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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54. 나길모(윌리엄 존 맥나흐튼) 주교

by 아름다운비행 2006. 10. 14.

[인천인물100人·54] 천주교 나길모 주교

'국내최장' 40여년 반평생 교구장 재임 항도천주교 대들보 '벽안의 목자'

정진오 기자 / 발행일 2006-08-17 제14면 

 

▲ 나길모 주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생활에 만족해 했다. 천주교 신도들도 그가 인천교구를 떠나는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나 주교는 늘 미사를 마친 뒤 신도들의 손을 어루만져 주면서 한 식구처럼 지내곤 했다.

 '격동 한세기, 인천 인물 100인' 시리즈가 반환점을 넘어서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인천 천주교의 대들보와 같은 분이 있으신데, 그 분을 빼놓아선 안된다”는 문의를 많이 받았다. 한국전쟁 직후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와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첫 인천교구장을 맡은 뒤로 젊음을 통째로 바치며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한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천 인물'에 포함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와 함께 하다 몇 해 전 고향 미국으로 돌아간 나길모(80·세례명·굴리엘모) 주교.

 

인터넷 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나길모주교'를 치니 어떤 네티즌의 블로그에 그의 모습이 소개돼 있다. 사적 제287호로 지정된 인천답동성당을 배경으로 한 나 주교의 사진을 이 네티즌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놓고, 이렇게 적었다. `오래전 기사인 것 같은데,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돌아간 신부님이다. 선한 얼굴이 좋아서 받아두었던 사진….' 나 주교가 인천교구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인 2002년 4월에 경인일보가 취재해 보도했던 바로 그 사진이다.

기자와 나 주교와의 첫 인연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6월 6일로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은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의 인터뷰때다. 책상 서랍 깊숙이 박혀 있던 당시 취재수첩을 꺼냈다. 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위엄있으면서도 무척이나 온화한 모습의 나 주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54년 우리나라에 건너와 충북 청주교구에서 7년을 보내고, 1961년 현충일인 6월 6일에 첫 인천교구장을 맡았다는 말로 인터뷰는 시작됐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인천의 공해가 너무 심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시민의 건강이 걱정된다면서 말이다. “인천항에 처음 들어오면서 바다에서 본 인천의 첫 이미지는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는데, 요즘 유람선을 타고 인천 하늘을 바라보면 희뿌연 오염층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인천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장 큰 변화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인천 하늘을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 주교의 바람이 10년 안에 현실로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인천, 경기, 서울 등 수도권 3개 시·도의 최근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대기환경을 좋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시의 경우 2014년까지 서울 남산에서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대기를 깨끗이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인천의 여러 분야 문제에 대해 `인천 토박이'보다도 더 걱정했던 이 벽안(碧眼)의 `인천 사람'은 우리의 옛 공동체 문화를 그렇게도 그리워했다.

“(전쟁 직후엔)굉장히 가난했어요. 다리란 다리는 폭격으로 모두 끊겨 지프를 타고 개울을 건너야 했어요. 당시엔 천주교에서 주는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입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공동체 의식이 유난스러웠다는 거예요.”

한 번은 가정집에 불이 났는데, 동네 사람이 모두 나와 우물에서부터 죽 늘어서 물동이를 건네면서 불을 끄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현대의 폐쇄적인 아파트 문화를 아쉬워 한 그는 그러면서도 지금의 한국 풍습이 아름답다고 했다.

2001년 인터뷰 당시 그는 두 가지 큰 기쁨이 있다고 귀띔했었다. 최기산 주교(현 교구장)가 부교구장이 돼 자신의 자리를 잇게 됐다는 것이 첫 번째였고, 인천가톨릭대학을 짓고 있다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그만큼 그는 한국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미국 본명이 윌리엄 존 맥나흐튼인 그는 아일랜드계로 캐나다에 이주한 천주교 집안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미국 메사추세츠주 로렌스시. 그는 고등학교때 어머니의 권유로 읽은 소설 `천국의 열쇠'에 감명받아 53년 매리놀 신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한 뒤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 매리놀 신학교 총장 주교의 명에 따라 충북 청주교구의 장호원 감곡성당에서 보좌신부로 낯선 이국땅에서의 사제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61년 인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면서부터 인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교구의 첫 교구장이 된 것이다. 34살 젊은 나이로 교구장에 임명돼 무려 41년 넘게 교구장으로 일했다. 한국 천주교 사상 가장 긴 교구장 재임기록도 세우게 됐다. 처음 9개의 본당, 공소(본당보다 규모가 작은 예배소) 59개로 시작했던 인천교구는 현재 그 규모가 10배 이상이나 성장했다. 여기엔 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지난 2000년 그의 소원이었던 인천가톨릭대학이 설립돼 교구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나 주교는 1964년엔 부친이 돌아가셨는데도 임종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인천에 많은 열정을 쏟아왔다.

이런 탓에 1965년 6월 인천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노동자들에게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로 인천시민에게 기억되고 있다. 1968년 일어났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다 당국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국의 오해를 받은 데는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선배들 탓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 주교는 1941년께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배들에게서 신학이며, 한국의 상황 등 전반적인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 계속되는 형사들의 감시, 그리고 극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군사정권의 탄압. 그렇지만 양심을 지키려는 신부의 신념을 꺾진 못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 정부가 왜 이렇게 쓸데 없이 혈세를 낭비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2002년 5월 최기산 주교에게 교구장 자리를 넘겨주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늙은 187㎝의 몸과 사제양복 3벌, 책 50여권, 부모님이 선물했다는 성작(미사 때 쓰는 잔)·십자가가 고작이었다. 물론 인천에 대한 드넓은 사랑은 별도로 맘에 담았을 것이다.

나 주교의 근황도 들을 겸 인천교구를 통해 미국 현지와의 전화연결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족 중에 몸이 많이 아픈 사람이 있어 인터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혹시 그의 건강이 좋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다.

 

■인천지역 천주교 역사

▲ 천주교 인천교구의 초대 교구장 나길모 주교가 자신이 생활해 온 답동성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인천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46년 지금의 부천에 해당하는 소사지역(옛 심락천)에서다.
 이후 1889년 5월 1일 제물포성당(현 답동주교좌 성당)이 창설돼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일하면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황청은 1958년 6월 6일 인천지역을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고 운영권을 매리놀전교회에 일임, 초대 감목으로 기본스 신부를 임명했다. 또 인천과 부천, 38선 이남의 황해도 지역에 딸린 도서지방 등을 관할하도록 정했다.
 3년후인 1961년 교황청은 인천감목대리구를 인천대목구로 승격시키고, 나길모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나주교는 그해 8월 24일 미국 로렌스시 성마리아 대성당에서 쿠슁 추기경주례로 주교에 서품된다.

 지난 해 말 기준 인천교구의 규모는 인천광역시, 경기도 부천시, 김포시, 시흥시(일부), 안산시(일부) 등 1개 광역시, 3개 시를 관할하고 102개 본당, 37개 공소에 신자 수는 약 37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인천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답동성당이다. 답동성당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벽돌조 고딕식 건물로 건축면적은 약 1천15㎡이다. 1890년대에 건축된, 한국 성당 중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고 한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이 8각의 종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된 부분은 모두 복원되었고,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이 성당은 그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개항장 제물포 시대부터 인천지역의 대표적 건축물로 평가받아 왔다.

정진오  schild@kyeongin.com / 2006. 8. 17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97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