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연재] <세종실록>으로 거슬러 오르다② /아버지 태종이 본 세종
“무인 태조, 방원의 문과급제에 울었고 태종, 책벌레 충녕의 文才를 아꼈다” |
포용과 통합 통한 세종의 强小國 꿈
세종은 과연 성군이었는가?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포용과 통합의 정치’를 시도한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장인을 사사(賜死)하고 왕비 가문의 몰락을 외면했다. 패륜적 이율배반을 통해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권일까? 국가일까? 세종은 또 강대국 명(明)과의 동맹외교를 추구한 사대주의자인 동시에 무(武)에 무지한 군주였다. 아버지 태종의 눈으로 읽는 세종의 통치술. 충녕(忠寧: 세종)은 달랐다. 우선 학문의 수준에서 충녕은 최고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경서(經書)는 물론이고 역사책과 외교 문서에 이르기까지 궁궐 안에 있는 책 중에서 충녕이 읽지 않은 것은 없었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 庚午). 내가 노성한 신하들과 시구 잇기(聯句) 시합을 할 때 어려운 경전의 구절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충녕이었다(<태종실록> 16년 7월18일 丁未, <세종실록> 원년 8월18일 乙未). 이 때문에 근 20년간 대제학을 지내며 국내외 중요한 문장을 도맡았던 변계량(卞季良)조차 충녕의 학문적 성장에 대해 ‘칭찬하고 탄미’하고는 했다(<태종실록> 16년 9월7일 乙未). 사실 녀석은 지독한 책벌레였다. 온 대궐이 꽁꽁 얼어붙은 듯한 추운 밤에도 충녕은 밤을 새워 책을 읽고는 했다. 내가 병이 날까 걱정해 저녁에는 책을 읽지 못하도록 금하기도 했으나, 녀석은 막무가내였다(<태종실록> 18년 6월3일 壬午). 밥을 먹을 때도 좌우에 책을 펴 놓는(<세종실록> 5년 12월23일 庚午) 녀석이 염려스러웠으나,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아버지(이성계)께서 ‘집안을 일으켜 국가를 만들었으나’(<태조실록> 9년 4월13일 乙卯)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가문을 무가(武家)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고려 우왕 9년(1383) 열일곱 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을 때 아버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셨고’, 정3품의 제학(提學)이 되던 날에는 ‘기쁨이 대단하여 사람을 시켜 임명장(官敎)을 두세 번이나 읽게’ 하셨다. 이후 아버지는 연회(宴會)를 할 때면 나를 불러 손님들과 시구 잇기를 시키셨다. 손님들이 떠난 후 아버지는 “내가 손님과 더불어 즐거웠는데, 너의 힘이 컸다”며 칭찬하시고는 했다(<연려실기술>, 이긍익, 태종조 고사본말, 187). 나는 아버지의 눈물과 기쁨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덧씌워진 무인(武人)의 이미지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의 디딤돌이던 활과 칼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유학이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아버지가 무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돌이켜볼 때, 특히 국왕의 조건이자 권위의 근거로 성리학적 지식의 유무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해볼 때 나의 문과 급제와 관료 진출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녕(讓寧)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1402년(태종 2년)에 성균관의 동북쪽 모퉁이에 원자(元子)를 위한 학궁(學宮)을 새로 지어 공부할 여건을 마련해 주고(<태종실록> 2년 5월6일 戊子) 이듬해 봄에는 성균관에 입학시켜 유교의 예(禮)와 정신을 가르치려 했지만 양녕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함흥 출신 무인’이라는 태조에 대한 선입견 아! 성균관이 어떤 곳인가? <주례>의 다섯 가지 학교 중 하나(南學)의 명칭을 따 세운 성균관은 이 나라 최고의 교육기관 아니던가. 특히 성균(成均), 즉 음악의 가락을 맞추듯 사람의 과불급(過不及)을 조정해 인재를 고르게 양성한다는 건학 이념만큼이나 고상한 성균관은 명실공히 벼슬길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정치 엘리트들의 사교 클럽이기도 했다. ‘함흥의 무인 출신’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힘들어하던 아버지에게 ‘대사악(大司樂)이 음과 악으로 성균지법(成均之法)을 전수’한다는 성균관은 열등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창(槍)은 언제나 그렇듯 싸움에 이기고도 항상 그 영광의 자리를 문(文)에 내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성균관에 입학해 ‘학생복을 입고 문묘(文廟)에 참배해 술잔(爵)을 올리게’(<태종실록> 3년 4월8일 甲寅) 했건만, 양녕은 좀처럼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리(文理)를 터득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행동거지조차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꾸짖기도 많이 했고 “내 나이 거의 40이 되어 귀밑털이 희뜩희뜩하지만, 조석(朝夕)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글을 읽고 있는데, 그 뜻을 네가 아느냐”(<태종실록> 3년 9월22일 丁酉)고 타이르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녀석의 관심은 다른 데 가 있었다. 언제나 매(鷹)나 개, 술과 여자와 잡기에 빠져 있었다. 가끔 충녕과 비교하여 “너는 왜 동생만도 못하냐”(<태종실록> 16년 7월18일 丁未)며 분발을 유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녀석은 오히려 “참으로 현명한 아우입니다”(<태종실록> 13년 12월30일 乙亥)라고 하거나 “충녕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라며(<태종실록> 14년 10월26일 丙申) 교묘히 빠져나가고는 했다. 오죽했으면 내가 시독관(侍讀官) 김과(金科)에게 “저 아이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니 슬프다! 언제나 이치를 깨달을 것인가”(<태종실록> 3년 9월22일 丁酉)라며 탄식했겠는가. 충녕 있는 곳에는 활기와 의욕 넘쳐
문제는 이 험난한 정치의 세계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아버지나 내 경우와 달리 양녕은 선택의 여지 없이 그 길을 걸어야만 했다는 점이다. 사실 ‘정치의 집’인 궁궐은 아이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자연 속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에게 인위적으로 구획된 정치공간은 답답한 것이었고,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거운 ‘권력의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만 한다는 것 역시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부부관계를 포함해 모든 친인척 관계까지 정치적으로 규정되는 이 궁궐 안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둘째아들인 효령이 불교에 심취하고, 충녕이 편집증적으로 책에 몰두하며, 양녕이 주색잡기에 빠진 것은 일종의 정신분열을 피하려는 본능적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세자에서 폐위되기 직전 양녕이 “백성의 집에서 살고 싶다(欲處百姓之家)”(<태종실록> 18년 5월23일 壬申)고 절규한 것도 아마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을 게다. 충녕은 그런 양녕과 달리 유교 경전과 예법에 밝았다. 고려 왕조와 구별되는 유교적 국가 전례를 통해 창업기 조선의 면모를 잘 천양(闡揚)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책벌레’ 충녕의 적절한 역할은 돋보이고는 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에 큰일이 생겼을 때마다’ ‘의외로 뛰어난 소견’을 제시해 주위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고는 했다(<세종실록 총서>). 태조를 닮았는지 충녕은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타고난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태조는 말수가 적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 계시고는 했기 때문에 보통 때는 범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그분은 ‘온통 한덩어리의 화기(和氣)로 변화’되고는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연려실기술>, 이긍익,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 28). 아버지는 또한 인재를 아꼈다. 1376년(우왕 2년)에 최영이 시중(侍中)의 직책에 있으면서 ‘권간(權奸)들을 주륙(誅戮)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아버지는 이때 유능한 여러 사람을 구명해 냈다(<태종실록> 9년 4월13일 乙卯). 아버지는 정치의 세계가 선과 악으로 나뉠 수 없으며, 선과 악이 혼재한다고 보았다. 즉, ‘권간 속에도 충신이 있으며’ 지금 충신으로 보이는 자도 언제 역신(逆臣)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버지 태조의 생각이었다. 충녕 역시 이러한 태조의 모습을 보며 자라서인지 말수가 적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경연이나 연회 자리에 충녕을 참석시키고는 했는데, 그 자리에는 뭔가 알 수 없는 활기와 의욕이 넘쳐흐르고는 했다. 충녕이 많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가끔 대화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토론의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仁의 정치 베풀겠다는 세종의 변 농담을 던져 대화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를 내어 논의를 사사롭게 만들려는 자들을 견제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그는 늘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것이 분위기를 진지하게 만들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를 ‘활발발(活潑潑)’하게 자극하고는 했다. 세자를 교체하기 이전에 벌써 여망(輿望)은 충녕에게 가 있었다. “임금의 자식으로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는 남재의 말도 이러한 여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자칫 심각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이 말을 듣고 나는 “허허, 과감하구나. 이 늙은이!”라고 웃고 말았다. 오히려 나와 중전은 양녕을 불러 충녕이야말로 ‘국가의 대사를 함께 의논할’ 사람이라고 타일렀다. 충녕은 형제간에도 돈독한 우애를 보여주었다. 1418년(태종 18년) 넷째 성녕(誠寧)대군이 사경을 헤맬 때 충녕은 제 아우 곁에서 밤낮으로 의서(醫書)를 연구해 가면서 친히 약을 달여 먹여 중전과 나를 감복하게 했다(<태종실록> 18년 2월4일 乙酉). 무엇보다 충녕은 양녕과 사이가 좋았다. 충녕과 양녕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아마 그것은 둘 다 예능에 정통하다는 점일 게다. 내가 처음에 충녕에게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편안히 즐기기나 하여라”라며 서화·화석·가야금·거문고 등을 두루 갖추어 준 적이 있다. 학문에 출중하면서도 장자가 아닌 관계로 왕위에 오를 기회를 갖지 못하는 충녕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였다. 다행히 충녕은 악기도 열심히 배워 제법 수준에 올라 양녕에게 거문고와 비파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태종실록> 13년 12월30일 乙亥). 두 형제가 ‘화목하게’ 악기를 배우고 가르치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흐뭇했다. 이러한 충녕의 친화력 때문인지, 양녕은 충녕과 비교되어 자신이 폄하될 때조차 “충녕의 어짊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대사를 장차 함께 의논하겠습니다”(<태종실록> 16년 1월9일 壬寅)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충녕은 음주와 가무도 제법 하는 듯했다. 내가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 충녕은 분위기에 맞춰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었으며(<태종실록> 17년 4월15일 辛未), 사신이 왔을 때도 풍부한 식견과 격조 있는 화제로 시종 대화를 이끌어갔다. 이 때문에 조정의 신료나 외국의 사신들은 충녕과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까다로운 명나라의 사신 황엄(黃儼)조차 충녕을 보면 ‘매양 똑똑하고 밝은 것을 칭찬’하면서 “영명(英明)하기가 뛰어나 부왕(父王)을 닮았다. 동국(東國)의 전위(傳位)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새로운 세자(충녕)를 봉(封)하도록 청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간 우리 사신을 만났을 때 황엄은 “필시 충녕을 봉하도록 청하는 것이리라”(<태종실록> 18년 6월3일 壬午)라고 말하기도 했다. 충녕의 정치관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나는 그의 즉위교서를 들고 싶다. 국왕의 ‘취임사’인 이 교서에서 그는 “인(仁)을 베풀어 정치를 펴겠다(施仁發政)”(<세종실록> 원년 8월? 戊子)고 했다. 맹자가 양혜왕에게 한 이 말을 약간 변형시킨 이 교서를 통해 그는 자신의 시대에 펼쳐나갈 정치의 방향을 예고했다. 국왕이 “훌륭한 정치를 펴고 인(仁)을 베풀어(發政施仁) 천하에 벼슬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조정에서 벼슬하려고 하게 하며, 농사짓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들에서 경작하려고 하게 하며, 장사꾼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시장에 물건을 쌓아놓으려 하게 하며, 여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길에 나아가려 하게”(<맹자> 양혜왕상 7) 해야 한다는 맹자의 말이 그것이다. 훌륭한 정치를 펴고 인을 베풀면, 천하의 각양각층의 사람이 모두 모여 협력하게 된다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통해 세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포용과 통합의 정치’였을 것이다. 아직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이나,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당하고 소외된 세력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통합의 정치를 세종은 희망하였던 것 같다. 길재나 민무구 형제를 정치적으로 복권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은 그 한 예다. 선왕들의 강대국 동맹 노선 계승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맹자와 달리 ‘인을 베푸는 것(施仁)’을 ‘정치를 펴는 것’(發政)의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나와 세종의 정치관의 중요한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는 ‘정치적 설거지 작업’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국왕의 권위를 정립(發政)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에 비해 세종은 몸소 신민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며, 그들의 역할을 살리는 방식으로(施仁) 정치를 발양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고려의 그림 위에 조선 왕조의 무늬를 색칠하려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성균지법을 통해 과불급을 조정하는 조선의 대사악이야말로 세종이 지향했던 역할 아니었을까? 충녕은 또한 다스림의 요체(治體)를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볼 때 국왕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이었다. 신라나 고려 왕조의 경우를 보더라도 중원 대륙의 패권국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국가의 안위는 달라졌다. 특히 이제 막 중원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명나라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일과, 명나라가 수립하려는 사대 질서 안에서 조선의 위치를 설정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민(武愍) 최영 장군과 비교해볼 때 아버지 태조가 고려 왕실이나 백성들로부터 받는 신망이 다소 낮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흉포한 왜구들조차 “조선에서 정말 두려운 사람은 오직 백발의 최만호(崔萬戶-최영)뿐”(<고려사> 권113, 최영열전)이라고 할 정도로 최 장군의 무위(武威)는 대단했다. 그런데 그런 최영도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렴했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데는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자신의 언행이 정치세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는 둔감했다. 최 장군의 이 같은 ‘정치적 순진함’은 이인임(李仁任)과 같은 권신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좋은 주군을 만났더라면 그는 아마 국가를 재조(再造)해 내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왕과 같은 혼군(昏君)을 만났으며, 침몰해 가는 고려라는 배를 붙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최영은 빼어난 장수였지만 훌륭한 정치가는 못 되었다. 그와 달리 나의 아버지 이성계는 뛰어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고려 말처럼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최고 지휘관은 군인이자 동시에 정치가여야 했다. 특히 중원 대륙의 변화를 면밀히 파악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했다. 아버지는 북쪽의 변경 지역을 오랫동안 지키면서 주원장(朱元璋·1328~98) 세력의 성장을 유심히 보아왔다. 주원장이 1368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고 정했을 때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나라와 수교하도록 건의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나름대로 파악한 정보에 힘입은 것이었다. <즉위교서>의 제1항에서 조선이 천자의 나라가 아닌 제후국임을 천명하고, 명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를 수용한 것도(<태조실록> 1년 7월20일 丁未) 이러한 국가정책의 표명이었다. 그 때문인지 명 태조 주원장은 1392년 부왕 태조께서 국가를 세우셨을 때, 우리 조선을 ‘정벌 제외 해당 국가(不征之國)’의 첫번째 대상에 올려놓았다. 즉, “사방의 여러 오랑캐(諸夷)는 모두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떨어져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부릴 수 없다. …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한때의 전공(戰功)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할까 두렵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 이제 정벌하지 않아야 할 나라의 이름을 다음에 열거한다: 동북쪽- 조선국 ….”(<皇明祖訓> 잠계장) 明 주원장, 조선을 정벌 제외국 1호에 올려 주원장이 이처럼 대외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조선을 정벌 제외 해당 국가 제1호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제국 초기에 과도한 침략전쟁으로 국력을 쇠퇴시킨 원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생각을 들 수 있다. 명나라를 자급자족적인 한족(漢族) 중심의 농업국가로 정착시키겠다는 ‘고립주의적’ 정책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대장 이성계가 친원(親元)의 왕조를 뒤엎고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어 명조의 가장 친밀한 이웃이 되었다”(<주원장전>, 吳日含, 지식산업사, 2003, p.226)는 지적처럼, 아버지의 대명 사대외교 정책을 그 주된 이유로 꼽고 싶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1388년) 직후 내가 집정대신(執政大臣) 이색(李穡)을 따라 남경에 갔을 때, 명은 이미 요동을 모두 정벌하여 남북을 통일한 상태였다. 그때 만나본 주원장의 첫 인상은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어찌 보면 도적의 모습이었고, 또 달리 보면 호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키가 컸고 얼굴은 괴상하고 밉살스럽게 생겼는데, 눈에서는 불꽃이 이는 듯해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다행히 주원장이 아버지의 반원친명 의지를 확인하고 ‘가상(嘉賞)히 여겨’ 우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태종실록> 9년 4월13일 乙卯). 충녕은 태조와 내가 추구해온 강대국 동맹 노선, 즉 부상하는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계승했다. 충녕은 나중에 양성지의 ‘자주국방론’과 ‘실력양성론’을 반대한 것에서 드러났듯 사대외교론자였다. 즉, 명에 대한 사대 외교를 통해 안보를 확보하되 김종서의 주장을 받아들여 행성(行城)을 쌓아 북쪽의 오랑캐들을 방비하게 하는 국방정책을 계승했다(<세종실록> 32년 1월15일 辛卯).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외정책은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명나라의 북변(北邊) 보호와 후원에 힘입어 세종의 재위 초반의 중대한 국가적 사업인 왜구의 평정(대마도 정벌)과 민산(民産)의 증진 및 민심의 안정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명 태조 주원장을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진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주원장은 “친아들을 입조(入朝)시킬 것”을 요구했다. 2년 전(1392년) 총애하던 황태자가 사망한 충격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많이 노쇠해 있었다. 이미 67세에 이른 노황제는 ‘고급 노예’와 같은 최고 권력자의 고단한 모습과, 권력의 피 냄새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재위 말년인 1395년 5월 “짐이 거병(擧兵)한 이후 오늘까지 4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천하의 서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선과 악 혹은 진짜와 가짜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며 자신의 고단한 일생을 술회했다. 그는 아울러 이 같은 친정(親政)의 통치방식이 창업의 시기였기 때문에 불가피했지만 “수성(守成)하는 군주가 사용할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장차 “내 뒤를 잇는 군주는 율(律)과 대고(大誥)에 의해 천하를 통리(統理)해야”(<명태조실록>, 권239) 한다는 조언을 후손들에게 남겼다. 역사에서 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폭력 인정
그리고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역모를 꾸미는 자들은 대체로 심한 박해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크든 작든 국왕의 호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국왕의 호의를 입은 공신이나 외척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권력의 완성’을 위해 국왕의 권좌까지 빼앗으려고 했다. 따라서 주원장이 승상 호유용(胡惟庸) 사건이나 공신 남옥(藍玉) 사건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역모 당사자는 물론이고 관련자들까지 근절시킬 필요가 있었다(주원장은 이 두 사건에서 4만 명을 처단했다). 같은 차원에서 주원장은 외척의 정치 간여를 차단했다. 그는 1370년 3월 <여계(女誡)>를 만들어 후비(后妃)의 정사 참여를 금지했다. 황후는 오직 궁중의 빈부(嬪婦)의 일만 관할하고 궁문 밖의 일에는 일절 간여할 수 없었다. 궁인은 바깥과 연락할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주원장 스스로 자신의 외가(外家)와 처족(妻族)의 후손들을 제거했으며, 후대의 자손은 반드시 민가에서 후비를 간택하도록 했다(<명사> 권108, 외척은택후표서, 권113, 후비열전서). 주원장은 이처럼 명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그리고 황제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제거하고 차단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가 40여 년간 재위하면서 능지(凌遲:먼저 사지를 절단한 다음 조금씩 몸에 칼질을 하여 긴 시간 고통을 주며 죽임)·효시(梟示:목을 베어 장대에 매달아 사람들에게 전시함)·종주(種誅:家와 族을 연좌하여 죽임)에 처한 것이 수천 건이고, 기시(棄市:죄인의 목을 베어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림) 이하의 처벌만 해도 1만 건이 넘었다고 한다(<주원장전> 吳日含, 369). 사람들은 이런 주원장을 잔인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세운 국가의 의미는 각별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그동안 홍군(紅軍)과 원군(元軍)의 전투 속에서 말 그대로 도탄(塗炭)에 빠져 있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었으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고려 말 국가가 없는 가운데 겪어야만 했던 - 당시 고려에는 ‘정권’만 있었고 ‘국가’는 없었다 - 극심한 대내외적 혼돈과 무질서의 폭력성은 내게 ‘국가’의 의미를 분명히 깨우쳐 주었다. 이러한 혼돈을 극복할 대안이 국가질서의 확립이라면, 설사 거기에 압제적인 방식이 동반된다고 할지라도 수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까스로 세운 국가의 질서를 다시 허물어뜨리고 ‘만인과 만인이 싸우는 투쟁 상태’로 돌이키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불길 속으로 뛰어든 나방의 운명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은가. 문제는 국가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바로잡는 일에서 폭력의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선택은 폭력이냐 비폭력이냐가 아니라, 폭력 중에서 그 자체가 지양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폭력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했다.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치가 특히 국왕의 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왕의 권위를 위한 폭력 선택은 불가피” 충녕은 나의 이런 정치관과 정치적 폭력에 대한 생각을 정확히 이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중전이나 양녕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공신들조차 내가 외척과 공신을 제거할 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고 보았다. 내 앞에서 말하지는 않아도 모두 나를 권력에 굶주린 짐승으로 보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충녕만은 내가 발견한 ‘국가’의 의미를 이해하는 듯했다. 내가 이복동생(방석)과 처남들을 제거하고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만든 공신들을 제거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충녕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직후 ‘강상인의 옥사’에서 비로소 그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내 측근인 강상인과 영부사 심온을 ‘불나방들’을 견제하기 위해 ‘버리는 카드’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그의 태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자기의 장인인 심온이 “국가의 명령은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 혐의로 사사되고(<세종실록> 원년 12월23일 戊戌) ‘왕비의 가문을 적몰’할 것인지를 의논하는(<세종실록> 원년 12월4일 己卯) 자리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와중에서 그는 거의 매일 내가 거처하는 ‘수강궁에 문안’하고 ‘경연에’ 나가거나 ‘성균관에 거둥’하는 등 일상적인 일을 수행했다. 만약 그가 심온의 처형을 반대하거나 왕비 가문을 보호하려고 했다면 사태는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그에게 옥새를 넘겨주었고, 익선관을 머리에 씌워 주었다. 내가 비록 “군사에 관한 일은 친히 처결하겠다”(세종실록 총서)고 선언했지만, 이미 국왕의 자리에 오른 그가 “국가의 명령은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과연 사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다행히 세종은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었다.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해 주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가 ‘염려’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연회에 참석하여 ‘2경(오후 9시~11시)까지’ 신하들과 춤을 추어 주었다(<세종실록> 원년 12월24일 己亥). 바로 이 점이야말로 양녕이나 효령이 아닌 세종을 믿고 왕위를 물려준 진정한 이유였다. 세종의 최대 약점은 武에 대한 무지 그렇다고 세종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국왕 후보자였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무(武)에 관한 충녕의 취약점은 매우 염려스러웠다. 일찍이 양녕도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不猛)”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록 용맹하지 못하나, 대사(大事)에 임하여 큰 의문(大疑)을 해결하는 능력 면에서는 당세에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태종실록> 16년 2월9일 壬申)고 대답했지만, 사실 양녕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었다. ‘무인의 가문’인 우리 집 자손 중에서 충녕만큼 사냥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일부러 사냥터에 데리고 다니면서 활을 쏘게도 하였지만, 워낙 몸집이 비중(肥重)했던(<세종실록> 원년 10월9일 乙酉) 충녕에게 사냥은 버거운 것이었다. 국방 문제에 대한 충녕의 무지 역시 심각한 것이었다. 충녕은 경전과 역사 그리고 예법에는 박식했고,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 문제에 관한 한 내가 보기에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예컨대 세종은 왜구의 약탈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바다에서의 전투를 포기하고 육전만 준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병조참의 박안신(朴安臣)이 지적한 것처럼 ‘삼면(三面)이 바다이고 왜도(倭島)와 심히 가까이에’ 있는 우리나라에서(<세종실록> 12년 4월14일 癸未) 해전을 포기한다면 해안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은 물론 국가 안보상으로도 심각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었다. 내가 “군사에 관한 일은 친히 처결하겠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상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군주가 문무를 겸전하지 못할 경우 정권의 안정 역시 보장할 수 없다. 국왕의 말이 아무리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다고 해도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추진력을 잃을 수 있다. 예부터 ‘무장하지 않은 예언가’들이 단명하고 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세종에게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장수를 두는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누구를 충녕 곁에 둘 것인가? 정치적 야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용맹스러운 장수, 즉 고려조의 최영과 같은 무인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세종은 자신의 이러한 약점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세종이 나와 함께 대마도 정벌을 감행하면서 터득한 무략(武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 |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aks.ac.kr) | [2004년 11월호] 2004.10.27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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