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정권을 넘겨줄 수도 있다" 고 한 말 때문에
여야가 다 시끄럽다.
국민들도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과연 인물이 없는 것인가?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여 온힘을 쏟아부을 인재는 없는 건지.
오래 전 갈무리 해 놓았던 요약서평중 하나를 다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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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박영규 지음
들녘/2002년 5월
▣ 저 자 박영규
경남 산청 출생. 한국외대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현재 창작집필기획 '책과 사람들'과 참사람 배움집 '이산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1996년 3월에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하면서
저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고려왕조실록』『고구려왕조실록』『백제왕조실록』 등 '한권으로 읽는 왕조실록' 시리즈와 후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소설
『후삼국기』(전5권), 역사문화에세이『특별한 한국인』을 내놓으며 역사 대중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Short Summary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 씨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세종대왕과 문화의 르네상스를 구가한 당대 최고의 인재를 다룬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을 펴냈다. 그가 세종에 관한 사료를 뒤적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세종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정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인가'라는 의구심에서 비롯됐다.
저자는 400쪽 40권 분량의 『세종실록』은 물론, 『연려실기술』『필원잡기』『용재총화』등 60여 종의 야사집과 『태조실록』『태종실록』『문종실록』『단종실록』『세조실록』까지 샅샅이 뒤지며 세종 시대의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세종의 즉위과정과 함께 정치·국방·학문·훈민정음·과학·음악 분야에서의 업적과 왕을 보필한 신하들의 치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오늘날의 정치지도자의 행보와 비교할 수 있는 훌륭한 잣대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세종의 정식 묘호(학문에 영특하고 병법엔 슬기로우며 인자하고 뛰어나며 명철하고 효성스러운 대왕)처럼 세종이 정말 뛰어난 군주였음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는 위대한 왕이었어요. 아니 단순히 왕으로서만이 아니라 대단한 인격자이며 걸출한 인간이었지요. 그에겐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었으며,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살 줄 아는 폭넓은 아량도 있었어요. 그는 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학자였고, 인간미 넘치는 선비였으며, 공평무사한 판관이기도 했습니다."
1. 왕자 충녕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 14년 10월, 태종의 부마인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가 펼쳐졌다. 이 자리엔 세자
이제(양녕)를 비롯하여 여러 종친들이 함께 했고, 충녕대군도 끼어 있었다. 밤이 깊도록 연회는 계속되었는데, 세자는 기생 초궁장을 끼고
흥청거렸다. 세자뿐 아니라 참석한 종친들이 모두 기생을 끼고 놀았던 모양인데, 그 중간에 세자는 초궁장을 데리고 정순공주의 대청으로 찾아들어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연회 중에 충녕이 기생을 안고 노는 양녕을 훈계했던 모양이고, 양녕은 화가
나서 누나에게 찾아들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양녕의 그 말이 곧 태종의 귀에 들어가자 양녕이 충녕을 질시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일단 양녕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양녕이 이제 막 탈상한 집에 가서 난잡하게 놀아난 것을 함께 꾸짖었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양녕의 이 말 속엔 뼈가 들어 있었다. 충녕이 세자인 양녕을 제치고 조정 대신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것에 비해 정작 양녕은 충녕에게 대단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또 충녕은 왕자들 중에서 성격이 가장 어질고 동정심도 많았다. 하지만 왕자가 너무 뛰어나서 세상의 마음을 얻으면 위험해지는 법이다. 이 때문에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박은은 충녕의 장인 심온에게 이렇게 말했다. "충녕대군이 어질어서 중외에서 마음이 쏠리니, 마땅히 여쭈어서 처신할 바를 스스로 알게 하시오." 양녕의 말은 바로 그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2. 폐세자 사건과 세종의 즉위
엽색 행각을 일삼는 세자와 태종의 분노
양녕은 세자가 된 뒤로 공부를
게을리 하고, 서연에 참여하지 않는 일이 많아 태종으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태종은 이런 일로 그를 세자에서 폐하지는 않았다. 양녕이
폐위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엽색 행각 때문이었다.
양녕은 열네 살이 되던 1407년에 김한로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성에 눈을 떴는데, 열일곱 살이 되던 1410년부터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의 눈을 사로잡은 여자는 기생 봉지련이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그녀를 보았고, 결국 시종을 앞세우고 그녀의 집에 몰래 찾아들어 사통하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이를 안 태종은 봉지련을 옥에 가두었으나 양녕은 식음을 전폐했고, 태종은 세자가 걱정이 되어 봉지련을 풀어주었으나 세자가 봉지련을 동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금지했다. 그러나 세자는 은아리와 이오방이라는 궐 밖의 안내자를 구해 몰래 궁 밖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이 외에도 양녕은 태종 몰래 동궁전에서 매를 키웠고, 곧잘 매사냥을 다녔다. 그 때문에 태종은 세자전의 환관들에게 장을 때려 유배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양녕은 태종을 몹시 원망하였다. 양녕이 단식을 하며 저항하자 결국 태종도 서연을 중단시키는 조치까지 내리며 세자를 달랬다.
이 사건 이후 양녕은 한층 대담해져 1414년 1월에는 동궁으로 창기를 끌어들이고, 병을 핑계로 서연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 무렵
양녕 앞에 나타난 여자가 바로 기생 초궁장이었는데, 그녀는 원래 정종이 가까이 했던 기생이었다. 양녕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녀와 사통하였다가
태종의 분노를 사게 된다. 태종은 자신의 친형인 정종과 사통하던 기생이 아들 세자와도 사통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화가 난
태종은 즉시 초궁장을 동궁전에서 내쫓았다.
초궁장 이후 양녕의 눈에 든 기생은 칠점생으로 원래 매형 이백강이 거느리던 첩이었다. 양녕이 그녀를 궁으로 데려오려 하자 충녕이 "친척끼리 서로 이같이 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라고 강하게 만류해 일단 칠점생을 포기했으나, 다시 그녀를 동궁으로 데려왔고 궁 밖으로 나가 칠점생을 만나기도 했다.
양녕은 1417년에 또 한번의 간통 사건을 벌이는데, 바로 곽선의 첩 어리 사건이다. 이 소동은 양녕을 폐세자 신세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확대되는데, 전말은 이렇다. 어리가 절색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양녕은 이오방에게 그녀를 데려오라 하였다. 세자는 어리를 납치해 동궁에 두었는데, 다음 해 2월 그 사실을 태종이 알게 되었다. 태종은 세자 주변인들을 벌 주고 이후 세자를 폐할 것을 결심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한결같이 세자를 폐하지 말 것을 주청했으므로 태종은 한 번만 더 세자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두 달이 겨우 지났을 때 이귀수로부터 방유신의 손녀가 자색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방유신의 집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손녀의 방으로 날아들었다. 다음날 이귀수에게 이불보를 짊어지게 하고, 방유신의 집에서 합궁하고 한밤중에 돌아왔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이귀수는 처형되고, 방유신은 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쫓겨났다.
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때에 세자는 또 은밀히 어리를 동궁에 들여놓았다. 어리는 아이를 가졌고 그녀의 배가 불러오자 다시 세자빈의 할머니가 어리를 데리고 나가 아이를 낳게 하였다. 출산 후에 어리는 또다시 동궁에서 지냈는데, 태종이 그 사실을 안 것이다. 이때가 태종 18년인 1418년 5월이다. 태종은 노기를 드러내며 세자를 옛 궁궐인 한양으로 나가게 했고 숙빈을 궁궐에서 쫓아내 친정에서 거처하게 하였으며, 김한로는 나주로 유배시켰다.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에 책봉되는 충녕
세자를 한양으로 내쫓을 때, 태종은 이미 세자를 폐위할 것을
결심한 터였다. 태종은 세자의 서연관들을 불러 세자를 가르쳐보라고 하였다. 서연관들은 세자에게 만나기를 청했으나, 세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세자는 결국 그들의 끈질긴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만났는데 빈객과 서연관이 대화를 나눠보니, 전혀 반성의 빛이 없고
개선의 여지도 없었다. 그들은 또한 태종이 이미 세자를 폐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6월 태종은 의정부 대신과 공신, 6조, 3군도총제부, 각 관청의 관리들을 모두 소집하고 "세자는 여색에 빠져 옳지 못한 행동을 함부로 저지르고 있어 훗날 그가 살리고 죽이며, 죽고 빼앗는 권한을 차지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다. 여러 재상들이 잘 살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조정에서는 정당한 절차를 밟아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정 대신들은 태종이 세자를 폐할 결심을 한 것을 깨닫고 세자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다.
결국 세자를 폐위하자, 곧 새로운 세자 책봉 문제가 대두되었다. 신하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폐세자의 아들 중에서 새 세자를
세우자는 쪽과 어진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여기서 어진 사람이란 곧 충녕대군이었다. 형을 내쫓고 동생을 세우는 것은 변란의
근원이라고 원경왕후는 반대했지만, 폐세자의 아들을 세워도 파란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양녕의 큰아들은 불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어린 세자가 세워지면 왕권이 불안해질 것은 당연했고, 혹 자신이 일찍 죽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태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에 어진 사람으로 고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내렸다.
태종은 효령과 충녕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 태종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세자로 충녕이 결정되었고 세자 책봉례를 거행한 후, 태종은 그 사실을 종묘에 고하도록 했으며,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3. 왕도정치를 구현한 세종과 조정의 대들보들
정무 처리의 귀재,
황희
세종 시대를 떠받친 정치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황희일 것이다. 그는 세종
8년(1426년)에 우의정에 제수된 이래 1449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고, 1432년부터 1449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으니,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만하다. 그는 영의정이 되던 해에 이미 70세의 노구였고, 그 때문에 누차에 걸쳐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세종은 허락하지 않다가 그가 87세가 되던 1449년에야 비로소 치사(致仕 :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남)를 인정할 정도였다. 세종
재위 31년 중에서 24년 동안 정승직을 수행했으니, 세종이 남긴 업적 중에 절반은 황희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성에서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군서는 판강릉부사를 지냈는데, 그 덕에 황희는 14세에 음보로 보안궁녹사가 되었다. 그리고 21세에 사미시,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황희가 관직에 나왔을 무렵, 고려 조정은 엄청난 격랑에 휘말려 있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을 때 황희는 관직을 내던지고 여러 학관들과 두문동으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두문동에 은거한 학자들 중에서 인재를 찾자 함께 머물던 동료들은 황희의 등을 떠밀어 조정으로 갈 것을 권했고, 황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태조와 정종 시절에 황희의 관직 생활은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이는 그의 완고한 성품 탓이었다. 원칙주의자였던 그는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상대가 누구든 결코 타협하는 일이 없었고, 이는 때로 상관이나 왕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태종은 스스로 말했듯이 황희를 혈족처럼 여기며 늘 자기 주변에 두려 했고, 웬만한 잘못은 쉽게 눈감아줬다. 그 때문에 하륜 같은 훈구 대신들이 황희를 시기하여 어떻게 해서든 공격할 빌미를 찾고자 했던 것인데, 그때마다 태종은 황희 편을 들어줬다. 그러나 두 군신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양녕의 폐세자 문제가 터졌을 땐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황희가 양녕의 폐위를 반대하자 태종은 양녕을 두둔한 황희의 직위를 빼앗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교하로 내쫓았으나 네 해가 흐른 1422년 2월, 태종은 황희를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황희의 행정 능력을 높게 평가했던 세종은 곧 감찰과 언론을 맡는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겸하게 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426년
2월 10일에 이조판서로 임명하여 중책을 맡겼다. 하지만 이조판서에 오르자마자 황희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남원 부사 박희중이 부정을 저질러
탄핵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사실을 황희가 누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그에 대한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5월 13일에
우의정으로 삼아 정승의 반열에 올렸으며, 8개월 뒤인 1427년 1월에는 좌의정으로 승격시키고 세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좌의정에 오른 지 5개월 만인 1427년 6월 황희는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등과 함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황희와 서선은 사돈지간이었는데, 황희의 사위이자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대흥현으로 가는 길에 신창현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고을 아전이 서달에게 예를 갖추지 않자 서달은 그의 종들과 아전을 매로 쳐서 죽게 했다. 사위가 살인을 한 사태를 접한 황희는 친분이 깊던 판부사 맹사성을 찾아가 피해자 집안과의 중재를 요청했고 맹사성은 신창현감 곽규에게 편지를 보내 무사히 처리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다. 청탁과 뇌물이 오고 간 후 이 일은 대충 넘어갔다. 형조참판 신개는 제대로 심리하지 않고 서달을 석방시켜 버렸고 그의 종들에게 죄를 물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처결문건들을 낱낱이 살펴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이 많이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의정부에 사건을 다시 내려보내 죄인들을 심문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청탁과 뇌물이 오갔음이 밝혀지고 관련자들은 파면 당하거나 유배 당했다. 비록 황희가 시집간 딸을 생각하여 살인을 은폐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죄는 컸지만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좌의정 벼슬을 복원시켜줬다. 하지만 황희는 서달 사건으로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모친을 당한 처지였다. 여러 번 기복 명령을 거둬달라는 상소를 올리며 조정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세종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황희는 좌의정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뒤 황희는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뇌물을 받거나 온정에 이끌려 청탁이나 권력을 행사하다가 탄핵을 받게 되었는데 이런 일 때문에 실록의 황희 졸기에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엔 단점이 있으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살인 사건과 뇌물 사건에 휘말려 홍역을 치른 황희였지만, 그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변함 없었던 덕에 1431년(세종 13년)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에 임명된다. 이때 황희의 나이 69세였다. 세종이 황희를 택한 것은 지금껏 정승을 지낸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청렴하고 일
처리 능력이 탁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다 황희는 어떤 문제든지 계책이 남달랐고, 상황과 사건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내놓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또 비록 몇 번 뇌물을 받았다고는 하나 다른 신하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고, 인정이 많고 마음이 유순하여 노비들에게도 모질게
하는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청백리의 대명사,
유관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상신(相臣)으로 꼽히는 정치가가 유관이다. 그는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었으며, 황희나 맹사성에 앞서 재상의 초상으로 여겨졌던 인물이다. 비록 영의정엔 오르지 못하고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우의정에 머무는 것에 그쳤으나, 그의 삶은 세종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433년(세종 15년) 5월 그가 죽자,
세종은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는데도 그를 애도하는 의식을 감행했다. 세종이 황희에게서 정무 처리의 해박함을 배우고 맹사성에게서 삶을 즐기는
유연함을 배웠다면, 유관에게서는 진정한 선비의 길이 무엇인지 배웠던 것이다.
유관은 1346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황해도 문화로, 고려시대에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을 지낸 유안택의 아들이다. 그가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6세 되던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전리전랑, 전교부령을 거쳐 고려 말기에 봉산군주, 성균사예, 사헌중승 등을 역임하다 조선 개국을 맞이했다. 그는 불교를 배척하고 신유학인 성리학에 몰두했고, 이런 학문적 인연으로 조선 창업에 동조하여 원종공신이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그가 처음 맡은 소임은 내사사인이었으며, 태조에게 이틀에 한 번꼴로 『대학연의』를 강의했다. 그는 태조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어 간관의 수장인 좌선시상시(좌상시)에 발탁되었다.
그가 좌상시 직책을 수행하던 3개월 동안 무분별하게 시행되는 기복조치를 본래 취지에 맞게 시행하도록 했다. 당시 관리들은 상을 당하면 삼년상은커녕 채 1백 일도 채우지 않고 해당 관청이 기복 신청을 하도록 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유관은 삼년상이 천하의 공통된 상례임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중대사와 관계되지 않은 관리들은 반드시 삼년상을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 일을 관철시킨 그는 조정에서 깐깐한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1398년 봄에 형조전서로 진급한 그는 또 한 번 깐깐한 기질을 발휘했다. 개국 초라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형법의 적용도 엄정하지 못했는데, 1398년 5월에 형법 개정을 품신한 것이다. 당시 가장 문제가 되던 것은 형법의 형평성 문제였다. 부자는 법을 어겨도 재물로 형을 대신하는 제도가 있었고, 사람을 사서 형을 대신 받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유관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평하게 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형법의 문제는 비단 법 자체에 한정되지 않았다. 형옥을 관리하는 형리들이 법에 무지하여 일반 백성들이 형평에 맞지 않는 처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법 조문이 구체적이지 못해 해석 여하에 따라 형벌의 강도가 크게 차이 났다. 유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형옥은 반드시 형법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하며, 형리들이 법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태조의 허락을 얻어냈다. 또 법에 명시되어 있는 고문의 한계를 지키도록 하였다.
유관이 형조전서에서 쫓겨난 직후,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이고 태조를 상왕으로 밀어냈다. 방원이 형 방과(정종)를 왕위에 앉히자 유관은 중추원부사에서 판사로 승진했고, 태종 1년(1401년) 2월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사헌 직책에 있으면서 두 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았는데 첫째는 억불정책이요, 둘째는 포폐의 통용이었다. 억불정책은 태종이 말하기를 "태상왕이 불사(佛事)를 좋아하여 차마 혁파할 수 없다." 하여 일단 유예되었다. 또 포폐는 물품 화폐와 크게 차이가 없고, 저화 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태종은 유관의 포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탄핵 사건으로 대사헌에서 파직되고 한직으로 돌다가 고향으로 유배되기도 하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간 적이 있는데, 목민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곳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심지어 백성들이 유관을 데려가지 말라고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칭송은 오히려 유관을 한양으로 소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은 경연관, 세자좌빈객 등의 학관직을 겸하며 1414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예문관 대제학에 머물렀다. 다시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418년 6월 세자좌빈객을 겸하여 세자인 세종을 가르쳤다.
그해 왕위에 오른 세종은 유관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고 중요한 문제는 그에게 자주 물었다. 이미 유관은 73세의 나이로 사직을
자주 청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다가 1426년이 되어서야 치사하도록 허락했다. 고향인 황해도 문화현으로 돌아가 학문에 심취하다가
1433년 5월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종은 그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는 학문하는 데 부지런하고, 덕을 닦는 데
게으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에 관한 여러 일화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청빈함에 관한 것이다. 그는 청렴하고 방정하여 정승의 벼슬에 올랐을 때도 초가집 한 칸,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집에는 울타리도 담장도 없었는데,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태종은 선공감을 시켜 밤에 몰래 울타리를 만들어 주게 하고,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또 그가 굶고 다닐까 염려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음식을 내리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4. 영토 개척과 국방의 주역들
대마도 정벌의 영웅,
이종무
이종무는 1360년(공민왕 9년)에 태어났다.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22세 되던 1381년(우왕 7년), 강원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전장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그는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정용호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꾸준히 승전하여 조선 대국 후인 1397년(태조 6년)엔 옹진만호에 올랐는데, 이때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성을 포기하지 않고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첨절제사가 되었다.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안대군(태종) 진영에 가담하여 상장군이 되었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방간의 군대를 무찌른 공로로 통원군에 봉해졌다. 태종의 신임을 얻은 이종무는 북방 수비의 요직인 의주병마사에 나갔다가 1403년에 우군총제에 임명되어 도성 병력을 맡았다. 그는 1406년에는 좌군총제와 우군총제를 겸하고, 1408년에는 중군도총제, 1409년에는 안주도 도병마사, 1411년에는 안주절제사가 되었다. 요직을 두루 거치던 그는 1418년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물러나면서 태종의 호위를 맡게 된다.
1419년 5월, 태종과 세종은 황급히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마도를 치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태종은 비록 왕위에서 물러났으나 군권은 넘겨주지 않은 상태였다. 태종의 대마도 정벌 계획은 며칠 전에 올라온 충청도 감사와 황해도 감사의 장계에서 비롯되었다. 왜인의 배 수백 척이 몰려 왔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차후 왜구가 우리 땅을 넘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한다. 태종은 곧 이종무를 불러 삼국도체찰사에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 정벌을 명령한다. 출정식을 거행한 이종무는 6월 드디어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를 떠나 대마도로 향했다. 동원된 병선은 경기도에서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0척, 경상도 1백 26척 등으로 총 2백 27척이었다. 병력은 모두 합해 1만 7천 2백 85명이었다. 배에는 이들이 먹을 65일간 먹을 양식이 실려 있었다.
대마도주 옹와가 항복하지 않자, 이종무는 출병하여 수색을 시켰다. 우선 해안을 돌며 전선을 빼앗아 압수하거나 불태우고, 적의 가호 1천 9백 39호를 불태웠다. 또한 적병 1백 14명을 베고 20명을 사로잡았으며, 그들에게 포로로 잡힌 중국인 남녀 1백 31명을 구했다. 그때 승전보를 받아든 태종이 이종무에게 글을 보냈다.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는 것은 그 죄를 꾸짖기 위함이지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은덕을 저버리고 노략질을 일삼는 자들은 단호하게 처벌하되, 우리의 덕의를 사모하는 백성들은 해하지 말라." 그런 가운데 장수들은 육상전을 벌여 정벌할 것을 청했고, 이종무의 동의 아래 육지로 내려간 좌우군은 곤욕을 치르고 돌아왔다. 이종무가 배로 포구를 에워싸고 장기전을 치를 태세를 갖추자, 웅와가 글을 보내 강화를 청해왔다. 그리고 7월에 태풍이 불 것이니 조심하라는 경고도 있었는데, 이종무도 그 점을 염려하여 일단 거제도로 귀환하였다.
전장에서 돌아온 이종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헌부의 탄핵이었다. 좌군 박실의 패전에 이종무의 책임이 크다는 상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은 패한 것보다 승전의 의미가 크다며 끝까지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종무를 보호했다. 그러나 화근은 엉뚱한 데 있었다. 출병 당시 나라에 죄를 지었다가 사면된 김훈과 노이를 데려간 것이 문제였다. 이종무는 오직 그의 뛰어난 무술만 보고 전쟁에 참여시켰는데, 사헌부에서 그 죄를 물어 탄핵한 것이다. 태종은 김훈과 노이의 츨병을 자신이 허락한 만큼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헌부에서는 불충한 인물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며 끝까지 탄핵을 고집했다. 결국 이종무는 1419년 11월 하옥되고 만다. 태종은 이종무를 아끼는 마음에 그저 벼슬을 떼고 한양 바깥에 나가 살게 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태종의 보호로 위기를 면한 이종무는 태종이 죽은 뒤에도 세종의 신임을 얻었다. 덕분에 1424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함께 갔던 권희달이 명나라에서 실수한 것과 관련하여 이종무는 또 탄핵을 받았다. 그 바람에 벼슬을 빼앗기고 유배 생활을 해야할 처지였다. 그러나 세종은 1425년에 그의 칙첩과 과전을 돌려주었고, 이종무는 그해 7월, 6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은 그에게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리니, 국방의 공로가 있고 생각이 어둡지 아니하다는 뜻이었다.
5. 세종의 학문적 스승들
세종의 황금마차
집현전
군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우수한 인력이 없다면 좋은 정치는 불가능한 법이다. 그 때문에 세종은 즉위
초부터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뛰어난 인재란 모두 학문이라는 나무에 열리는 열매라고 생각했고, 그 열매를 얻기 위한 텃밭이 바로
집현전이었다. 세종 1년(1419년)에 좌의정 박은이 계를 올려 문풍을 진작시키라고 한다. 세종은 박은의 말을 매우 달가워하며 무과에 학문을
추가하고, 집현전을 확대 개편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나도 별다른 진척이 없자 그해 12월에 직접 나서서 집현전 확대
개편을 서두른다. 이듬해 집현전의 인원 수를 확정했고, 즉시 관원을 임명했다.
세종은 집현전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집현전 최고직인 영전사 2인을 정1품 정승 급이 맡도록 하고, 실제적인 운영자인 대제학은 판서 급인 정2품 2인으로 정했다. 또 2인의 제학은 종2품으로 했다. 이들은 모두 겸직이어서 실제 연구 활동을 하는 직책은 아니었으나 그 이하 부제학부터는 겸직이 아닌 순수 학관직이었다. 이들 모두는 임금에게 강의를 하고 정치 토론을 이끄는 경연관을 겸하도록 했다. 또 집현전 제학과 부제학의 서열을 사간보다 위에 둠으로써 조정에서의 정치적 비중도 높였다.
세종은 문관 가운데서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이 올바른 인물을 택하되 되도록 나이가 젊은 사람으로 택하고, 경전과 역사 강론을 주로 하며 임금의 자문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등용 기분으로 삼았다. 노소에 관계없이 당대 최고의 석학들을 집현전 관리로 등용했던 것이다. 또 집현전 학사들의 잡무를 없애기 위해 집현전을 전담하는 노비를 책정하고 서리도 10명을 뒀다. 그들은 공부하고 강의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였고, 시작(詩作)과 강의, 서적 편찬을 통해 그 성과를 보여야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집현전의 존속 기간은 1420년(세종 2년)부터 1456년(세조 2년)까지로 거의 세종 대가 중심이다. 이를 대략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설립 때부터 세종 10년까지다. 이 기간은 집현전 학사들이 학문적 수련에 전념하던 시기로 주로 강연이나 문서 작성, 경서 연구를 했고 관원 수도 16명에 불과했다.
제2기는 세종 11년부터 18년까지로 잡을 수 있는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던 시기다. 이 무렵의 집현전은 법제와 의례 등을 손질하고 정리했으며, 각종 사서를 편찬하고, 당면하는 정치제도의 문제점을 보안하는 데 필요한 참고자료들을 만들어 냈다. 세종은 이들이 만들어낸 자료와 학설을 바탕으로 소신 있는 정책들을 구사하였고, 때때로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집현전 학사들을 통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명분을 얻곤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엔 관원도 대폭 늘어 32명이나 되었다.
제3기는 세종 19년부터 세종 말년까지이다. 이때 집현전 관원 수는 20명으로 축소 조정되었으며,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고 학문적인 기능은 다소 축소되었다. 이는 세종의 지병 때문에 세자가 정무를 대신 처리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세종 생존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학문적인 기능이 더 강했다.
제4기에 해당하는 문종·단종 대부터 집현전 학사들의 대간 출입이 잦아지고, 집현전 출신들이 대거 대간으로 차출되는 경향이 생기면서 집현전은 정치적 출세의 요람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세조 등극 이후에 집현전은 왕권에 집착한 세조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고, 급기야 1456년 6월에 집현전 출신자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육신 사건이 발생한 후에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해버렸다.
이후 조선 조정에선 집현전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 사라졌다가 성종 대에 이르러 홍문관이 설립됨으로써 그 전통을 이었다. 하지만 홍문관은 집현전처럼 순수한 학문 연구를 위한 기관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짙은 곳이었다.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언론 삼사라 불리며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6. 훈민정음 창제와 그 공로자들
학문 진흥의 주춧돌, 정인지
세종의
혁신적인 정책들은 대부분 조선 유학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유학자들은 세종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기득권 계층인 그들은
세종의 혁신 정책에 의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심지어 세종의 친위세력이라 할 수 있는 집현전 내부에서조차 때때로 세종의 정책에
반발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의 경우 부제학이던 최만리 등은 세종을 힐난하며 결사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의 새로운 정책들을
지지하며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인지다. 그는 역사, 천문학, 언어학, 경학 등에 두루 통달하여 세종이
요긴하게 써먹은 인물이다.
정인지는 1396년에 석성현감을 지낸 정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글도 잘하고 암송도 잘하여 다섯 살에 한문을 줄줄 읽을 정도였다.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9세 되던 1414년 3월, 문과에 일등으로 급제하였다. 그가 대과에 응시했을 때, 시관 하륜 등이 세 명을 뽑았는데, 우열을 가릴 수 없어 그들의 글을 태종에게 바치면서 직접 등수를 가려줄 것을 청했다. 태종이 하나를 집으니, 바로 정인지의 시권이었다. 덕분에 정인지는 종6품 예빈시 주부에 임명되었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로 예빈시 주부 자리에 앉아 출세가도를 달릴 것 같았지만, 정인지의 관직 생활은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다.
정인지는 행정관보다는 학관이 어울렸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곧잘 책에 심취했지만, 태종 시절엔 단 한 번도 학관에 제수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학문적 능력은 빛을 내지 못했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 죽고 난 후였다. 태종이 죽자, 그는 병조에서 벗어나 예조와 이조에서 정랑을 지내고, 이내 세종에 의해 종4품 집현전 응교로 발탁되었다. 그의 학문적 능력을 눈여겨본 세종은 그를 집현전의 기둥으로 키우고자 한 것이다. 응교에 임명된 그는 1423년(세종 5년) 6월에 춘추관 직위를 겸직하여 역사학을 심도 있게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평소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세종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곧 정4품 직집현전으로 승격시켰다. 이때부터 정인지는 예문관과 집현전에 근무하며 학관으로 자리를 굳혔다.
더욱이 1427년 3월, 문관들을 대상으로 중시가 실시되었는데, 정인지는 이 시험에서 일등을 하여 정3품 집현전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정인지는 직제학에 오른 지 1년 만인 1428년(세종 10년)에 종2품 부제학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에 이르렀다. 3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재추의 반열에 든 것이다. 등용된 지 14년 만이었고, 나이는 불과 서른세 살이었다. 정인지보다 여섯 살 많았으며 조정의 이목을 끌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던 김종서의 당시 직책이 종3품 사헌부 집의였고, 정인지와 함께 부제학에 임명된 김효정이 마흔여섯 살이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고속 승진했는지 알 만하다.
집현전을 실제로 책임지고 이끄는 사람은 부제학이었다. 정인지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집현전의 기능은 대폭 확대되었고, 관원 수도 16명에서 32명으로 늘었다. 집현전에서 다루는 학문의 범위는 다양했다.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되는 경학은 물론이고 역사학, 천문학, 기술과학, 농학, 약학, 법학, 언어학 등 당시의 모든 학문을 연구했다. 정인지는 이러한 작업들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통솔했으며, 세종은 그들의 학문적 바탕에 힘입어 과감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천했다. 집현전에서 학문적인 보폭이 가장 넓은 인물은 역시 부제학 정인지였다. 수학에서부터 천문학, 경학, 역사학, 악학,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세종은 1432년 3월, 정인지를 예문관 제학(정2품)에 임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 37세로, 조선사를 통틀어 가장 젊은 나이에 예문관의 수장이 된 셈이다.
정인지는 1435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됐는데, 이는 본인이 간곡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곁에서 모시고 싶다며 간절히 청하여 내려가긴 했는데, 막상 그는 행정 경험이 부족하여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439년 9월, 그는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세종은 7개월 뒤인 이듬해 4월, 그를 형조참판으로 제수한다. 너무 오랫동안 학관 생활만 한 탓에 행정력을 전혀 키우지 못한 그의 처지를 고려한 조치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전격적으로 형조판서에 기용했다. 반년 남짓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가 상소한 내용은 주로 절도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처방은 형편없는 강압 일변도의 방안이었다. 법을 맡은 관리로서 처벌 위주의 발상만 내놓았으니, 법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지 못한 것이다.
세종은 1440년 11월, 그를 지중추원사로 임명하여 역사서 편찬에 주력하도록 했는데 이 시절에 정인지는 불교 문제로 세종과 논쟁을 벌였다.
불교 문제로 집현전 학자들과 힘 겨루기를 하고 있을 무렵, 세종은 조정을 재상들에게 맡겨두고 서무 결재권을 세자에게 넘긴 채 운학(언어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종은 경연에 채워진 음운학 서적들을 모두 독파하고, 홀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시작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이 창제되면 반포 과정에서 학자들의 반발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이를 막아줄 인물을 모색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가 정인지였다. 정인지는 그간 세종이 벌였던 학문 사업과 과학 발전 계획에 지속적으로 도움을 줬고, 음운학에도 조예가 깊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곧 정인지를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했다. 이때가 1442년 9월로, 정인지의 나이 47세였다. 예문관 대제학은 국가의 학문 정책을 책임지는 위치이므로 훈민정음 반포 여부에 크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였다. 세종은 정인지를 이 자리에 배치하여 훈민정음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443년 12월 30일에 기습적으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공표하였고, 세종의 예상대로 정인지는 새로운 문자 창제에 찬성했다.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세종은 오히려 최만리를 꾸짖으며 반대 여론을 물리쳤다.
세종은 새 문자의 창제 취지와 각 자모의 음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해설서를 만들도록 했고, 정인지는 이 작업을 주도하여 1446년 9월에 결실을 보았다. 훈민정음 해설서의 제목은 새 문자의 이름을 따서 『훈민정음』이라 했고, 정인지는 해설에 해당하는 해례편의 서문을 썼다.
정인지는 세종 대엔 주로 학관직에 머물며 학문 진흥에 기여했지만, 세종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그는 문종이 즉위한 뒤에는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가 단종 재위시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권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과 사이가 나빠 한직인 판중추원사로 밀려났다.
그런 가운데 1453년에 수양대군 이유가 정변을 일으켰고, 그는 이유의 편에 섰다. 계유정변이 성공하자 그는 정변에 조력한 공로로 좌의정에 발탁되고, 수양대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또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하동부원군에 피봉됐다. 그야말로 학자의 길에서 권력가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1455년에 마침내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즉위하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성종 대인 1478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문풍과 학덕을 높이는 뜻에서 삼로(三老)에 선정했고 왕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진봉식 직전에 대간에서 반대 상소가 올라왔다. 그가 치부에 전념해서 삼로로는 마땅치 않다는 의견이었다. 노년의 정인지는 무척 재물을 탐했던 모양이다. 그는 결국 삼로에 선정되지 못한 채 그 해에 83세의 일기로 죽었다.
7. 과학 혁명의 선구자들
과학 혁명의 초석을 다진
정초
정초는 사헌부 집의를 지낸 정희의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당대의 명유이자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연려실기술』에 그의 총명함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1405년(태종 5년)에 을과 제2등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검열은 비록 예문관의 정9품 하위관직이었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요직이었다. 검열에 있던 그는 그해 4월 27일에 태종이 실시한 문과 복시에서 2등을 하여 내자 직장 (종7품)으로
승진했다. 관직에 진출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일군 성과였다. 그 뒤로 정초는 빠르게 성장하여 1407년에는 사간원의 정6품 좌정언이 되었다.
좌정언 시절에 정초는 태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말이 논리에 맞고 뜻이 정확했으며, 절개 또한 굳었다. 정초는 간관으로서 정승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간관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이날 태종은 그를 달래며 그냥 돌려 보냈다. 실록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때 정초는 언관에서 내쫓긴 듯하다. 이날 이후 실록엔 정초에 관한 기록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언관인 그의 직분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그의 이름은 지속적으로 실록에 기록되어야 정상이다.
실록에 그에 관한 기록이 다시 보이는 것은 7년 후인 1414년 12월이다. 이때 정초는 종3품 도청사 제용감정에 올라 있었으나 제용감은 요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청요직 출신인 그가 이곳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권력 핵심 부서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대간과 형조에서 노비 사건을 오결한 사건에 연루되어 장 80대를 맞고 고신을 빼앗긴 채 수군에서 노역을 하게 되었다. 공신이나 공신의 아들은 노역에서 제외되었는데 사실 정초도 공신의 아들이었으나 태종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다음해 11월, 태종은 정초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석방시켰다. 태종은 정초를 세자시강원의 필선(정4품)으로 삼았다가 다시 사헌부 집의(종3품)로 제수했다.
1418년 태종은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을 세자에 책봉했다. 이때 정초는 세자시강원에서 처음으로 충녕을 만났다. 당시 정초가 서연관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초는 경연관이 되었고, 시강원의 소임을 맡았다. 이듬해 10월, 정초는 승진하여 사간원의 정3품 당상관인 우사간대부(훗날의 대사간)가 되었다. 사간대부는 직책상 일이 많아 대개 겸직을 주지 않는 법인데, 세종은 경연에 정초가 없으면 안 된다며 경연관을 겸직하게 하였다. 사간으로서 경연관을 겸직한 전례가 드물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특별한 조치였다.
1419년 5월, 정초는 공조참의로 임명됐다. 당시 세종은 과학 기술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정초의 역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큰 보탬이 될 거라 판단하고 기술 개발을 주도하던 공조에 보낸 것이다. 당시 공조의 공장에는 뛰어난 기술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장영실이 있었다. 이때 정초는 장영실에게 시계 제작에 대한 이론을 전수하고 물시계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조참의로 있던 그는 이내 우대언을 임명되어 세종 곁으로 갔다. 그가 대언으로 근무할 무렵 장영실은 공조에 소속된 별좌 벼슬을 받았는데, 여기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정초의 후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장영실의 상의원 별좌 제수를 놓고 세종과 대신들 사이에 팽팽한 설전이 오갔던 것으로 봐서 기생의 자식이자 노비 신분인 그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조말생, 병조참의였던 이천, 우대언 정초 등이 지원하지 않았다면 세종도 이 문제를 매듭짓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년 동안 대언 생활을 하던 정초는 1423년 12월 함길도 감사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났다. 이때 세종이 그를 감사로 내보낸 것은 승진 발령을 내기 위한 예비 조치로 보인다. 세종의 인사 스타일 중에 특이한 면이 있다면 아끼는 신하에게 승진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몇 달간 외방직을 제수하는 것이었다. 정초는 반년 뒤인 1424년 6월에 승진하여 공조참판이 되어 돌아왔다. 이 시기에 정초는 조선 과학에 획을 긋는 중요한 성과를 얻어낸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영실이 드디어 물시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시계는 최첨단 기기였다. 특히 물시계는 낮밤에 관계없이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므로 세종은 이것의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물시계 제작에 성공한 정초는 1425년 12월, 형조참판으로 승격되었고 다시 이조참판으로 승격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얻는 정초는 1429년에 우군총제에 오르는데, 이때 그는 집현전 학자들을 이끌며 『농사직설』편찬을 주도했다. 세종은 당시 농사법의 개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농민들을 지도할 수 있는 실용 농서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농사직설』은 무엇보다도 곡식 재배에 중점을 둔 농서였다. 정초는 이 책을 짓기 위해 실제로 각 도 농민들의 재배법을 확인하는 한편, 농민들의 경험담을 기술하기도 했다. 이후 『농사직설』은 판을 거듭하며 조선 농업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했으며, 성종 때 간행된 내사본은 일본으로 전달되어 일본 농업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정초는 이 책의 서문에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고 썼는데 이점이 바로 『농사직설』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정초의 이러한 농업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중농주의 실학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1432년에 정초는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또 하나의 과학적 업적을 이뤘다. 1433년 6월, 박연, 김진 등과 함께 새로 만든 혼천의를 세종에게 올렸던 것이다. 이때 혼천의를 직접 제작한 기술자는 이천과 장영실이었고, 정초는 그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고 작업을 지휘했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로,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혼천설에 기초하여 서기전 2세기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이미 이것을 받아들였고, 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발전해왔다. 이때 정초 등이 만든 것은 이전의 것보다 정교하고 결과가 훨씬 정확했다.
혼천의 제작은 1423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칠정산내·외편' 편찬 작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칠정'이란 해와 달, 그리고 목화토금수 5성을 합쳐서 이르는 말인데, 이 별들의 운행 원리와 결과를 기록한 책이 바로 『칠정산내·외편』이다. 『칠정산내편』해설에 기여한 인물은 정흠지, 정초, 정인지 이 세 사람이었다. 『칠정산내·외편』의 해설 작업이 끝난 것은 1433년으로 이 작업에는 세종도 직접 참여했다. 이 해설 작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됨으로써 조선 과학계는 칠정의 운행 원리에 통달할 수 있었고 혼천의, 혼상, 앙부일구 등의 과학적 성과물을 얻게 된다.
정초는 바로 이런 과학 발전을 이끄는 데 구심체 역할을 했다. 특히 과학 이론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거의 그가 주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초는 혼천의를 올린 그 이듬해인 1434년 6월, 죽음을 맞이했다. 이미 그 몇 해 전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었으나, 병상에서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종이 그의 시호를 문경(文景)이라 하니, 배움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며 의로움을 기반으로 절제한다는 뜻이다.
8. 조선 음악의 거장, 박연
공자는 인간이
갖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예와 악을 꼽았다. 예와 악을 중시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끌어내는 초석으로 작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를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선 오례에 관한 규범인 '오례의'에 의해 국가 행사를 치렀는데, 이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악이었다.
예식은 크게 보면 다섯 가지에 불과했지만 '오례의' 각 항목마다 숱한 행사와 예식이 있으므로 다양하고 세심한 음악적 배려가 필요했는데 건국
초기의 조선 음악은 그 점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왕자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깊었던 세종은 이런 현실을 절감하며 음악의 혁신과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고, 스스로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혼자서 그 일을 모두 할 순 없었다. 세종에게는 유학은 물론이고, 예학에 정통하고 음악
이론에 밝으며 악기도 매우 잘 다루는 그런 인재가 절실했다. 악공을 천시하던 당시 풍조 때문에 세종의 그런 열망을 충족시킬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조선 오백 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악인(樂人)으로 불린 박연이었다.
박연은 1378년(우왕 4년)에 충청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삼사좌사를 지낸 박천석의 아들이며, 우문관 대제학을 지낸 박시용의 손자다. 그는 청년 시절에 우연히 피리를 익힐 기회가 있었는데, 음에 대한 남다른 깊이가 있어 피리 솜씨에 감탄한 고을 사람들이 '선수(善手)'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뒤 음악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와서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섭렵했다.
박연은 음악에 몰두한 탓에 1405년(태종 5년)에 스물여덟이라는 늦은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6년 뒤인 141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십이 다 돼서야 대과에 붙었다. 문과에 합격하여 출사한 뒤로 그는 주로 언관과 학관직을 수행했는데 1423년에는 의영고 부사를 맡아 의녀들을 교육시키는 훈도관이 되기도 한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세종 6년(1424년)부터였다. 당시 세종은 음악을 정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박연이 천거된 것이다. 세종은 그를 악학별좌에 임명하여 음률을 정비할 것을 명령했다. 1426년, 박연은 악학별좌로 있으면서 봉상시 판관의 벼슬을 제수했다. 봉상시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나 신하들에게 내리는 시호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곳으로 판관은 종5품 벼슬이었다. 세종이 그를 봉상시에 배치한 것은 악기에 관한 업무가 봉상시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세종 대의 음악적 부흥은 아악의 부흥, 악기의 제작, 향악의 창작, 정간보의 창안 등으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박연이 이룬 것이었다. 조선의 음악은 좌방과 우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좌방으로는 흔히 궁중 음악으로 일컬어지는 아악이 있는데, 이는 원래 중국의 고대 음악으로서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들여와 왕실의 대중사에 사용되었다. 우방으로는 민속악을 대변하는 향악과 당악이 있었다. 박연은 음악의 정리 작업에 앞서 중국의 고전들을 통해 참고자료를 확보했으며, 이후 아악기와 아악보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입되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고, 음률의 기초가 되는 악기인 편경과 편종 등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하였다.
박연은 아악의 정리 과정에서 향악과 아악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이는 세종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박연은 원래 아악을 되살리고 제향에 모두 아악만을 사용하자고 주장했지만 세종이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세종의 자주성은 박연에게 향악의 가치를 일깨웠고, 그 결과 『세종실록』의 악보에는 아악과 향악을 겸용한 원구악이 실리게 된 것이다.
박연은 칠순이 넘어서도 관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를 대신하여 악학을 이끌 인물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1450년에 세종의 죽음을 맞이했다. 또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그러면서 세월은 어느덧 10년이 흘러 1458년(세조 4년)이 되었고, 그의 나이는 81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에 관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문종도, 세조도 그의 탁월한 음악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다른 사람으로 쉬이 대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듯 영화를 누리던 박연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그의 막내아들 계우가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 일로 계우는 죽음을 당했지만, 박연은 목숨을 건졌다. 세조가 그의 음률에 대한 공적을 감안하여 연좌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벼슬에서 내쫓기고 낙향 조치되었다.
박연이 고향 영동으로 가기 위해 나루터에 섰는데, 말 한 필과 시종 한 명밖에 없을 정도로 행장이 초라하였다. 후학들이 전송하기 위해 강나루로 나왔고, 그는 술잔을 베풀었다. 이윽고 손을 잡고 하직할 때 박연은 떠나는 배 위에서 파리를 뽑아 물고 곡조를 흘렸는데, 그 소리를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낙향한 그 해에 81세를 일기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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