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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피난 일기 발견

by 아름다운비행 2006. 7. 1.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피난 일기 발견

 

 

 

지난 1882 년 임오군란 당시 궁궐을 탈출해 피신했던 명성황후의 51 일 간의 행적을 기록한 피난 일기가 발견됐습니다.

 

대전시 향토사료관은 지난 5월 초 대전의 한 집안에서 기증한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임오군란 때 충북 충주 등지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행적이 담긴 '임오 유월 일기'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일기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궁궐을 빠져나온 직후인 1882 년 6 월 13 일부터 환궁을 하던 8 월 1 일까지의 피신 과정에서 명성황후가 만난 인물과 식사 내용, 몸 상태,이동 경로 등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지역] 홍정표 기자/KBS

입력시간 : 2006.06.30 (15:46) / 수정시간 : 2006.06.30 (15:49)

 

*출처: http://news.kbs.co.kr/article/local/200606/20060630/1178791.html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겠네요.

명성황후의 친필이겠지요. 그리고 파란을 다닌 경로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고.

급히 다녔다는 말도 나오고, 황급하게 움직인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을 제거하려고 궁에 난입한 구식군대를 피하기 위해 궁녀의 복장으로 변장하고서 궁을 빠져나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없는 실력에 위의 명성황후님 피란일기를 감히 아는 글자만이라도 읽어보면..

 

   (6월) 15일 맑고 더움. 대체로 맑음(平明).   빨리가서 이천읍에 닿아 <店舍中火> 여주 단강

                 (丹江) 권삼대 집에서 묵다. ○前오위장(계급명인 듯) 민영기가 오다.


           16일 맑고 더움. 밤에 약간 비.  어우동위(계급명인 듯) 한점대 집으로 이동. 

                 <忠候一樣>  어감길탕 2첩, 부하탕화룡뇌<를 드셨다는 뜻인듯...>  <함어含御>

           17일 맑고 더웁다가 비 많이 와서 <因爲>.  <駐御: 어가에서 머무르셨다는 뜻인지..??>

                 <함어含御> <玉○>다리가 붓고 이곳저곳에 고름이 생기다. 고약을 붙임.

                                               ... 중략 ... 

 

위 해석한 글에서 "< >" 표기는 내가 잘 모르는 글자들이고,

내 실력에 계속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아는 글자만 계속 읽어보면,


 

         18일엔 종일 비가왔고 목이 부어 약을 드셨고 충주 노은에 도착하셨다.
         19일엔 충주 梅山에 닿아 오봉학 집에서 머무르셨고
         20일엔 날씨가 비오다 흐리다 했고 허우충 집에서 머무르심.
         21일엔 맑고 더웠으며 빨리 가셨음. 어은(지명인 듯)의 幼學(계급인 듯) 이시○의 댁에서

                   머무셨다

 

고 기록이 되어 있네요.

 

 

 

** 임오군란(壬午軍亂)

 

1982년 6월, 당시 대한제국의 구식군대가 일으킨 군사적 사건(軍變).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정권 주도권을 쥐기 위한 세력 다툼으로 결국 일본과는 제물포조약체결을 하게되는 등 일본과 청나라의 우리나라에 대한 간섭권을 확대시키게 된 구한말의 군란.

 

국제적으로는 외세의 개입을 증폭시키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으로 이어지게된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이지요. 한반도를 외국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만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이지요.

 

이 임오군란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6.25사변이 남침이냐 북침이냐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듯이, 임오군란은 우리 국내사정만으로는 해석이 안되고, 그 당시의 세계정세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사건입니다.

(이 글에는 맞지 않고, 제 사견입니다만, 브루스 커밍스로 대변되는 남한의 연백침공에 이은 '북침'주장은 인정되지 못할 주장들이지요.) 

 

강화도조약 이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나라 문을 걸어잠그고 개방을 안하는 정책)이 퇴조하면서 민황후를 주축으로 하는 개화파가 득세를 하고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이 날로 심해지면서 국민들을 돌보지 않아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사회불안이 고조되던 시기에 일어난 커다란 사회적인 사건이었고, 우리나라의 국운을 더 빨리 기울어지게 했던 사건중의 하나지요.

 

신식군대 도입에 따라 구식군대는 힘을 잃은데다가 신식군대보다 월급도 적고 그마저 13개월씩이나 밀리고 그러던 중 겨우 한 달치를 준다는 것이 당시 민황후의 친척인 민겸호의 하인이 밀린 월급의 지급을 담당하는 데 반은 쌀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지급하면서도 언동이 오만불손하자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구식군대이 사람들이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대원군이 민황후를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고자 사람들을 사주하여 무기고 탈취, 일본공사관 습격 등 군란을 일으켰다가 청나라가 개입되면서 대원군이 청나라에 잡혀가고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는 청나라대로 우리나라에 대한 개입을 심화시키고 각종 경제적인 이권을 많이 내주게 된 사건이 임오군란이지요.

 

임오군란에 대해 좀더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연결하십시오.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94-imogunra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