우리에게 이러한 군사정보는 대단히 중요했다.

태종 임금 때 투화한 일본인 평도전(平道全)을 통해 조선의 병선보다 ‘몇 백 보나 빨리 달리는’(태종실록 13/01/14) 왜선의 구조를 파악하고, 금상(今上, 세종) 초년 귀화한 왜인들의 제안에 따라 조선의 배도 왜선처럼 ‘배 양쪽에 꼬리를 달아’ 풍랑에도 심하게 기울거나 전복되지 않도록 하는 등 조선의 ‘병선 체제(兵船體制)’를 개선하는 데(01/06/27)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평도전이나 지문(池文) 등 귀화한 왜인들은 대마도 정벌 때 현지 정보를 제공하고, 우리 조정과 대마도주 사이에 연락을 담당하기도 했다(01/06/20).

왜인과 여진족들이 이처럼 집단적으로 귀화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왜인 변삼보라가 말했던 것처럼 ‘조선의 어진 정치’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만든다”(19/8/6)는 전하의 포용정책이 그것이다.

사실 아무리 정치가 어지럽고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도 물 설고 말 선 타국을 향해 온 가족이 떠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하도 이런 사정을 알고 계셨던 터라 귀화한 외국인들을 최대한 배려했다. 집을 지어 주고 벼슬을 내리는가 하면 우리나라 여자와 결혼시켜 주기도 했다. 토지세와 요역을 일정기간 면제해준 것은 물론이다(6/7/17). 매년 연말에는 이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귀화인 활쏘기 대회 및 모구(毛毬)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6/12/13).

세밑 궁중의 불놀이에 초대해 조선의 신료들과 함께 불구경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6/12/29). 매년 정월의 하례식 때는 왜인·야인(野人)과 귀화(歸化)한 회회인(回回人,아랍인)과 승인(僧人)·기로(耆老)들이 모두 자리를 차지해 조선의 신료들과 함께 근정전에 참석하기도 했다(09/01/01).

“귀화한 왜인들은 곧 우리나라의 백성”(01/05/15)이라는 ‘귀화인 포용정책’은 인근의 이민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관직·토지·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할 뿐만 아니라, 앞서의 왜인 변삼보라가 말한 것처럼 가벼운 조세와 적극적인 구휼정책으로 기근을 극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들은 민족과 부족을 초월해 조선에 ‘귀화’하려고 했다. 왜구와 여진족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사람[唐人]들과 심지어 ‘남만인(南蠻人)’(8/9/22)들까지 조선으로 귀화하고자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주위 등을 설치해 여진족을 분리지배하는 한편 조선과의 관계를 이간하려는 정책이 자칫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요동지역의 여진족이 조선에 ‘귀부’해 우리 조선이 어쩌면 ‘중화(中華)의 국가’로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1424년(재위 6년) 영락제의 사망과 함께 알려진 명나라 궁중의 조선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우려’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 중국 다음갈 만하다.” “처음 불교가 여러 나라에 퍼질 때 조선이 거의 중화(中華)가 될 뻔했는데 나라가 작기 때문에 중화가 되지 못했다. 옛날에는 요동(遼東) 이동이 조선에 속했는데, 이제 만일 (조선이) 요동을 얻는다면 중국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는 일”(6/10/17)이라는 등의 말이 그것이다.

황희 영정. 황희는 수차례 유배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세종은 다시 그를 불러 써 마침내 당대의 가장 빛나는 인물로 역사에 남게 했다.

‘조선이 중화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요동을 얻는다면 중국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통해 볼 때 “동방(東方) 예의(禮儀)의 나라”(태종실록 08/03/09)라는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쓴 것은 확실했다. “사대(事大)의 예(禮)를” 극진히 해온 너희 조선은 “더욱 충순(忠順)을 굳게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보전하라”(태종실록 01/02/06)던 과거의 어투와는 사뭇 다르게 쓰인 것이다.

“옛날에는 요동 이동이 조선에 속했다”는 말도 그렇지만, 영락제와 그 후궁들의 추문(醜聞)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는 자체를 명나라가 몹시 꺼렸다는 중국 사신 - 이 말을 전해온 -의 말은 더욱 흥미롭다. 영락제의 추문이 ‘조선의 어진 임금’의 명성과 대조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는 것이다.

사신이 전하는 바로는 명나라 궁궐에 드나들던 중국 상인(商人)의 딸 여씨(呂氏)는 궁인 어씨(魚氏)와 함께 환관과 간통한 사실이 들통날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에 화가 난 영락제는 관련자들을 직접 국문하고 ‘시역죄(弑逆罪)’를 뒤집어씌워 연루된 2,800명을 모두 ‘친히 나서서 죽였다’(06/10/17, ‘魚呂의 난’).

이 과정에서 어떤 여자는 “자기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내시와 간통한 것인데 누구를 탓하느냐”며 면전에서 황제를 욕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주변국 사람들이 귀화하고, ‘중국도 항거하지 못할’ 정도의 ‘중화의 국가’로 조선이 인식되고 부상한 중요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세종 임금의 유능한 인재 발굴과 적재적소의 배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中, “조선이 中華 될지 모른다” 우려

태종과 세종 임금께서 내게 기대하는 것도 사실은 다양한 인재의 발굴이었다. 마흔 살 무렵까지 ‘불우한 관운(官運)’으로 파직과 면직을 거듭하며 지방을 전전했던 나는 궁궐 밖에 버려져 있는 여러 종류의 인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성균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중용되지 못한 관료도 있었고, ‘역적의 편’에 가깝다는 이유로 배제된 인물도 있었다. 천한 신분 때문에 아예 관직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는 인재들은 더욱 많았다.

내가 압록강변의 4군을 개척하고 북변(北邊)을 안정시킨 ‘호랑이 장수’ 최윤덕을 영변부사로 추천한 것과(15/01/11), 왕명을 정확히 전달하고 민심을 세종 임금에게 잘 보고했다는 평가를 받은 안숭선(安崇善)을 주변의 오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 추천한 것은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잘된 일이었다.

내가 지켜본 바로 안숭선은 지신사로서 최적임자였다. 그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1420) 만큼 아는 것을 풀어쓸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세종 임금의 특명을 받고 충청도 일대를 ‘찰방(察訪)’한 후 올린 그의 보고서나,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언행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수준 높은 문장력을 구사하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上)의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경우는 상조차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간명 적절하게 전달하고는 했다.

귀화 행렬은 인재 발굴정책의 효과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음’에도 그 아비가 외국인이고 어미가 기생이라는 이유로 버려질 뻔했던 장영실(蔣英實)을 허조의 반대를 물리치고 호군(護軍)이라는 관직에 제수하도록 한 것도(15/09/16) 보람있는 일이었다.

‘인재는 세상 모든 나라의 가장 중요한 보배’라고 보았던 상께서는 인재의 천거를 요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묻고는 하셨다.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요, 한 시대가 쇠퇴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만큼 유능한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임금은 인재를 들어 쓰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인재를 구별해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좋은 의도가 있음에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방법이란 다름이 아니라 인재를 기르고 가려내 적소에 배치하는 도(道)를 말한다. 상께서 1447년(세종 29년)에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한 것처럼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들어 쓰고, 내치는 데는 모두 방도가 있는’ 것이다.

‘견문이 많고 총명하며 재주가 있으나 탐욕스러운 사람, 몸가짐을 조심하고 지조를 굳게 지키나 속마음은 부드러운 사람, 행정처리를 잘해 이름이 드러나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 학문을 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정직한 사람, 정직하고 지조가 굳으며 청렴하나 재능이 없는 사람…’(강희맹, 사숙재집) 등 인재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그 요체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같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재를 구하는 두번째 도는 인재를 기르고 단련시키는 일이다. “오랑캐를 누를 만한 위엄을 갖고 있으나 늘 자신을 단속하는 사람, 마음에 중심을 확고하게 세워 자질구레한 절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충성과 의분이 격렬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 등은 모두 국가의 운명을 맡길 만한 신하(社稷之臣)이자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이다.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를 모델로 중종대에 다시 만든 자격루. 세종은 능력이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과감히 등용해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사진:권태균>

그러나 이런 인재를 찾지 못했을 때, 아니 정확히 말해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인지, ‘함께 일하기 어려워 물리쳐야 할 인재’인지 구별하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희맹은 이에 대해 우선 반드시 ‘물리쳐야 할 인재’의 범주를 설정한다. 상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현명한 사람을 들어 쓰는 데는 본래 정해진 방법이 없지만[立賢無方], 간사한 사람을 내칠 때는 법도가 있기” 때문이다.

강희맹은 재주가 있더라도 반드시 물리쳐야 할 인재로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끊임없이 재물을 긁어들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들었다. ‘재물을 탐하면 사회정의를 해치고, 여색을 좋아하면 예의를 해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리쳐야 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어질지 못하고 예의가 없으며 정의감이 없는’ 자다. 이러한 자들은 ‘민심을 순박하게 하는 데 독충’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마땅히 물리치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 운명을 맡길 만한’ 뛰어난 인재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인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교화의 대상에 포함된다. 강희맹에 따르면 정치야말로 가장 큰 교육의 장인데 긍정적 의미로 본다면 그것은 성인(聖人)의 교화를 통해 사람들 마음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마음(同然之心)’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비유하자면 ‘성인은 교화를 물레와 화로로 삼아 한 시대의 인재를 빚어내고 단련시키는’ 것인데, 뛰어난 대장장이가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어 내듯 성인은 다양한 인재를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불기운의 정도, 즉 교화의 정도인데 ‘불기운이 약하면 물체가 녹지 않듯, 성인의 심기가 미약하면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사참모 통해 인재 등용

인재를 구해 쓰는 세번째 도는 각 부문에 어질고 믿을 만한 인재를 배치하되 그들에게 인재의 추천과 평가를 위촉하는 것이다.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재의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가려내기 힘들다”는 전하의 말씀처럼, 임금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추천받는다. 그들 중에는 진짜 인재도 있고, 인재인 척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최고지도자가 일일이 그들의 재능과 식견을 알아볼 시간도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대사헌 오승(吳陞) 등이 주상께 인사담당자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하라고 건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즉, 1431년(세종 13년)에 오승 등이 올린 상언(上言)에 나타난 것처럼 “전하께서는 (재위 초반부에) 사람을 쓸 즈음 반드시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조사 의논하게 하고, 몸소 관안을 상고해 그 내력을 살핀 후에야 제수(除授)하고는” 하셨다.(13/11/05)

그런데 이처럼 ‘사람을 쓰는 법이 상세하고도 극진’하다 보니 전하께 일이 쏠리게 되었고 과로로 병을 앓기까지 하셨다. 자칫 진시황제(秦始皇)처럼 ‘저울과 추로 서류를 헤아리던[衡石程書]’ 어리석음을 범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인물을 전형하여 자리에 배치하는(銓注) 날에는 (상께서) 정전에 나오셔서 이조와 병조의 당상관을 불러 몸소 어짐과 어질지 못한 것과 그 내력을 물어 보시고 이를 서용”한다면 “인사행정이 더욱 밝아지고 바르게 될 것”이라는 오승 등의 말은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를 비판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장령 이사임(李思任)은 “태조께서는 사람을 쓸 때 모두 몸소 골라 썼고, 이 때문에 관직에 그 적임자를 얻었으니” 전하께서도 “관리를 몸소 골라 쓰는 법”을 계속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상께서는 “그 뜻은 비록 좋지만 사세(事勢)로 보아 능히 시행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여러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임금 혼자 능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당 관리의 “장점과 단점을 창졸간에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책임자(有司)의 정선(精選)을 기다려 내가 다시 살펴 제수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이 논의는 결국 “사람을 쓰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신의 생각에도 또한 몸소 골라 쓰는 것이 매우 편리할 것”이라는 안숭선 등 다수의 주장에 밀려 ‘담당자가 선별한 후 국왕이 제수하는’ 방식은 채택되지 못했다.(13/11/05) 그러나 이후의 인사행정은 대체로 오승 등의 제안대로 시행되었다. 내가 주어진 위치에서 여러 인재를 천거하고 또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도록 많은 제안을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방식에 힘입은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참으로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초기의 불운한 관운을 뒤집고 태종 임금의 지신사로서 신임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태종의 뜻과 달리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반대하다 4년 동안이나 남원으로 귀양간 것은 또 한번의 반전이었다.

다행히 태종께서는 서거하시기 3개월 전 나를 불러 주상께 중용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태종의 이 같은 ‘당부’에도 처음에는 나를 믿지 않으셨던 듯하다. 하기는 당신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반대한 나를 쉽사리 ‘중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1423년에 있었던 강원도 지역의 대흉년은 나에게는 기회였다. 당시 관동지역의 기근은 어찌나 심했던지 태종 임금 때부터 신임을 받던 강원감사 이명덕조차 어떻게 손쓸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하기는 인구의 27%(2,567호/9,509호)가 유리(流離)해 없어졌고, 약 58%(3만4,430결/6만1,790결)의 토지가 황폐화했으니(06/03/28) 묘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상께서는 이명덕 대신 나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아 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셨다. 나는 먼저 사창의 곡식을 풀어 기민(飢民)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도내 관청의 창고들은 텅 비다시피한 상태였다.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 가을에 거두어들여야 하는데, 중간에 아전의 농간과 수령의 묵인 속에서 창고의 곡식은 없고 허위 장부만 매년 새로 작성돼 온 것이었다.

내가 허위 회계기록을 한 도내 수령들의 처벌을 요청한 것은 이들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 지역 아전들의 또 다른 농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세종은 한 고조를 능가한 성군”

나는 강원지방의 기근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전하께서 이후 나를 신임하고 ‘중용’하시게 된 것은 물론이다. 나는 1427년 나의 사위 서달(徐達)의 살인옥사에 연루돼, 그리고 1430년 태석균(太石鈞) 옥사사건에 개입했다 파면되기도 했지만, 상께서는 1426년 우의정에 발탁하신 후 1449년 영의정부사로 치사(致謝)할 때까지 근 20여 년을 나로 하여금 정승자리를 지키게 하셨다.

사람들은 나를 한 고조의 재상 소하(蕭何)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나라의 예제와 법제를 마련한 소하와 나를 비교하는 것은 내게 과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종 임금을 한 고조에 비유하는 것은 실상 한 고조에게 과분한 것이라 생각된다.

세종 임금은 ‘국가를 안정시켜 비옴과 개임이 적기에 하였고, 유(儒)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겨 인재를 양육했으며, 예악을 제작해 후손에게 잘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니 우리나라의 정치가 여기서 융성’하였고, ‘우리나라 만년의 운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혔기’(이이, 율곡전서, 동호문답)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종께서는 나를 포함한 여러 신하들의 단점을 아시고도 “공적으로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다”면서 시종 보호해 주셨다. 바로 당신의 그러한 보호와 격려 때문에 나는 추문과 허물을 극복하고 ‘청백리’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급기야 죽어서 당신의 묘지에 배향되기까지 하였다. 실로 내 인생의 최대 반전은 “간악한 소인(小人)”(조말생의 평)에서 ‘청백리 황희’로 거듭난 것이었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종 임금이 계셨다.

박현모_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aks.ac.kr)

* 월간중앙 [2005년 02월호] 2005.01.21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