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52] 문둥병 시인 '한하운'
천형을 넘어 파랑새가 되었네
이창열 기자 / 발행일 2006-08-03 제14면
지난 7월 30일 오후 인천 부평구 십정동. 경인국철 백운역에서 동암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야트막한 소규모 공장들이 낮은 포복으로 누워있었다.
그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한 고층 아파트 노인정에서는 여남은 노인들이 10원짜리 화투를 치며 여름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지난 날 이곳에 나환자촌이 있었냐는 물음에 노인들은 화투짝 잡은 손을 무심히 들어 저 아래 공장지대를 가리킨다.
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어느새 폭염의 기세가 무서웠다. 그 폭염속에 `문둥병'이라는 천형(天刑)을 온 육신으로 앓다가 생을 마감한 한 시인의 인고의 삶이 어른거린다.
문둥병 시인' 한하운(1919~1975). 그의 56세 삶의 절반은 절망, 고독과의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로서 전도 유망했던 그는 난데없이 `하늘이 내린 형벌'을 받았다. 어려움 없이 커 온 그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문둥병 환자로의 한하운 인생은 인천 부평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부평구 십정동 일대에서 나환자 자활사업에 헌신하면서 시 쓰기에도 나섰다. 시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때 쓴 시 `보리피리'와 `파랑새'는 현재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려 널리 읽히고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리.//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리리.//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보리피리'전문)
한하운 시인이 1945년 해방 이후 월남해 정착했던 현재의 부평구 십정동은 물론 인근의 청천동과 남동구 간석동 일대는 그가 생을 마감하기까지 시인으로서, 또 나환자 구제에 전력했던 사회사업가로서의 체취가 남아있는 공간이다.
그의 본명은 태영(泰永)으로 기미년(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하운은 자서전 `슬픈 반생기'에서 “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피면 대대로 선비의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안이며 함흥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다. 나는 이러한 부유한 환경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네살 때부터 양복을 입고 어린것들 중에서 으스대며 자랐다”고 술회할 정도로 그의 어린시절은 유복했다.
그의 부모는 장남의 공부를 위해 함흥으로 이사했고, 그는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13세로 한창 크던 해의 봄. 그는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때 `까닭도 모르게 몸이 무겁고 얼굴이 붓기 시작하는 것을 감각'했고, 17세에 가서야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인 경성대부속병원에서 나병확정 진단을 받게 된다.
한하운은 당시 상황을 `슬픈 반생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기다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히 나를 방에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고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이후 금강산 요양과 치료로 병세는 호전되었고, 일본 동경의 성계고등학교를 거쳐 북경대학 농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25세 때인 1944년 고향인 함경남도청 축산과 공무원을 시작으로 사회에 발을 디뎠다. 그 해 가을에는 경기도 용인군청으로 전근했다.
1945년에는 나병이 다시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으며 이때 부모가 몹쓸 병마에 시달리는 장남이 안쓰러워 `태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운'을 쓰게했다고 한다.
그가 인천에 정착한 것은 재산을 북한 정권에 몰수당하면서다. 1950년 3월 당시 경기도 부평 소재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으로 이주해 자치회장에 선임됐다. 그는 부친과 함께 월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듬해에는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 577의 4일대에 나환자 자녀들의 복지시설인 `신명보육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다. 당시는 허울만 좋은 `복지시설'이었지, 사실은 나환자인 부모와 나병에 걸리지 않은 자녀들을 격리해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인천지역에는 지금의 부평구 십정동과 청천동, 남동구 간석동 등에 대표적인 나환자 치료시설과 격리시설이 설치됐다. 이곳에서 살게 된 나환자들은 국고 구호품외에도 국유지를 불하받아 황무지를 개간해 양돈과 양계농장을 만들어냈다.
부평농장, 청천농장, 십정농장이 당시 나환자들이 개간해 일군 농장이었다. 이 중 십정농장은 지난 1998년 신동아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당시 거주했던 나환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부평농장(130여명)과 청천농장(60여명)은 농장자치회를 만들었고 아직도 70~80대 노인 나환자들이 생존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들 농장은 현재 축사를 개조해 소규모 영세 제조업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한하운의 축산분야 전공지식은 농장을 구획하고 운영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원도상(84) 전 신명보육원장은 “당시 한 선생은 보사부와 갈등을 빚어 보사부가 1년치 식량을 주지 않아 곤란을 겪어도 부모들이 생활하는 성계원에서 조달하면서 여러 달 동안 맞설 만큼 강직했다”며 “체구가 우람하고 당당했다”고 기억했다.
한하운에 대한 연구작업은 아직도 여러 모로 부족하다. 연구자에 따라 태어난 해도 달리하고, 결혼여부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의 묘비와 당시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한하운은 결혼했던 게 확실해 보인다. 그는 1950년대 초 성계원에 거주하고 있던 유임수(兪壬守)라는 여인과 결혼해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김포공원묘지에 있는 한하운 묘비엔 `유임수'란 이름을 미망인으로 적고 있다. 이 여인은 경미한 나환자였다고 하며, 그는 한하운이 죽자 부천으로 이사했고, 김포 묘지를 매일 찾아 애도할 정도로 부부의 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출생연도를 `1920년생'으로 밝히는 경우가 많으나 그의 묘비엔 `1919년생'으로 나와있다.
신명보육원 하성도 원장은 “하 선생의 부인 유씨도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보육시설에서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내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 선생에 대한 여러 유품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아는데 부인이 사망해 자료수집이 난감하다”고 말했다. 중앙대학교 이승하(문창과) 교수는 “한하운은 나병의 한(恨)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이것으로 사회와 소통하려 했던 예술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며 “그의 고통, 절망, 슬픔, 영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평 일대에 하운의 체취를 복원하는 체계적인 연구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전라도 길'이란 시는 문둥병 환자의 고통과 참담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중략)…//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한하운, `전라도 길')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29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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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100人·52] 인터뷰/ 원도상 前 신명보육원장
"한센인에 차가운 시선 지금도 여전 '아쉬움'"
이창열 기자 / 발행일 2006-08-03 제14면
“당시 보사부는 성계원에 거주하는 나환자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금지했고 아이가 있으면 부모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 수용했습니다. 성계원과 신명보육원 사이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 아이가 보고 싶은 부모와 부모가 그리운 아이들이 저녁이면 산을 돌아 넘어 몰래 만나곤 했을 정도였어요. 그럴 때면 한 선생이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원도상(84) 전 신명보육원장은 한하운 시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다. 1952년 5월 한하운 시인이 현재의 부평구 십정동 자리에 나환자 자녀들의 양육을 위한 성계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에 취임했을 때 원씨는 총무를 맡았다.
그는 또 1975년 2월 28일 한 원장이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 했을 때 시신을 손수 염하고 김포공원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는 궂은 일을 도맡으며 30년을 넘게 한하운 시인의 손과 발 노릇을 했단다.
그는 “한 선생이 시를 쓰고 나환자 구제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친 것도 결국 지난 날 나환자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차가운 시선에서 비롯됐다”며 “한센인들에 대한 냉대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동암초등학교가 개교한 1965년대 무렵 이 학교 학부모와 교직원들은 근처 부평농장, 십정농장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을 꺼려 농장 근처에 분교를 개교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어렵게 입학한 학교에서도 학교 선생님과 같은 반 아이들의 멸시와 천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원씨는 “최근에 한 선생을 기리는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얘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나환자 가족들은 오히려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며 “부모가 나환자였음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리는 그들의 한맺힌 마음도 함께 헤아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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