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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스크랩] 알바트로스, 알바트로스!

by 아름다운비행 2008. 2. 5.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가혹한 심연 위로 미끄러져 가는 배를
무심한 여행의 동반자처럼 쫓아가는 알바트로스
이 거대한 바닷새를 뱃사람들은
자주 붙잡아 장난질을 치네.

갑판 위에 놓이기가 무섭게
서투르고 수치스러운 이 하늘의 왕은
그 크고 흰 날개를 배젓는 노처럼
가련하게 뱃사람 곁에서 질질 끌고다니네,

이 날개달린 여행자는 얼마나 어색하고 무기력한지!
전에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이
얼마나 추하고 우스꽝스러운지!
어떤 이는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괴롭히고
어떤 이는 절뚝거리며 날았던 불구자를 흉내내는구나!

시인은 폭풍과 어울리고 사수(射手)를 비웃는
이 구름의 왕자와 같아라
야유의 함성 속에 지상으로 쫓겨나
그의 크나큰 날개가 걷는 것을 방해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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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울음,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가 / 고재종          

 

 

바이런은 "그대 우는 것을 보았다. 크고 빛나는 눈물, 그대의 푸른 눈에
솟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별 때문에 우는 것인가, 슬픔 때문에 우는
것인가,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 때문에 우는 것인가. 그렇게 그대
가 우는 것을 바라보는 나는 또 얼마나 가슴 아프고, 가슴 아린가.

알프레드 뒤 뮈세는 아예 " 이 세상에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뿐이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에
있으랴. 하지만 얼마나 큰 고통과 고독의 영혼이었으면 그렇게 말할 수 있
는가. 나도 가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란 시집으로 세계적 시인의 왕좌를 누린 사람이다.
누군 그를 '저주받은 시인' 혹은 '지상의 낯선 자'라고 명명하고, 실제 그
의 이 지상에서의 삶은 고통과 빚더미와 병고의 연속이었지만, 세계 문학
전반에 걸쳐 이의 없이 현대시의 원천으로 불리는 그이다.


그의 시 중에 <알바트로스>라는 시가 있는데, 날개를 펴면 3m나 되는 새 중
의 새요, 폭풍 속을 넘나들며 사수의 화살 따위는 우습게 알던 '창공의 왕
자'인 그 새가 항해 중인 배의 돛대 주위를 떠돌다 선원들에게 붙잡혀 괴롭
힘을 당한다. 선원들은 날개에 총알이 박혀 부상을 입고 붙잡힌 이 새를 뱃
전에 묶어놓고 온갖 방법으로 괴롭힌다. 긴 날개를 질질 끌며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며 즐기기 위해 꼬챙이로 찔러보기도 하고 그 불구를 흉내 내기도 하
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배를 잡고 웃어댄다. 급기야 체격이 건장한 선원은 알
바트로스에 다가가 달궈진 파이프로 눈을 지져 멀게 해버린다.


하기 싫은 법과대학 공부를 져버리고 문학과 반항으로 터무니없는 빚을 진
보들레르를 의붓아비가 성격을 교정한답시고 친구의 캘커타행 배에 태워 버
리는 바람에 겪게 된 항해, 그곳에서의 체험을 형상화한 이 시에서 선원들에
게 붙들려 온갖 수난을 겪는 날개 꺾인 알바트로스는 결국 후에 대중들에게
박해받고 신음하는 시인 자신의 알레고리가 된다. 새 중의 새요 창공의 왕자
였던 새가 이제 천박한 뱃사람 사이에 유배당한 신세가 되니 거대한 날개는
되레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이 신음하는 알바트로스가 바로 이해 받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고뇌에 찬 시인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극단적 과학기술과 자본문명의 추구로 인해 신마저도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김춘수)이 되어 있고, 사원은 돈만 넣으면 "신의 오렌지 주스"를 주는
"십자가를 세운 자동판매기"(최승호)가 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오늘,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 가슴들은 이 울음,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가.


`살아가는 일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살아가는 데 대한 사랑 또한 없다지만 문화
예술마저도 그 작품이 판매된 숫자로 등급이 매겨지거나, 욕망과 섹스와 폭력
등 말초적 감각만이 난무하여도 문화산업적 시각 속에서는 큰 대접을 받는 속
류 상품의 시대에, 마지막 시인의 자존심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사라져버
린 현실이라면, 오늘,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 가슴들은 이 울음, 이 슬픔을 감
당할 수 있는가.


늙어가는 탓이겠지만 사막은 멀리 밖에 있지만 또한 언제나 내 안에서 넓어지
고 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내 안의 사막에는 어느덧 울음과 슬픔의 액체질 같
은 것은 바싹 말라버리고 황폐화에 대한 두려움의 모래와 먼지알갱이들만 날로
불어나고 있다. "사막은 소멸을 미리 조금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아무것도 없
는 무(無)라는 고향으로 넘어가는 단계이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울음을 넘어, 슬픔을 넘어, 이런 황폐와 소멸의 사막까지도
감당하며, 그 사막에서 "나를 찾거나 필요로 하거나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
고 나를 볼 수 있는 거울도 없는 곳이라면 나 자신마저 없어도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다"고 라인홀트 메스너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
인 고독을 펜 삼아, 그대는 아직도 고뇌에 찬 문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월간에세이 2007년 5월호 <글을 사랑하는 가슴에게> 에서 -
 

 

 

 

 

출처 : 아마조네스  
글쓴이 : 분홍돌고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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