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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49. 수주 변영로 - 강낭콩꽃보다 더 푸르게… 양귀비꽃보다 더 붉게… 애국충절을 읊다

by 아름다운비행 2006. 10. 14.

▲ 국제펜클럽한국본부장 시절의 변영로(맨 앞). 바로 뒤가 초대 외무부장관을 지낸 둘째 형 변영태이다.

    뒤쪽으로 모윤숙과 김광섭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제공/변호달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까 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생시에 못 뵈올 님을 中)

지난 26일 오전 11시 제 1경인 고속도로 신원 IC를 빠져나와 서울 양천구 신월동을 5분쯤 가로 질렀을까 '경기도 부천'이란 표지판과 함께 '수주로(樹州路)'가 눈에 띄었다. '수주(樹州)'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나무 고을', 현재 부평(富平)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주삼거리에서 좌로 꺾어 밀양 변(卞)씨 집성촌이 있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본동으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였다. 주택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변씨 문중 선영(先塋).

조상이 대대로 500여년 살아 온 동네 이름을 아호로 삼은 시인 변영로(1897~1961)는 이곳 수주의 선영 한 쪽에 잠들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교과서에서 한번 쯤은 읽어봤을 시 '논개'로 널리 알려진 수주(樹州) 변영로 (卞榮魯).

부평이 인천에 속하기에 엄연한 인천의 인물이지만 행정구역상 부천으로 갈리며 그의 시 한 구절처럼 그립던 '그대'는 가까울 듯 멀어져 버렸다.
늦었지만 인천문화재단은 곧 변영로를 '인천대표인물'로 정해 집중조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난해 첫번째 인천대표인물로 우현 고유섭을, 올해는 두번째로 검여 유희강을 조명하고 있다. 내년도 인물로 확정된다면 변영로는 세번째 인천대표인물이 되는 것이다.

변영로는 서울 맹현(孟峴:현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수주에 있는 집은 삼화감리를 지낸 부친 변정상(卞鼎相)의 향제(鄕第:벼슬아치의 고향집)였다. 변영로는 서울 재동 보통학교와 계동 보통학교를 거친 뒤 사립 중앙학교를 다니다 자퇴했다.
18세 되던 해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친 뒤 자신이 자퇴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 '천재시인'이란 찬사를 받았다. '3·1 운동'이 벌어진 22세 때엔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를 영역해 해외로 발송, 우리 겨레의 울분과 독립의 의미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변영로의 활동무대 역시 당대의 문인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서울이었다. 그가 남긴 시나 수필 등에서도 고향에 대한 애정이나 그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1989년 '번영로 전집'을 펴낸 연세대 국문과 김영민 교수는 “책을 쓴 지 오래돼 정확하진 않지만 시 중에선 고향에 대한 게 없었고, 수필 중 1편에서 '부평'에 대한 얘기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영로의 호인 '수주'에 대한 애정은 그의 큰형 변영만(1889~1954)의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변영만은 조선 말기 유명한 한학자로 '산강재문초(山康齋文鈔)' 등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영어까지 통달한 당대의 석학이었다. 지난 15일 출판된 '변영만(卞榮晩) 전집' 중엔 '여러 자식(별호) 중 또 특별히 사랑하는 자식이 있듯이 나는 항상 수주를 애용했지만 (동생 변영로가) 양도해 달라는 말에 오륙분 동안 주저하다 결연히 수주를 동생에게 내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상들의 동네 이름을 호로 쓰고 싶어 형을 졸랐다는 일화를 통해 변영로의 고향사랑과 형제들의 수주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변영로가 한창 시인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형식을 정립해가던 시기였다. 당시의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변영로 역시 최고 수준의 작품을 많이 쏟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기개높은 민족정신이 깊이 새겨진 그의 유일한 시집 '조선의 마음'(1924) 등이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세월의 물결을 따라 후세에 그의 작품세계를 전하고 있으며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은 무류실태기(無類失態記)로서 너무나 유명하다.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는 “변영로의 시는 서정시 초창기의 기법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며 “작품을 떠나서라도 그가 썼던 아호 수주가 나타내는 부평 사랑은 탁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창훈  chkim@kyeongin.com / 2006. 6. 29

 

* 출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532

   http://www.jegonet.com/cgi-run/technote/read.cgi?board=incheon_news&nnew=2&y_number=518

 

 

[■인터뷰/ 변영로의 종손 호달씨] "지인많고 특이하셨던 분 조상얼 서린곳 지켜갈 것"

 

“수주 할아버지는 주위에 문인들이 끊이지 않았던 분입니다.”
조선 한학자 변영만과 1950년대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지낸 변영태, 그리고 시인 변영로 등 자신의 길에서 최고에 오른 3형제는 '부평삼변'이라 불린다. 이 중 변영태는 아들 3명이 모두 일찍 죽었고, 변영로의 5형제 중에선 2명이 생존해 있지만 한명은 미국에 사는 등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부평삼변의 향제터에 살고 있는 변영만의 맏손자 변호달(61)씨를 통해 조금이나마 변영로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수주 할아버지는 굉장히 특이한 분이셨다”며 “워낙 주위에 지인들이 많아서인지 사실 우리 같은 어린애들은 잘 상대도 해주지 않으셨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변호달씨는 “세분 중 영태 할아버지가 가장 가정적이었고, 두분은 그렇지 않았다”며 “우리 할아버지와 수주 할아버지는 집에서 죽이 끓는 지 밥이 끓는 지도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술에 얽힌 인생을 소탈하게 써내려간 변영로의 수필 '명정(酩酊) 40년'의 내용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변영로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게 그의 어린시절 기억이다. 그는 “워낙 술을 많이 드셨던 분이라 술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암에 걸려 외국에서 수술을 받은 뒤 얼마있다 돌아가셨다”고 변영로의 사인에 대해 설명했다.

향학열이 굉장히 뜨거웠던 가문이 자랑스럽다는 변호달씨. 그는 “대대로 여기서만 살아서인 지 이사는 꿈도 꾸지 못한다”며 “조상들의 얼이 서려있는 이곳을 계속 지키며 살겠다”고 말했다.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534  

 

 

수주는 現부평 "인천인" - 문중선영·집 관할 "부천인"

 

'부평삼변' 변영만·영태·영로 3형제 소속논란

'인천의 대표인물이냐, 부천을 빛낸 인물이냐'.
부평삼변(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3형제)의 고향이자 그들이 묻혀있는 고강본동은 행정구역상 부천시 오정구에 속한다. 반면 이 형제들이 애착을 가졌던 수주는 부평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인천에 부평이 포함된 걸 감안할 때 이들의 수주는 결국 현재의 인천이라는 논리도 묵직한 설득력을 얻는다. 머지않아 인천과 부천 이 두 지자체들간 변영로를 서로 끌어가기 위한 논쟁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해부터 인천대표 인물을 조명하고 있는 인천문화재단은 비공식적이지만 곧 부평삼변을 다음 인물로 정해 조명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지난 16일 그동안 변영로에 가려있었던 변영만의 전집 발행을 기념한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인천문화재단 이현식 사무처장은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는 한강 이남까지를 관할했던 도호부로 인천도호부보다도 규모가 더 컸다”며 “부평삼변도 현재의 행정구역을 떠나 부평문화권의 인물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에서도 변영로를 비롯한 부평삼변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천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변영로를 '부천을 빛낸 인물'로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청사 1층 로비와 홈페이지에 변영로의 사진 등을 내걸었을 뿐 아니라 향제터와 선영에도 이미 기념비들을 세워놨다. 또 몇년 전 고강본동 비포장 도로를 확장하며 도로 이름을 '수주로'라고 붙이기도 했다. 변영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시작한 '수주문학상'은 올해로 벌써 8회째를 맞았다. 반면 변영만과 변영태 등 부평삼변 중 2명에 대한 조명은 변영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부천시 관계자는 “부평삼변을 어느 지역의 인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며 “변씨 문중 선영과 땅, 집들이 모두 부천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41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