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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우리의 고대사 - 아직도 갈 길 먼 미개척지

by 아름다운비행 2006. 6. 27.

드라마 ‘주몽’ 놓고 고구려사 논란

 

2006년 6월 27일 (화) 11:08   주간조선

 

 

MBC 드라마 ‘주몽(朱蒙)’이 고구려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5월 15일 첫 방송을 시작해 방송 시작 8회 만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드라마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총 제작비 300억원, 60회 장편으로 기획된 ‘블록버스터 사극’이라는 방송국의 선전대로 매회 볼거리와 극적인 재미를 선사하며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이복 형제(부여 금와왕의 아들)에게 쫓기는 주몽이 눈이 먼 채 감옥에 갇혀 있는 친부(親父) 해모수를 만나 무술을 배우는 장면에서 월드컵 방송으로 드라마 방영이 2주일간 중단되자 “축구보다 주몽을 틀어달라”는 시청자의 빗발친 요청이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 있는 고구려 건국사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워나가고 있다. 예컨대 작가는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를 한나라에 저항하는 고조선 유민의 영웅으로 그리고 있고, 훗날 주몽의 부인이 돼 고구려 건국의 주역이 되는 소서노(召西奴)를 대상단의 우두머리인 연타발의 딸로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유화부인과 관계하여 주몽을 낳게 하는 신화 속의 인물로 묘사돼 있다. 또 소서노라는 이름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삼국사기에는 소서노가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로 간략하게 기술돼 있다. 학계에서는 연타발은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온 졸본부여의 족장 정도로 해석돼 왔다.

 

때문에 작가는 빈약한 역사 기록 속의 인물에 상상력을 가미해 극적 흥미를 높이고 있다. ‘허준’(1999년)과 ‘상도’(2001년) 등의 역사 드라마를 쓴 작가 최완규씨는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쓴 사극 모두 사료가 부족했다”며 “오히려 사료가 부족해서 상상력에 구애를 받지 않는 인물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주몽’처럼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장르를 ‘팩션(faction:fact+fiction)’이라 부른다.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한 작가의 노력 때문인지 ‘주몽’은 고구려사에 대한 일반인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고 있다. MBC 홈페이지 ‘주몽’ 코너에 마련된 ‘역사 토론방’은 고구려 건국 즈음의 고대사를 둘러싼 논전으로 후끈 달아오른 상태다. 해모수의 실체와 부여의 역사, 한나라 군대의 위력, 고구려 건국 시기와 동명성왕의 명칭 등 다양한 논전이 벌어지고 있다. 강단(講壇) 역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취급하는 ‘환단고기’ 등의 기록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놓고 네티즌의 말싸움이 식민사관 논전으로 비약하기도 한다.

 

사실(史實)고증과 관련해 드라마 ‘주몽’이 가장 집중적으로 비판 받는 대목은 한나라 군대의 실력과 관련된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군대는 앞선 철기문화를 보유한 정복자로 묘사된다. 마치 중세 유럽의 기사처럼 갑옷과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고조선을 유린한다. 부여에서도 이런 한나라의 앞선 철기 문화를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MBC 홈페이지의 ‘역사 토론방’에 뜬 ‘역사고증이냐 재미냐… 딜레마에 빠진 사극 주몽’(이문규)이라는 글은 “한나라에는 애초 철기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헌상으로 철기가 등장하는 건 3세기 고구려”라고 비판했다. 또 ‘절정 코미디극 주몽’(조성일)이라는 글도 “한나라의 철기군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부여가 한의 일개 군에게 그런 굴욕적인 일을 당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은 “역사 기록에 따르면 육군 5만, 수군 7000명을 앞세워 한나라가 고조선과 2년간 싸운 걸로 돼 있는데 고조선의 무기가 한나라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면 이처럼 전쟁을 오래 끌지 못했을 것”이라며 “고조선에도 강력한 철기문화가 있었다고 봐야 하며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내부 분열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숭실대 박물관에 보관 중인 고조선의 청동제 거울 다뉴세문경(국보 141호)을 보면 빗금 문양과 주물의 정교함, 주석과 아연의 합금 비율 등 전체적인 품질이 중국제보다 훨씬 뛰어났다”며 “이런 앞선 문화가 철기로 넘어오면서 순식간에 중국에 뒤졌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고대사를 “다양한 북방 유목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쥬신(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스스로를 부른 이름, 숙신ㆍ조선의 다른 표현)’의 역사로 확장시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대쥬신을 찾아서’(해냄)의 저자인 김운회 동양대학교 교수는 “한나라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대제국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나라 철기병과 고조선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우는 양쪽의 주장이 다 맞을 수 있다”면서 “철제무기는 고구려 건국(삼국사기에 기원전 37년으로 기록)과 이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 부여의 건국, 고조선의 멸망(기원전 108년) 등의 시기보다 훨씬 앞서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기원전 3세기)에 보급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설령 한나라에 철기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목민에게는 그렇게 강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중세 유럽의 기사단을 격파해 나간 몽골 기병을 생각하면 기동력이 강한 유목민에게 중무장 철기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유목민의 전력이 더 강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유목민들이 한나라에 굴복 당한 것은 통일적인 지배체제를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 결정적”이라며 “고조선은 반농(半農)·반목(半牧)과 중개무역을 기반으로 한 유목국가의 성격이 강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외부 침입자에게 유린당하는 정착 농업국가의 성격이 강하게 그려졌다”고 비판했다.

 

이 드라마에서 또 다른 논란의 핵(核)은 주몽의 아버지로 나오는 해모수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해모수는 중국 사서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이름이 나온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광개토왕비나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삼국유사에는 ‘하늘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온 해모수가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칭했다’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삼국사기에는 ‘유화가 말하기를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때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고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등으로 기록돼 있다.

 

네티즌이 헷갈리면서 논전을 벌이는 부분은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 그리고 부여의 역사에 관한 부분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 된다. 해부루는 아들이 없다가 금빛 개구리의 형상을 한 금와를 데려다 태자로 삼았고,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이 됐다. 그리고 드라마의 내용대로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으로 데려가면서 해모수의 아들 주몽은 금와를 의붓아버지로 삼아 자라다 이복형제에게 미움을 사고 궁에서 쫓겨나 고구려 건국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해부루와 해모수는 부자지간이 아니다. 해부루는 본래 부여의 왕이었는데 하느님의 명으로 동쪽 바닷가 가섭원이라는 땅으로 옮겨가 동부여를 세웠고, ‘부여의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했다’고 돼 있다. 더욱 헷갈리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과 해부루의 관계다. 삼국유사에는 ‘단군기에서 말하기를 단군께서는 서하 하백의 따님과 함께 하여 아이를 낳으시니 그 이름이 해부루다’라고 돼 있다. 여기서 서하 하백의 딸은 해모수와 관계를 맺은 유화부인이다.

 

이런 역사 기록을 단순화시키면 결국 유화부인은 단군과 관계를 맺어 부여의 왕인 해부루를 낳고 해모수와 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낳은 것이 된다.

 

네티즌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의미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고, 특히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가 드라마에서 한나라에 저항하는 고조선의 유민으로 등장해 눈이 뽑히는 형벌까지 받는 등 왕다운 위상을 보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환단고기 등의 기록을 중시하는 네티즌은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가 고구려로 이어져 내려온 정통세력이며, 동부여는 한나라에 쫓겨가 세운 소국으로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북부여의 역사는 해모수로부터 2대 모수리, 3대 고해사, 4대 고우루, 5대 고두막한(일명 동명성왕), 6대 고무서 등으로 이어지면서 졸본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동명성왕 때 한나라를 물리칠 정도로 강력했던 북부여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고 동부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토론방’에 올라온 ‘잃어버린 북부여사’(이재훤)라는 글은 “중국은 동명성왕에게 처참하게 패한 후 북부여사를 말살시켰다”며 “드라마가 중국의 사대주의를 답습하면서 전개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썼다.

 

부여의 역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중한 입장이다. 워낙 사료가 적고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을 펴낸 역사학자 이도학씨에 따르면 부여는 모두 4개였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는데 북부여에서 나오셨다’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는 조공하지 않았다’는 광개토왕비문의 글귀대로 북부여와 동부여는 존재했고, 백제 성왕이 서기 538년에 사비성(충남 부여)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여 방위(方位)의 기준이 됐을 ‘원부여’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도학씨는 북부여와 동부여의 미스터리에 대해 서기 285년에 전연(前燕)의 습격으로 부여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사건을 단서로 삼는다. ‘당시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그 일족이 멀리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나중에 서진(西晉)의 지원으로 원래 부여의 자리에 재건된 것이 북부여이고, 망명해 세운 정권이 동부여가 됐다는 것이다.

 

드라마 ‘주몽’의 홈페이지에는 주몽과 동명왕의 명칭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왜 중국식 이름인 주몽을 그대로 쓰고 있느냐’는 비판이 있다. 사실 주몽은 중국식 이름이라는 주장이 일찍부터 있어왔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주몽이란 이름이 중국 문헌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추모’로 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이 성은 고(高)씨요, 휘(諱)는 주몽’이라고 돼 있지만 주몽은 추모(鄒牟)라는 본명의 중국식 표기라는 것이다. 또 ‘위서’에 ‘주몽은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풀이돼 있는 것을 감안하면 주몽은 별명이지 이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동명(東明)이라는 명칭도 많은 혼란을 낳고 있다. 고구려뿐 아니라 부여의 건국신화에도 동명이 등장하기 때문에 ‘주몽이 동명성왕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한(東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나오는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거의 같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북쪽 이민족 탁리국의 시녀’로 바뀐 부분을 제외하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아이를 잉태하고, 알이 등장하며, 동물들이 경외하는 아이가 빼어난 활솜씨를 지닌 것에 이르기까지 똑같다. 부여의 건국신화는 이 활솜씨가 빼어난 하늘의 아이를 동명이라 불렀다고 기술한다.

 

동명이라는 이름이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모두 등장하고 부여, 고구려 건국신화의 구조가 빼어 닮았다는 사실은 전부터 많은 해석을 낳았다. ‘고구려 건국세력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해 주몽신화를 만들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또 ‘동쪽의 밝음’을 뜻하는 동명이라는 한자가 특정한 왕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의 공통 코드를 뜻하는 보통명사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예컨대 고구려는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東盟)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가졌는데 중국의 양서(梁書)는 이를 ‘동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동명이나 동맹은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에게 하늘, 제왕을 뜻하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운회 교수는 부여와 고구려 건국 신화가 서로 빼어 닮았다는 사실과 관련, “고구려는 분명 부여에서 나온 종족임을 알 수 있고 두 건국신화 모두 부계(父系)의 정통성을 천제의 핏줄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하지만 고구려는 한발 더 나아가 모계를 물의 신이자 농업신인 하백녀와 연결시키는데, 이는 토착세력과의 유대 강화나 민족적 융합을 꾀하고자 하는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김 교수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해부루를 낳았다는 삼국유사 단군기의 기록으로 인해 부여, 고구려 신화는 단군신화와도 연결돼 있고 몽골과 백제의 건국신화 역시 부여의 건국신화와 구조가 같다는 점에서 몽골, 백제 모두 부여를 기반으로 했다고 주장한다. 이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과 동명은 실존인물일 수도 있지만 ‘범(汎) 코리안’을 뜻하는 쥬신의 집단 무의식에 내재한 민족적 정체성의 표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또 드라마 ‘주몽’의 홈페이지에는 드라마 전개상 아직 시기상조이지만 고구려 건국 연대와 관련한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한 해가 고구려 건국연도인데 ‘주몽의 나이 22세,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연도는 기원전 37년으로 신라 건국 연도(기원전 57년)보다 20년이나 뒤진다. 물론 이러한 기술이 조작일지 모른다는 주장이 진작부터 있었는데 이러한 논란이 드라마 홈페이지에까지 옮아온 것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대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는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자체의 모순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0권 보장왕 27년(668년) 기록에 의하면,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당 태종에게 ‘고씨가 한대(漢代)로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오’라고 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맞다면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23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구려 건국 시기 논란과 관련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했었다는 설도 유력하게 제기돼 왔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원 고구려’ 개념이다. 대표적인 근거는 후한서 고구려전의 ‘전한(前漢)의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이다. 역사학자 이도학씨는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에서 “기원전 107년에 보이는 고구려현의 존재는 고구려라는 이름의 정치세력이 한군현이 설치되기 이전에 압록강 중류 지역에 존재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삼국지’ 고구려조에 나온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삼았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왕이 되었다’는 기술에 주목, “주몽의 건국은 국가의 성립이라기보다 왕실 교체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작년에 발간한 ‘고구려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부여에서 이주해온 주몽 세력이 기원전 3세기 후반 예맥이라 불리던 소국(小國) 연맹에 고구려라는 새로운 소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건국 장소인 졸본은 현재 중국 요령성 환인현이라는 해석이 우력하다. 예맥의 소국들을 병합해가던 고구려는 기원전 107년 침입한 한나라군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지만(현토군 고구려현 설치) 기원전 75년 현토군을 몰아내고 본격적인 왕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정장열 주간조선 차장대우(jr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