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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51. 서상빈 - 외세 압력 물밀듯… 개항 혼란기 조선의 경

by 아름다운비행 2006. 10. 14.

[인천인물100人·51] '상권수호' 서상빈

외세 압력 물밀듯… 개항 혼란기 조선의 경제주권을 외치다

윤문영 기자 / 발행일 2006-07-27 제14면

 

▲ 인천항 전경

 

>51< '상권수호' 서상빈(徐相彬 : 1859-1928)

 

지난 24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은 서해 제일의 무역함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형 화물선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인천항이 세계 각지의 수·출입 화물선이 대형 항구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됐다. 과거 이곳은 인근 주민들이 낚시를 하는 어촌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어촌마을이 지금과 같이 항구로 변모된 과정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금은 우리 경제를 이끄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과거 이곳은 외세에 의해 강제로 항구를 열 수밖에 없었던 아픔의 현장이었다.

인천항 인근에 남아있는 일본식, 중국식의 주택과 과거 일본제일은행 건물 등 개항기 건축물에서는 당시 외세의 압박과 그에 대응했던 한국인들의 아우성이 묻어난다.

인천항이 개항된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23년전인 1883년.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조규가 체결된 후 일본은 인천에 대한 개항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인천이 수도에서 가까운 해안의 요충지인 점을 들어 거부했지만 결국 인천 개항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항된 이상, 외국 상인들의 치외법권지대가 된 인천항은 각국의 영사의 영향력이 미치며 외부 세력에게만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상인들이 살아남기에는 상인 개개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기업들의 경영상 어려움을 해소하고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대한상공회의소가 존재하듯, 그 시절의 상인들도 외세의 힘에 맞설 조직 구성이 시급했다.

자연히 상인들의 힘을 모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이것을 주도한 역량있는 인물이 바로 서상빈이다.

서상빈은 1897년 조직화되지않은 객주들의 모임(인천 객주회)을 모체로 인천신상협회(紳商協會)를 조직했다.

그는 일제의 강요로 개항된 무역시장에서 우리 상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쓴 인물이지만 오히려 인천의 역사는 그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위대한 인천인물'을 인천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서상빈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후손을 찾아봤지만 이조차 쉽지 않았다.

서상빈의 4대손인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측을 통해 서상빈에 대한 자료 여부를 물었지만, 동일방직 측에서는 “회장의 증조부이고 너무 오래 전 분이라 회장님과 회사 내부에 그에 대한 사진이나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인천시나 인천상공회의소 등의 기관이 적극 나서 `잃어버린 서상빈'을 찾아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조우성 인천향토사 연구가는 “서상빈에 대해서는 신상협회와 인천 최초의 사학인 제녕학교의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일면에 대한 기록만 있다”며 “그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없어, 그의 태생과 죽음 등 삶의 전반에 대해 알기에는 미흡하다”고 밝혔다.

다만 `대한상공회의소 100년사’에서 상공회의소의 모체가 된 신상협회의 설립에 대한 기록과 `인천석금’에서 그가 제녕학교를 세운 과정의 일부분에서 그에 대한 일면을 그려낼 수 있다.

서상빈은 학식을 가진 양반인 진신(벼슬아치)으로, 성균관 진사에 올랐다. 상인이 아니었던 그가 상인단체인 신상협회를 설립한 독특한 이력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신상협회 창립문에는 `서양조합을 본뜨고 회사를 조직하니 진신과 민상이 합하여 상업의 규모를 일신하고 상권을 주장하게 되어 외국인에게 사기당하지 않고 그들의 매점에 이익을 갈취당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외세에 맞서기 위해 학식을 갖춘 지식인의 역할이 필요했고 서상빈이 그것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상빈은 부산항에 있는 일본 제일은행에서 불법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본 재정고문의 화폐개혁으로 생긴 국내의 금융공황에 대한 건의를 하는 등 일본 상인들이 국내 경제를 침탈하는 것에 대응했다.

따라서 서상빈이 상인단체를 이끈 것은 단지 상인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애국적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상빈의 인생에선 인천 최초로 사립학교(제녕학교)를 설립한 대목을 빼놓을 수 없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제녕학교 설립 과정이 언급돼 있다. 서상빈은 인천이 국제 무역항이자 서울의 관문이란 것을 알고 인천에서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치는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칠 학교가 없는 것을 고민하던 중, 러일전쟁 초기 침몰한 러시아 군함을 인양해 큰 돈을 번 김정곤씨의 협조를 얻어 초가 30여평의 건물에 학교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는 주간에는 일반 보통학교 수업을 하고 야간에는 영어 수업을 진행했다. 인천외국어학교 출신인 인천세관 관리 30여명이 교대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일본이 득세하면서 제녕학교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1907년 6월 1일 창영초등학교 전신인 인천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됐다.

서상빈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최초로 육영사업을 실천했고, 온몸으로 혼란기 경제판을 이끈 선구자였다.

김윤식 한국 문인협회 인천시지회장은 “서상빈은 성균관 진사로 점잖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인천사람이면서도 개항 후 부내면장을 지낸 것이 전부일 정도로 처세술에 밝기보다는 침착하고 심중한 진신의 자세를 갖췄다”고 말했다

윤문영  moono7@hanmail.net / 2006. 7. 27

출처: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9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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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100人·51] 서상빈의 후손들은

代이어 한국·지역경제 기여

윤문영 기자 / 발행일 2006-07-27 제14면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1930년대 전경.

서상빈의 후손들은 인천 경제계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서상빈의 아들인 서병훈은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이사로 활약하며 일본인 기업주들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그는 대표적인 항일민족 단체인 신간회 인천지회의 간사를 맡는 등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병훈의 아들 서정익은 일본 나고야공업학교 방직학과를 나온 뒤 동양방적 인천공장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로 취직을 했다. 광복후 일본이 남겨두고 간 이 공장(적산공장)을 동일방직으로 재발족시켜 사주로 취임하는 등 사세를 확장해 갔다.

인천에 있던 수많은 적산공장 중 현재까지 운영해 발전시킨 것은 동일방직 뿐으로, 서정익씨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3년 전국경제인협회 이사로 취임했고 1970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상무이사로 선임돼 한국 경제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했다.

또한 그의 아들 서민석은 현재 동일방직 회장으로,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지난 3월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국내 경제계의 큰 역할을 맡고 있다.

동일방직에 얽힌 노동문제를 차치하고, 개항 이후 인천에서 활약하던 사업가들 모두가 당대로 그친 반면 서씨 일가는 대를 이어 인천 경제에 기여한 바는 주목할 만하다.

윤문영 moono7@hanmail.net / 2006년 07월 27일 (목)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9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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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100人·51] 인천신상협회는

객주조합~상업회의소 중간단계 국채보상운동등 애국활동도 힘써

윤문영 기자 / 발행일 2006-07-27 제14면 

 

▲신상협회 상상도

인천신상협회는 189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객주단체에서 발전했으며 서상집과 박명규, 서상빈 등의 객주상인이 주도했다.

1885년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된 객주조합이 때로는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생기자 정부는 이를 관장하고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1895년(고종 32) '상무회의소규례'를 제정·공포하였다.

신상협회는 이름이 변경되어 1889년에 신상회사로, 1911년에는 다시 신상협회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에 준거해 인천객주상회가 모체가 되어 만들어진 이 협회의 목적은 상인에 대한 계몽과 국가 재원을 부유하게 하는데 있었다.

정부를 대신해서 영업세를 객주들로부터 연 2회 대신 징수하는 특권을 가졌고, 외국상인으로부터 회원의 상권을 옹호하는 등 민족계 상인의 상업자세 혁신을 촉구했다.

우리 상인들이 외국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는 한편, 협회의 기업가들은 의연금 모집 등에 동참해 국채보상운동과 학교설립 비용으로 사용하는 등 애국 활동에도 힘썼다.

인천신상협회는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하며 폭력적 상거래를 한 일본인 계림장업단의 비행을 규탄하고 정부에 그 단체의 해산을 강력히 건의해 결국 계림장업단을 해체시켰다.

역사적으로는 객주조합에서 근대적 상업회의소로 발전해 나가는 과도적 상인단체였다. 1905년 인천신상회사는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로 전환되었다.

윤문영 moono7@hanmail.net / 2006년 07월 27일 (목)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9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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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인천학연구원의 자료에 나타나는 인천항신상회사와 제녕학교에 대한 글.

(http://www.isi.or.kr/data/b_study/2003is_06.pdf)

 

 

* 구한말 인천의 국채보상운동 때의 仁川港紳商會社 의연

 

인천광역시 지역 국채보상운동은 인천항신상회사와 관계가 깊다. 인천항신상회사는 이곳 상인들을 비롯하여 유지들이 참여하여 상권의 보호뿐만 아니라 이 곳의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인천은 일찍이 여러 나라의 외국상인들이 진출하여 각기 그들의 상권을 확장해갔다. 이곳에서는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의 경합이 가장 심하였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은 상업회의소를 조직하여 점차 열세를 만회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은 일본의 정치적 세력과 경제적 우세를 배경으로 횡포가 심하였다. 이에 인천의 민족상인들은 1885년 일본상인들의 횡포를 막고 외국상인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인천객주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후 객주회는 인천항신상협회의 모체가 되었다. 인천항신상협회는 또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의 핵심체로 발전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직한 인천항상법회의소에 대항하면서 민족상인들의 상권신장에 노력해 왔다.

 

인천항신상협회는 인천항의 객주 徐相潗등이 주동이 되어 관리들과 민간 상인들이 모여 설립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객주들이었으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들도 가입하였다. 1895년 정부에서 상무회의소규례를 제정 공포함에 따라 인천항신상협회는 이 규례에 따라 새로운 상인 단체로 허가를 얻어 인천항신상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인천항신상협회의 창립 목적은 상인들을 계몽하고 상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상업 방식에 따라 상업자세를 혁신할 것을 창립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국기를 1,500매를 만들어 각 동에 나누어 주고 경축일에는 국기를 집집마다 게양할 것을 회칙에 규정하였다. 이는 애국심을 불러 일키는 대단한 활동이었다. 더 나아서 회원들은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비리비행이 없도록 하며, 회원은 서로 친족과 같이 친목을 도모하며, 회원 사이에 분규가 있을 때에는 신상협회에서 거중 조정하여 분란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회원 상호간에 상부상조하도록 하였다.


인천광역시 지역에서는 일찍이 회원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인천항신상회사가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런 까닭에 국채보상운동의 발기는 대구였지만, 의연은 인천에서 먼저 전개하였다.51) 仁川港紳商會社에서는 斷煙同盟會를 조직하고 각기 이름 밑에 ‘盟’자를 써서 서명하였는데 여기에 가담한 사람은 박원순∙김도선∙김윤성∙김종일∙강윤모∙정재홍∙장내흥 등이었다. 이 회사에 5인의 사환이 있었는데 평일에는 비록 사원과 사환의 구별이 있으나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데는 차별이 없다고 하여, 사환들이 지원하면 사원과 같은 일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사환들이 모두 입회하여 회원이 12인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인천항에 거주하는 유지들이 많이 입회하여 의연금을 납입하였다.52) 이는 서울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구였던 國債報償期成會가 성립되기 전이며 또한 황성신문사에 두었던 國債報償中央義務社 구성보다 먼저였다.

 

 

* 구한말 인천의 국채보상운동 때의 인천제녕학교(仁川濟寧學校) 의연

 

인천에도 몇 개의 공립학교와 종교계와 민간인에 의해서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 설립으로는 1899년에 다령면 독정리에서 유지들이 학계를 조직하여 기본금을 모아 교사 9간을 건축하고 개교하였다. 당시 교과목으로는 독서, 작문, 습자, 산수, 지지, 역사 등이었다.

인천박문소학교는 1900년 중구 답동에서 개교하였는데,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을 모집하여 초급학문을 전수하는 한편 전도에 힘쓰던 속칭 ‘천주학방’이 발전한 것이다.

 

인천제령학교는 1903년 6월에 인천항신상회사 사장 서상빈이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종교계통의 학교도 아니고 관공립 학교도 아닌 순수한 민간인이 설립한 것이다. 서상빈은 인천이 일본을 비롯하여 많은 제국주의 세력이 진출하여 침략을 획책하고 있으므로 인천의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절실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야간과 주간이 있었다. 야간은 인천외국어학교 출신으로 인천해관에서 근무하는 方判들이 교대로 영어를 지도하였다. 주간에서는 주로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특히 이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은 교육열이 대단했으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이런 까닭에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인천항신상회사 의연에 이어 仁川濟寧學校에서 서병두 등이 중심이 되어 90여명이 의연을 하였다.

 

* 紳商會社 신상 회사

  • 1897년 조선 상인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천에 설립한 객주 단체. 조선 상인을 계몽하여 단결하게 하고, 정부 대신 객주의 영업세를 징수하여 국가 재원을 마련하였다. (출처: DAUM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