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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성황후 51일간의 행적, 임오군란 '피란일기' 첫 발견

by 아름다운비행 2006. 7. 23.

* Ohmynews의; 블로그 "독도사라"중 '명성황후'에서 옮겨옴.

  http://blog.ohmynews.com/cari/entry/명성황후-50일-간의-피란일기-발견

 

'명성황후 51일 행적 밝혀졌다'… 임오군란 '피난일기' 첫 발견
친인척·병세 등 그날그날 동정만 기록 …근대사 재조명 기대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을 피해 떠난 51일간의 '피난 일기'가 발견됐다. 29일 대전시향토사료관은 임오군란 때 충북 충주 등지으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행적이 담긴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이하 임오일기)'를 발견했다며 일부를 공개했다.

사상 처음으로 발견·공개된 임오일기는 명성황후가 피신 중 만난 인물 등이 자세히 적혀 있어 베일에 쌓여 있던 임오군란시 명성황후의 행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군사적 요청을 하는 등 피난 중에도 정국 반전을 위한 정치적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학설을 뒤집을 만한 정황적 근거도 기록돼 있어 이번에 발견된 임오일기는 잃어버린 근대사를 재조명할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명성황후의 임오군란시 피난 행적은 왕명출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나 일성록(日省錄) 등에 기록돼 있는데, 명성황후가 충주 민응식(閔應植·1844∼?)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임오일기는 대전시향토사료관이 지난 5월 초 대전 모 집안으로부터 기탁 받은 191건 279점의 유물에 포함된 것으로 향토사료관 측이 2개월 가까이 연구한 끝에 전말을 밝힌 것이다.

분량은 8페이지이며, 크기는 가로 14.7㎝, 세로 20㎝로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유물을 기탁한 집안은 민응식 선생의 인척으로 기탁 유물에는 민응식 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백수문'과 민씨 일가가 쓴 '인현성모행록'이나 '혜경궁읍혈록' 등이 있으며, 민응식은 피난 중이던 명성황후를 호종(扈從)한 인물로 황후와는 친척관계다.

또 임오일기를 쓴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명성황후가 궁궐을 빠져나온 직후인 1882년 6월 13일부터 기록한 점이나 민씨 일가의 이름만 한지로 가렸던 점, 피난 중 명성황후가 다리 부스럼 증을 앓았고 그 처방전이 기록된 점 등으로 미뤄 명성황후를 직접 시종한, 민씨 일가 중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명성황후가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환궁할 때 민응식 집안에 보관했던 것을 민응식의 자손이 대전으로 오면서 각종 서적과 함께 가져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임오일기에는 1882년 6월 13일부터 8월 1일 환궁하기까지 51일간 명성황후가 피난 중 만난 인물 뿐만 아니라 몸 상태나 먹은 음식, 숙소 등 일거수 일투족이 날짜별로 적혀 있다.

이 중에는 청군이 조선에 들어왔을 당시 명성황후가 청군이 붙인 방문을 베껴오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임오일기는 대전시향토사료관에 보관돼 있으며, 향토사료관은 보존처리 후 추가 연구를 거쳐 전문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윤 환 대전시향토사료관 학예연구사는 임오일기에 대해 "임오군란 시의 명성황후 동정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으로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이후의 민씨 척족의 정국 동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피난하기 바빠 정치활동 안한 듯

'잃어버린 근대사의 한 조각을 찾았다.'

대전시향토사료관에 의해 밝혀진 '임오일기'에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때 충북 충주 등지로 피신해 만난 사람이나 머물렀던 숙소 등 황후의 피난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현재까지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충주 민응식의 집으로 피했다'는 기록 이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피난 중에도 청국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다'는 학설이나 '충주에서 궁궐을 지었다'는 전설 등 무수한 '말'들을 낳았다.

하지만 이번 발견으로 명성황후의 당시 행적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물론, 추후 임오일기 및 주변 정황 등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부실한 근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어떤 내용 담겼나 = 임오일기는 1882년 6월 9일 구식군대 세력의 쿠데타인 임오군란이 발발한 이후 명성황후가 6월 13일부터 8월 1일 환궁하기까지 51일간의 행적을 그 어떤 기록보다 자세히 전하고 있다.

피난은 한양을 출발, 경기도 광주와 여주, 충주 등을 거쳤는데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환후(患候)나 구체적인 숙소, 시종 인물의 내왕 등이 기록돼 있어 임오군란 시 명성황후의 동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일기에는 명성황후가 피난 당시 심신이 피곤해서인지 목구멍병과 다리 부스럼 등의 병을 앓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명성황후의 생김새나 말, 내왕 시종과 나눈 말 등은 기록되지 않았다.

임오일기에는 또 고종과 서신을 교환했다는 것이나, 청군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붙인 방문을 시종에게 적어오라고 명했다는 기록도 담겨있다.

대전시향토사료관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명성황후는 피난기간 중 주로 민씨 척족과 그 주변인물을 만났다"면서 "일기체이기 때문에 그날그날의 주요 사건과 동정 등을 적은 것이고, 모양새나 발언 등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오일기 발견 의미 = 왕명의 출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등은 명성황후가 '몸을 피했다'는 수준으로 임오군란 시 명성황후의 행적을 기록했다.

전해지는 다른 기록도 없기 때문에 명성황후의 피난 행적은 학설과 전설뿐이었다.

일부에서는 명성황후가 충주 민응식의 집에 피신해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해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 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했다'고 쓰는 등 명성황후를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묘사할 정도다.

하지만 임오일기에서의 명성황후는 피난하기 바빴다.

또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붙인 방문을 적어오라 명 한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케 했다거나 암약했다는 설 등은 타당성이 적어 보인다.

이에 대해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일기로 봤을 때 명성황후는 한양을 예의주시 하긴 했지만 피난하는데 바빴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청국의 개입은 명성황후의 요청이라기보다 그들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당시 정황상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충주지역에서는 명성황후가 궁궐을 지으려 했다거나, 국망산에 매일 올라 한양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일기에는 궁궐이나 국망산과 관련된 기록이 없다.

이 때문에 이번 임오일기 발견은 그동안의 추측에 의한 학설이나 근거없는 전설 등을 일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임오일기는 명성황후가 피난 중 청나라에 군사적 요청을 했으리라는 일부 학설에 대해 재고를 요하는 중요한 전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임오군란 후의 정국 동향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탁받은 유물서 우연히 발견

임오일기는 우연하게 발견됐다.

대전 모 집안이 소장유물에 대한 도난 위험 때문에 대전시향토사료관에 유물 279점을 기탁했는데 그 중에 포함돼 있었던 것.

물론 향토사료관 측이나 기탁 집안이 처음부터 임오일기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은 아니고, 기탁받은 유물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던 중 발견했던 것이다.

향토사료관 측은 발견 즉시 집안 내력을 살피는 한편 한자로 쓰인 일기 해석과 함께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명성황후 논문자료 등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

퍼즐을 하나하나 짜맞추듯 자료를 검토하고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는 등 꼼꼼하게 연구하고 검토했던 것이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기록의 사실성 여부.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불과 100여 년 밖에 안된 이야기지만, 기록이 없고 이야기만 전해지기 때문에 일기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한다.

임오일기는 51일간의 행적을 8페이지 분량에 담은 것에 불과하지만 연구·검토해야 할 수많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8일 이후 본격적인 '피난 행보'가 그려진 일기의 일반 공개는 보존처리를 거쳐 연구가 모두 끝난 다음 가능하다는 게 향토사료관 측 설명이다.윤 환 학예연구사는 "확인 할 사항이 굉장히 많다"는 말로 임오일기에 담긴 '어마어마한 내용'을 내비쳤다.

 

 

임오일기 내용(6월13일~17일 5일간)
6월13일. 맑음. 2경(更) 쯤, 중궁전하께서 벽동 익찬 민응식 집에 가셨다. 옥후가 인후증세로 편찮으셨다. 박하유를 올렸다.

6월14일. 맑고 더웠다. 새벽에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과 현홍택, 계집종 1명이 중궁전하를 모시고 가 광주 취적리 임천군수 이근영 집에 이르러 점심을 자시고 조현점사 숙소에 이르렀다. 옥후가 더 불편했다가 4경이 지나 조금 평안해 지셨다.

6월15일. 맑고 더웠다. 새벽에 모시고 가 이천읍 점사에 이르러 점심을 자시고 여주 단강 권삼대 집 숙소에 이르렀다. 전 오위장 민영기가 왔다.

6월16일. 맑고 더웠다. 밤에 이슬비가 왔다. 중궁전하께옵서 이웃 한점대 집으로 옮기셨다. 환후는 그만했다. 감길탕 두 첩, 박하탕에 용뇌를 타서 올리니 자셨다.

6월17일. 맑고 더웠다. 소나기가 왔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감길탕 한 첩, 박하탕에 용뇌를 타서 올리니 드셨다. 다리 부스럼 난 곳에 고름이 생겨 고약을 붙여 드렸다.

 

충청투데이 전진식 기자 sinmunman@cctoday.co.kr /노컷뉴스 제휴사
*위 기사에 대한 모든 법적 권한 및 책임은 충청투데이에 있습니다.

 

 

명성황후 50일 간의 피란일기 발견

 

<앵커 멘트>

구한말 신식군대와의 차별대우에 반발한 구식군대 세력이 일으켰던 임오군란 때 급히 피난길에 올랐던 명성황후의 50여 일간 행적을 밝힐 수 있는 고문서가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홍정표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조선의 문호개방을 놓고 수구파와 개화파의 반목이 극에 달했던 1882년 6월.

일본식 군제 개편으로 불이익을 당한 구식군대는 이에 대한 반발로 개화의 선두에 선 명성황후를 시해할 목적으로 궁궐로 난입했습니다.

이때 급히 궁궐을 빠져나온 명성황후가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50여 일간의 행적이 기록된 일기 형식의 고문서가 발견됐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일기에는 명성황후가 궁궐을 떠나 다시 되돌아오기까지의 이동 경로와 생활상을 자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먼 친척뻘인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머문 것으로 알려진 명성황후의 행적은 6월 13일 서울 벽동 민응식의 집을 시작으로 이튿날에는 이천과 여주, 다시 엿새 뒤인 19일에는 충주에 이르게 됩니다.

피신도중 명성황후는 다리에 부스럼이 나 고약을 붙였고 박하탕을 마신 점 등 고된 피난 생활을 했던 기록도 있습니다.

피란 중 만난 인물의 실명과 당시 정황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가운데, 특히 청군의 개입을 주변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는 내용은 그동안 알려진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윤환 : "청군개입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종래의 설에 대해서는 검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최측근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사료관 측은 사료의 전문을 조만간 공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KBS뉴스 홍정표입니다.

 

 

명성황후 ‘피난일기’ 발견

 

1882년 임오군란 때 궁궐을 탈출했던 명성황후(1851∼1895)의 51일간의 피난일기가 발견됐다. 대전시향토사료관은 30일 임오군란으로 충북 충주의 민응식(1844∼?) 집으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행적이 담긴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민응식은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이 일기는 민응식 딸의 후손들이 지난 5월 초 대전시향토사료관에 기탁한 191건 279점의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다. 민응식은 당시에 명성황후의 피난살이를 호종한 인물로 이 일기는 그가 직접 썼거나 함께 다닌 민씨 일가의 한 인물이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일기는 1882년 6월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궁궐을 탈출한 명성황후가 환궁을 한 8월1일까지의 생활을 날짜별로 간단히 적었다. 가로 14.7㎝, 세로 20㎝에 8쪽 분량으로 일부는 훼손된 상태다.

일기는 피신생활을 하면서 황후가 만난 인물, 식사내용, 몸상태, 이동경로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옷차림이나 이동수단 등은 기록돼 있지 않다. 만난 이는 주로 명성황후의 민씨 친인척이다. 일기에 따르면 황후는 피난생활로 인한 피로감 탓인지 목구멍병과 다리부스럼 병을 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약재를 처방했다거나 궁으로 서신을 보냈다는 등 간략하지만 황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일기는 ‘6월13일. 맑음.2경쯤 중궁전하께서 벽동(서울 종로의 한마을) 익찬 민응식 집에 가셨다. 옥후가 인후증세로 편찮으셨다. 박하유를 올렸다.’ ‘6월17일. 맑고 더웠다. 소나기가 왔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감길탕 한 첩과 박하탕에 용뇌(한약재)를 타 올리니 드셨다. 다리 부스럼 난 곳에 고름이 생겨 고약을 붙여 드렸다.’ ‘7월16일. 청나라 군사들이 내건 방문을 경성에서 어떤 사람이 베껴 왔다.’ 등이다.

향토사료관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의 피난행적은 ‘승정원일기’ 등에 충주의 민응식 집 등에 몸을 피했다는 짧은 내용이 전부였으나 이 일기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충주에만 머물렀던 것으로 본 이전의 학설과는 달리 경기도 여주와 광주 등 7∼8곳을 돌며 고된 피난살이를 한 것으로 일기에 나타나 있다.

양 학예연구사는 “임오군란시 명성황후가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다는 학설이 있지만 그런 것은 거의 기록돼 있지 않다.”면서 “100여년 전 단절된 명성황후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으로 보존처리와 추가 연구 등을 거쳐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명성황후 ‘잃어버린 51일’ 찾았다

입력: 2006년 06월 30일 18:07:29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란일기를 30일 대전시 향토사료관이 공개했다.

 

대전시향토사료관은 임오군란 때 충북 충주 등지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행적이 담긴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이하 임오일기)’를 발견했다고 30일 밝혔다. 이 자료는 지난 5월초 향토사료관이 기증받은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학계에선 일기를 쓴 사람이 명성황후를 가까이서 모셨던 민씨 일가일 것으로만 추정할 뿐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기의 내용 중에는 명성황후가 대원군과의 세력다툼에서 승리하기 위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기존 사학계의 정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제기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임오일기는 구식 군대가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인 임오군란이 발발한 이후 명성황후가 궁궐을 빠져나온 1882년 6월13일부터 환궁한 8월1일까지의 피신생활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명성황후가 만난 인물은 물론 식사의 내용, 몸의 상태, 질병치료방법, 이동경로 등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그날 그날 벌어진 일이나 동정을 적어 놨을 뿐 명성황후의 발언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등은 담지 않고 있다.

그동안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에서 명성황후와 친척관계인 충주의 민응식(閔應植)의 집 등으로 몸을 피했다는 짧은 내용이 나와있을 뿐 명성황후의 임오군란시 피란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임오일기는 명성황후가 한양을 출발한 뒤 경기 광주와 여주, 충북 충주 등 7~8곳의 거처로 옮겨다니며 고단한 피란생활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6월14일, 15일 등의 일기를 보면 명성황후가 광주, 이천, 여주 등 여러 곳을 옮겨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동안 학계에는 피신한 명성황후가 한 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설이 나온 바 있다. 이 일기에는 또 명성황후가 궁궐로 서신을 보냈다는 내용도 담고 있어 피란생활 도중 궁궐 쪽과 연락을 취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 일기에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붙인 방문을 시종에게 적어오라고 명했다는 부분이 있어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7월16일, 청나라 군사들이 내건 방문을 경성에서 어떤 사람이 베껴왔다). 이 기록을 통해 미뤄보면 흥선대원군과 대립각을 이룬 명성황후가 피란 중 청나라에 군사적 요청을 했다는 일부 학설이 맞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명성황후가 피란생활로 인한 피로감 등으로 목구멍 병과 다리 부스럼 등 다양한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과 약제를 처방했다는 내용도 있어 피신생활이 고난의 행로였음을 짐작케 한다.

6월13일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맑음. 2경(更)쯤 중궁전하께서 벽동 익찬 민응식 집에 가셨다. 옥후가 인후증세로 편찮으셨다. 박하유를 올렸다.’

또 6월17일의 기록은 ‘맑고 더웠다. 소나기가 왔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감길탕 한 첩, 박하탕에 용뇌를 타서 올리니 드셨다. 다리 부스럼 난 곳에 고름이 생겨 고약을 붙여 드렸다.’ 명성황후가 피신 첫날부터 목병 등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성황후가 환궁한 8월1일의 일기는 ‘아침 평진탕을 한 첩 올렸다. 묘시에 움직이셔서 신원에 이르셨다. 어군막에 머무르시다 신시에 환궁하셨다’고 적고 있다.

한편 학자들은 사용된 용어 등을 통해 미뤄볼 때 명성황후를 직접 모신 민씨 일가 중 한 사람이 이 일기를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일기가 명성황후가 궁궐을 빠져나온 직후부터 환궁하기까지를 기록한 점과 피난 중 명성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적고 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다.

8쪽 분량인 임오일기는 가로 14.7㎝, 세로 20㎝ 크기로 일부가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다. 충주에서 대전으로 건너온 민응식의 인척들이 대전시향토사료관에 기탁한 191건 279점의 유물에 포함돼 있었다. 이번에 기탁된 유물 중에는 민응식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글과 민씨 일가의 글 등 다수의 사료가 포함돼 있다.

여흥 민씨인 민응식은 피난 중이던 명성황후를 호종(扈從·왕을 모시고 따르는 일)한 인물로 명성황후와는 친척관계다.

대전시향토사료관 양승률 학예연구사는 “임오군란 당시의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 중 이렇게 상세한 기록은 없다”며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물론 왕실을 중심으로 한 실제생활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매주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기의 내용으로 미뤄 명성황후는 피란하는 데 바빴던 것으로 보이며 청나라의 개입은 명성황후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일기자 yhi@kyunghyang.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