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2 (인물,소설 등)

엔리케 왕자(3) - 서세동점의 출발점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이원택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26.

* 연세의대 해부학교실 이원택 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anatomy.yonsei.ac.kr/LWT/Portugal.htm

   의대교수님께서 쓰신 글이라는데서 다소 의외라 생각되고, '붓가는대로' 수필로서 쓰신 글입니다만,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과 역사를 보는 안목에 다소 놀랐습니다.

 

 

지난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과거의 길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주변의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흐름에 우리는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인지.

대통령 혼자만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6자회담에서 우리의 역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되,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해야만 하는 것인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요즘입니다.

 

아래 글에도 나오지만, 우리는 나라의 문을 걸어잠그고 있을 때 폴츄갈은 바다의 끝까지 가면 죽는다는 속설을 뒤엎고 세계로 나갔습니다. 우리가 최초로 만난 서양인도 폴츄갈 사람이었다는 사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o -----------------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출발점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미국에서 바라보는 대서양과는 다른 감회를 느끼게 한다.

 

대항해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의 문명은 동양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인류의 4대 발명이라는 제지술, 인쇄술, 화약, 나침반의 발명은 모두 동양에서 이루어져 서쪽으로 전파된 것이다. 미국의 과학저술가인 로버트 템플(Robert Temple)은 "중국―발견과 발명의 나라(China―Land of Discovery and Invention)"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농업, 근대적 조선(造船), 근대적 석유산업, 근대적 천문대, 근대적 음악, 십진법, 지폐, 우산, 얼레(reel), 일륜차, 다단로켓, 총, 수뢰, 독가스, 낙하산, 열기구, 사람을 태운 비행, 브랜디, 위스키, 장기(chess), 인쇄술, 심지어 증기기관의 기본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중국에서 유래했다.

 

배의 키, 나침반과 이중의 돛대가 있는 선박과 항해의 기술이 중국에서 전래되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의 위대한 발견의 대항해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콜럼버스도 아메리카로 배를 출발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유럽인들은 식민지제국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등자가 전래되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말을 타야 했을 것이고 중세의 기사들도 위험에 빠진 귀부인을 구하기 위해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사도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총포와 화약이 중국에서 전래되지 않았다면, 기사들도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사도시대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종이와 인쇄술이 전래되지 않았다면 유럽인은 오랫동안 책을 필사했을 것이다. 문자 해독 능력도 상당히 낮았을 것이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활자를 발명하지 않았다. 활자는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윌리엄 하비는 혈액 순환의 원리를 발견하지 않았다. 이 원리는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아이작 뉴튼은 운동의 제1법칙의 발견자가 아니다. 이 법칙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전력(戰力)에 있어서도 동양이 서양을 압도하였다. 4세기에는 흉노의 일파인 훈족이 서진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하였으며, 유럽은 거의 100년 동안 이들의 말발굽에 유린되었다. 13세기에는 몽골이 유럽으로 진격하여 질풍노도와 같이 러시아와 헝가리를 점령하였다. 1241년 실레지아대공 헨리 2세 지휘하에 편성된 폴란드와 게르만의 기사들은 리그니츠(Leignitz)에서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군대와 일전을 벌였으나 참패하였고 이는 유럽인들의 황인종에 대한 공포, 즉 황화(黃禍 yellow peril)의 원인이 되었다.

 

대항해시대 이전의 항해술 역시 중국이 압도하고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환관 정화(鄭和)는 1405년부터 28년간 200여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지고 승무원 수가 최대 37,000명에 달하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멀리는 동아프리카까지 7차례에 거친 원정 항해를 하고 돌아왔다.

 

그렇지만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에 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 동양으로 향하는 해상항로를 발견한 이후 점차 서양이 동양을 추월하게 되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대표되는 식민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

 

이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연 것은 바로 포르투갈인들이었다. 유럽의 서쪽 끝에 놓인 이 나라의 대부분은 대서양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는 것만이 모험심이 강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대 포르투갈왕들은 해운을 장려하였다. 그 중에서도 포르투갈 제1왕조의 마지막 왕인 페르난두왕(Don Fernando, 재위 1367∼1383)은 100톤 이상의 큰 배를 건조할 경우 건조자에게 왕실 삼림의 나무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고, 배의 건조를 위한 수입 원자재에 관세를 면제하였으며, 외국에서 건조된 100톤 이상의 배를 수입할 경우에도 세금을 면제하였다. 배의 건조자나 구매자들은 병역과 세금을 면제하였고, 첫 번째 항해에서 수출하는 물품에는 세금을 붙이지 않았으며, 첫 번째 회항에서 수입한 물건에 대해서는 관세를 반감해주었다. 또한 선박이 난파되거나 적에게 강탈되었을 때 선주에게 보상을 해주는 해상보험제도도 실시하는 등 해운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대항해시대를 준비한 핵심은 제2왕조 주앙 I세(Joao I, 재위 1385∼1433)의 셋째 아들로 항해왕자로 불리우는 엔리케 왕자(Henrique o Navegador 1394-1460)였다. 엔리케 왕자는 항해학교를 세우고 지도제작자를 불러들였으며 조선소를 만들어 선박을 개량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해를 준비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지브럴터(Gibraltar) 해협 바로 건너편애 있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요새 세우타(Ceuta) 공략에 참가한 후 포르투갈로 돌아와 대서양을 돌아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하려고 준비하였다. 아직 엔리케 왕자가 왜 이러한 탐험을 시작하였는지 그 정확한 의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종교적, 경제적 요인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심을 그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림 1.

그림 1. 포르투갈 리스본(Lisboa) 항구에 세워진 발견의 탑(Padrao dos Descobrimentos).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항해왕자 엔리케이다.

 

당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축출되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왕들은 카톨릭왕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왕들이었다. 아프리카에 있는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대륙의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에 자리잡고 있다는 전설의 가톨릭 국가인 프레스터 요한의 나라와 동맹하여 이슬람을 협공하고자 하는 종교적 욕망이 있었다.

 

또한 육식을 주로 하던 유럽인들에게 후추 등 향신료(香辛料)는 필수품이었으나 인도 남부와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후추의 무역은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무게로 따지면 금값보다도 비쌌던 후추를 직접 생산지에서 구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포르투갈군이 세우타를 점령하기 전 세우타는 향신료 교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였지만 기독교 도시가 되자 이슬람 대상(隊商)은 다시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랍인들이 아닌 원산지의 상인들과 직접 교역하고 싶었을 것이다.

 

거대한 몽골제국과의 접촉이 있은 후 50여년이 지난 1298년 출판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서구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던 서양인들에게 더 발달하고 부유한 제국에 대한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이탈리아풍의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책은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었고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남아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형인 페드루(Pedro) 왕자는 1426년 무렵 베네치아를 방문하였는데 이 때 동방견문록의 사본과 마르코 폴로 스스로가 그렸다는 지도가 그에게 증정되었다고 한다. 동방의 부유한 미지의 나라에 가보겠다는 욕망도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하나의 동인(動因)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항해왕자 엔리케의 위대한 점은 이를 시스템에 의해 조직적으로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고 싶은 대담하고 정열적인 이상을 지닌 특출한 인물인 동시에 금욕주의적인 은둔자 기질을 함께 갖춘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우타 공략 이후 원정항해에는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고 죽을 때에도 고행 수도자용인 말털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에는 거의 버려져 있는 포르투갈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사그레스(Sagres)에 항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으고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항해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기독교 지리학자들에 의해 그려진 조잡한 지도를 버리고 그 대신 훈련된 항해자들이 실제 답사해서 그린 해도를 주의 깊게 하나 하나 맞추어서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였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도제작자로 스페인 카탈루니아 지방의 지도를 제작한 유태인 아브라함 크레스케스(Abraham Cresques)의 아들인 자푸다[예후다] 크레스케스(Jafuda Cresques)를 스페인의 마요르카(Majorca)섬에서 사그레스로 불러들였다. 마요르카섬은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선생이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그림 2. 항해왕자 엔리케가 대양 항해를 준비하던 사그레다곶.

그림 2. 항해왕자 엔리케가 대양 항해를 준비하던 사그레스곶(Cabo Sagres).

엔리케 왕자는 그가 훈련시킨 뱃사람들에게 정확한 항해일지와 해도를 작성하고 해안에서 본 모든 것들을 반드시 기록하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사그레스에는 포르투갈인 이외에도 무어인, 아라비아인, 이탈리아인, 멀리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선원, 여행자,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지도 제작은 새로운 지식을 왕성하게 흡수하는 과학의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또한 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아직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던 항해용 나침반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고,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항해용 아스트롤라베(astrolabe) 등 새로운 항해기구가 제작되었다. 또한 탐험에 필요한 선박을 개량하여 삼각의 돛이 있는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난 카라벨(caravel)을 제작하였다. 콜럼버스의 세 척의 배도 역시 모두 카라벨선이었다.

 

항해왕자 엔리케는 항해에 관한 서적과 지도, 지도제작자, 기구제작자, 나침반 제작자, 선박 건조자, 목공 등과 뛰어난 선장, 선원, 조타수를 훈련시켜 항해를 계획하고 발견을 고무하였고, 특히 원정 결과를 분석하여 새로운 항해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항해의 분석에는 탐험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 일반 선원과 선박의 일꾼까지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항해술은 중세와 결별하고 근대적인 탐험사업의 핵심이 되었다. 엔리케 왕자는 비록 포르투갈의 국왕은 아니었지만 국민들을 함께 결합시키고 모든 자원들을 함께 묶어 방향을 제시해주는 진정한 지도자가 되었다.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Joao Goncalves Zarco)가 인솔한 엔리케 왕자의 탐험대는 1419년 폭풍에 밀려 마데이라(Madeira) 제도(諸島)의 포르투 산투(Porto Santo) 섬에 도착하였고 1427년에는 디오고 디 실베스(Diogo de Silves)가 이끄는 엔리케 왕자의 탐험대가 아조레스(Azores) 제도에 기착했다. 이 섬들은 이미 일부 지도에는 나와 있었지만 이들에 의해 정확한 항로가 알려지게 되었고 곧 식민과 개발이 시작되었다.

 

엔리케 왕자의 탐험에서 가장 어려웠던 곳은 아프리카 북서부 카나리아 제도 남쪽에 있던 보자도르곶(Cabo Bojador)이었다. 보자도르곶 주위의 바다에는 위험한 암초들이 많았고, 육지에서 5 km 떨어진 곳에서도 깊이가 1.8 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얕았으며, 물결이 고르지 못했지만 항해에 익숙한 포르투갈 선원들이 통과하기에 그다지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곶은 예로부터 땅의 끝’이라고 불리운 곳으로 보자도르곶 바깥의 바다는 뜨거운 수증기가 치솟고 있고, 사람 뿐 아니라 물이나 나무나 풀조차도 없으며, 물살이 빨라서 이 곶을 넘어간 배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고 있던 공포의 장벽이었고 심리적인 저지선이었다.

 

왕자는 이 곶을 넘어 항해하기 위해 1424년에서 1434년 사이에 14회에 걸친 원정대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뿐이었다. 1434년에 와서야 길 에아네스(Gil Eanes)가 이끄는 탐험대가 일단 보자도르곶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참을 항해한 후 남쪽으로 키를 돌려 결국 이 곶을 통과하였다.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 대한 탐험이 계속되었고 1441년에는 블랑코곶(Cabo Blanco)을 1445년에는 아프리카의 가정 서쪽에 위치한 베르데곶(Cabo Verde)을 통과하였다.

 

1443년에는 포르투갈왕령으로 보자도르곶 이남의 항해독점권이 엔리케왕자에게 부여되어 여기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왕자의 허가가 있어야 되고 세금도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엔리케 왕자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게 청하여 앞으로 인도까지의 구간과 인도에서 발견된 모든 토지를 포르투갈령으로 한다는 내락을 받았다. 1444년에는 아프리카인 노예가 등장하였으며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457년에는 베르데(Verde)제도가 발견되었고 이후 세네갈강, 감비아강, 시에라리온이 발견되어, 1460년 엔리케 왕자가 서거하였을 때에는 보자도르곶 너머로 2000 km가 넘는 아프리카 서해안이 발견, 답사되었다.

 

 

엔리케 왕자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출을 조직적으로 시스템을 통해 준비했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도 탐험은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죽은 후에 와서 결실을 맺었다. 1487년에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s, 1450?∼1500)는 아프리카를 계속 남하하다가 격렬한 폭풍우에 휘말렸다. 폭풍우가 가라앉은 후 육지를 찾아 동쪽으로 선수를 돌렸으나 육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과감히 북쪽으로 항해했을 때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였고 마침내 해안선이 북쪽을 향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여 드디어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착한 것을 알게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프리카 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는데 폭풍 때문에 가는 길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이유로 폭풍의 곶(Cabo Tormentoso)이라고 이름지었지만 .귀환한 그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불길하다고 여기고, 희망봉(Cabo da Boa Esperanza)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인도 항로를 찾는 희망을 북돋운 곶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1492년, 이 해는 조선 건국 후 100년 후이며 임진왜란 100년 전으로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이며 포르투갈에서 선원으로 일하던 콜럼부스(1446?∼1506)는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에 갈 수 있다는 계획을 1848년에 포르투갈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에스파니아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어 바하마 군도의 과나아니(Guanahani)섬에 도착함으로써 신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림 3.

그림 3.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1524)의 초상.

신대륙의 발견에 따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분쟁이 생기게 되자 1493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재위 1492~1503년)는 아조레스 제도의 서쪽(서경 약 30°)을 경계선으로 그것보다 동쪽의 반구(동경 약 150°까지)를 포르투갈, 서쪽의 반구를 에스파냐의 세력 범위로 하는 교황 경계선을 제안하였다. 다음 해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has)’에서는 교황 경계선을 약 1600 km 서쪽으로 옮겨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 양국이 합의하였다.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을 지나고 1498년에는 드디어 인도의 켈리컷에 도달하였다. 괴혈병과 폭풍에 시달려 애초 170여명, 4척으로 구성되었던 탐사대 중 리스본에 귀환할 때는 탐사대원 55명과 배 2척만이 남아 있었다. 귀환한 해는 1499년으로 출발해서 약 26개월 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500년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 1467?∼1520년)은 희망봉의 발견자인 디아스와 함께 바스코 다 가마와 다른 항로를 찾아 인도로의 왕복을 시작하였다. 대서양을 보다 서쪽으로 나아간 그들은 브라질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되돌아온 희망봉 부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디아스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카브랄은 인도로의 왕복을 마치고 1501년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배에는 다량의 향료 도자기 생강 향목 진주 다이아몬드 루비 등이 실려 있었다. 이로부터 후추, 인도 정향, 계피, 생강, 담배, 카카오, 금, 비단, 카페트 등의 생산물이 리스본에 도달하게 되어 포르투갈은 동양과의 교역 분야에서 베네치아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어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는 '행운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꿈이 기대 이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와 인도의 고아에 무역 기지를 설치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말레이반도의 요지인 말라카를 1511년에 점령하고 1557년에는 중국의 마카오에 무역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동양 무역로의 요소에 무역 거점들을 마련하여 동양 무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포르투갈이 전해준 조총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1543년 2명의 포르투갈인이 큐슈(九州) 남쪽에 있는 섬인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하였고 이들이 갖고 있던 총의 위력에 놀란 이 지방의 영주 타네가시마 도키다카(種子島時堯)는 은 8000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두 자루의 총을 샀으며 이들에게서 철포(鐵砲), 즉 조총(鳥銃)의 제조방법과 화약의 배합 방법, 그리고 사격술을 전수받았다. 곧 타네가시마에서 철포의 제조에 성공하였고, 1549년에는 타네가시마 바로 북쪽에 있는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가 카지키(加治木)성 공략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하였다.

 

그림 4.
그림 4.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명작 카게무샤(影武者).

그렇지만 이 철포를 이용해서 거의 일본의 중심부를 통일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가 20세이던 1553년, 즉 총이 전해진 바로 10년후 노부나가에게는 철포 5백정으로 무장한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우고 「후린카잔(風林火山)」―빠르기는 바람과 같고 잔잔하기는 숲과 같으며 공격하기는 불길과 같고 움직이지 않기는 산과 같다―의 기치 아래 빼어난 전술을 자랑하는 명장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에 의해 조련된 대부대를, 3000정의 철포라는 신병기로 무장된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이 패배시킨 나가시노(長篠) 전투는 비록 신켄 사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 영화계에서 신에 버금갈 정도로 추앙되고 있는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카게무샤(影武者)」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거의 일본 통일을 앞둔 1582년에 그의 부장이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 의해 혼노지(本能寺)에서 살해당하고 결국 통일은 평민 출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돌아가게 된다. 히데요시는 철포 부대의 위력을 믿고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나라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에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소오 요시도시(宗義智)가 우리 나라 정부에 철포 2점을 진상(進上)했지만, 평화로운 세월을 구가하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중요한 무기로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서 초기에 조선이 히데요시의 군대에 밀린 것은 철포, 즉 조총을 활용한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총은 항왜(降倭)라고 불리웠던 투항한 일본인에게서부터 조선으로 전수되었다. 특히 한반도로부터 최고의 제철기술자들이 이주했었고 전국시대 철포부대로 이름을 떨쳤던 기슈(紀州) 사이가(雜賀)의 한 철포대장이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투항, 귀화한 사야가(沙也可), 즉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주장이 고사카 지로(神坂次郞)의 바다의 가야금(海の 伽倻琴)이라는 역사소설로 태어났다. 선조(宣祖)는 조총을 제작하는데 적극 힘썼고 이순신(李舜臣), 김시민(金時敏), 김성일(金誠一) 등이 이를 만들어 전투에 사용하였다. 이후 계속 전란을 거치면서 좀 더 개량된 조총이 만들어졌다. 효종 6년(1655년)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Hamel)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훈련도감에서 신무기 기술을 전수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조총이 많이 생산되고 조총부대가 조직되었다. 1655년에는 국경지역에 조총 6,499자루와 5,049명의 포수들이 배치되어 군비(軍備)가 현저히 강화되었다. 효종 5년(1654년)과 효종 9년(1658년)에 청(淸)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1·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에서 올린 전과는 당시 잘 훈련된 조총 부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림 5.
그림 5. 임진왜란 당시의 철포(鐵砲), 즉 조총(鳥銃).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조선 해군이 일본의 해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뛰어난 통솔력과 전술 운용에도 있었겠지만 사실 화기가 우세하였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고려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화약과 화기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된 후 개량이 거듭되었다. 고려말 우왕 9년(1383년) 정지(鄭地) 장군은 전함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에서 적선 120척을 격멸했는데 이는 탑재 함포를 가지고 해상에서 적함을 격멸한 것으로 최초의 함포에 의한 포격전으로 세계해전사에서도 최초라 할만큼 의의가 크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특히 세종의 노력에 의해 사거리가 1000보 이상인 화기가 개발되었다. 조총은 사정거리가 150 m, 실제로는 50 m 정도에서 운용하였으므로 해전에서는 사정거리가 800보에서 1500보에 이르는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총통(銃筒)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 총통에는 진천뢰(震天雷)라는 폭발형 포탄, 여러 발의 화살, 수백 발의 수마석(水磨石; 물에 침식되어 둥글게 된 작은 돌), 장군전(將軍箭), 대전(大箭) 등의 대형 화살을 장착하여 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측 기록에도 조선의 화살은 직경이 한자(1尺)나 되어 우리 배(일본전함)의 돛대가 한방에 부려지는 등 질 수밖에 없다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최초로 만난 서양인도 포르투갈인이었다.

 

포르투갈의 배들은 동양의 바다를 끊임없이 항해하였고 그 중에는 난파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한 배도 있었다. 그 중 최초의 기록은 도밍구스 몬테이루(Domingos Monteiro)의 「극동지역의 귀족들(Fidalgos in the Far-East: 1550-1770, The Hague 1943)」에 나오며 1577년 "극심한 폭풍우로 인해 마카오와 일본을 왕래하는 배가 뱃길을 이탈하게 되어 한국의 해안까지 오게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사람이 우리 나라에 최초로 다녀간 서양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이순신을 참형에서 구한 상소를 올린 것으로 잘 알려진 정탁(鄭琢)의 약포집(藥圃集)에 제주도 남쪽에 난파한 마리이(馬里伊)라는 서양인을 1582년 명나라로 사행(使行)하는 길에 데려갔다는 내용이 있으며, 이 마리이란 마링예이루(Marinheiro)란 포르투갈 이름의 앞 음절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사람은 아마도 성 세바스티앙 정크선의 선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표류한 서양인으로 알려진 화란인 얀 베르테브레(Jan Janse Wertevre), 즉 박연(朴燕)이 표착한 1627년(인조 5년)보다 무려 35년이나 빠른 기록이다.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 신부는 임진왜란 중 천주교 신도였던 왜장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초청으로 1593년 12월 27일 지금의 진해 근처의 웅천왜성에 도착하여 조선 땅을 밟게 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 이전 1571년에 포르투갈 출신 가스파르 빌렐라르(Gaspar Vilelar) 신부는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한 바 있지만 실패로 끝났다. 1594년 예수회 연례보고서(年例報告書)에 의하면 세스페데스의 방한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1년에 걸친 그의 활동 중 조선인을 선교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포로로 잡혀 온 아이를 일본의 신학교로 데려가 비센테(Vicente)라는 세례명을 주었으며, 비센테는 1614년에 후안 바우티스타 솔라 신부와 함께 북경으로 가서 북쪽의 국경선을 통하여 조선 땅으로 들어가려고 4년 동안 머무르면서 국경을 넘어갈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일본에서 순교하고 만다. 비센테 외에도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갔는데, 그 중에서 천주교 신자가 된 이들이 많았다. 그 중 코니시 유키나카의 양녀가 된 황도옥(黃桃玉) 즉 "오다 줄리아"는 일본 천주교회에서 큰 추앙을 받고 있다. 화가 루벤스의 초상화 모델로 알려진 유럽 최초의 한국인 안토니오 코리아 역시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 나가사키에서 이탈리아 상인에게 팔려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고 고아를 거쳐 로마로 갔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그 아버지가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을 지낸 귀족 출신의 신부였다고 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 신부는 일본에서 선교 사역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활약에 대해 기술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사(Historia de Japam)라는 저술이 나왔다. 이 중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다. 이는 1668년 발간된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의 표류기보다 70년 이상 빠른 자료로 서양인이 남긴 최초의 한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프로이스에 의하면 조선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많은 쌀, 밀과 과일들, 무한한 양의 꿀, 약간의 비단, 많은 면화와 아마를 생산하고 있고, 많은 수의 말과 소, 좋은 조롱말, 나귀와 호랑이, 그리고 다른 다양한 동물들이 있다. 수공품은 완벽하고 끝처리를 아주 잘하여 좋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사람은 하얗고 명랑하며 대식가들이다. 힘이 세며 활과 화살에 매우 능란한데 활은 터키의 활처럼 작으며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 선박들은 강하고 크며 위로 뚜껑이 있다. 화약솥과 화기들을 사용하며 쇠로 만든 포가 있는데 둥근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거의 남자의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 모양의 나무에 물고기의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서 집어넣는데, 부딪히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그 밖의 무기들은 약하며, 특히 칼은 짧고 얼마 못가며, 약간의 소총을 개머리판 없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림 6.

그림 6.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 신부의 서간집 (1591-1592).

 

 

 

 

 

 

 

 

 

 

 

 

 

배수진으로 유명한 신립의 충주 달천 전투에 대한 전투 이야기도 나오며 여기에서 잡힌 용감한 장수에 대한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조선인들의 장수 중 하나인 말을 타고 온 매우 중요한 사람이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를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그 장수는 이를 명예 문제로 여겨 석방에 동의하지 않았고 일본인들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장수는 목을 내보이며 머리를 자르라고 손짓을 하기만 하여서 결국 그렇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 저술은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조선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빠진 요약본만이 보고되었고 책을 완성한지 거의 400년 후인 20세기에 와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부 한국 관련 내용들은 영국의 리처드 해클루트(Richard Hakluyt, 1552-1616)가 발췌, 영역해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주요항해기(The Principal Naviagations)’재판본(1598-1600)에 수록하여 한국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598년(선조 31년)의 실록과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는 포르투갈의 병사들이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 합류하여 특수 잠수부로서 일본 선단을 기습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시 포르투갈 병사들의 참여는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상주할 수 있도록 인가한 1557년 이후로 중국과의 밀접하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추측된다.

 

그림 7.

그림 7.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의 일부분. 그림 왼쪽 끝에서 중앙에 수레를 타고 뻗친 머리 모양을 한 사람들이 포르투갈의 병사들이다. 다른 병사들의 이목구비는 그려지지 않았으나 포르투갈 병사들의 이목구비는 뚜렷하게 그려져 이들의 인상이 화공에게 뚜렷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준다.

 

 

 

 

 

 

 

 

 

 

 

 

 

 

 

 

 

 

1604년(선조 37년)에는 주앙 멘데스(Joao Mendes)라는 포르투갈 상인이 해전에서 일본인, 중국인 등 49명의 선원과 함께 포로가 되어 4개월간 붙잡혀 있다가 중국으로 귀환되었다는 기록이 조선 국경 방위 기록인 비변사편(備邊司編) 등록유초(謄錄類抄)에 실려 있다.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료 역시 포르투갈 출신의 로드리게스(Joao Rodrigues, 1561-1634, 陸若漢) 신부에 의해 처음 기록되었다. 는 16세에 불과한 1577년 일본에 도착하여 예수회 신부로 교육을 받았으며 어린 나이에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역을 하기까지 하였으나 1610년 일본에서 추방되어 마카오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교회사를 집필하였는데 여기에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 풍습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그는 한국을 동시대 국가명인 조선이라 하지 않고 고려에서 유래된 코레(Core)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일본인들은 원래 중국과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으며 일본 주고쿠(中國) 지역의 일본 귀족들이 과거 백제의 후손이고, 1549년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 신부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요시타카 오우치는 백제 후손의 7번째 계승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접촉하기 전부터 이미 한국과 교류했고 한국을 통해 한문 등 한층 발전된 중국 문화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한문은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285년 혹은 290년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소개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외에도 한국은 일본에 나무껍질을 이용해 종이를 제조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는 등 일본 문화 발전에서 중요한 전달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한반도는 전체가 8도로 나뉘어 있는데, 일본인들이 외국인을 친절히 대해주고 이들을 수용하는 데 반해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을 경멸하며 외국인들이 자신의 왕국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기자조선설을 언급하고 있고 이때부터 한반도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한일간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소개하기까지도 하였다. 로드리게스는 1231년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 1279년과 1280년 약 20만명의 군사와 4000척의 함대로 일본을 공격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국이 한때 쓰시마(對馬島)를 통치했으나 지금은 일본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 섬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의 교역이 이뤄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일본의 동식물을 설명하면서, 일본에는 원래 노새가 없었는데 최근 한국과의 전쟁(임진왜란)을 통해서 이들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교회사는 불완전하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국 문화와 역사를 언급한 유럽 최초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68년 하멜표류기가 발행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의 문화를 가장 많이 취급한 서적이다.

 

1630년(인조 8년)에는 진위사(鎭慰使)로 파견되어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던 정두원(鄭斗源)과 로드리게스 신부와의 만남이 산동(山東)의 등주(登州)에서 이루어졌다. 이 만남이 서양과 조선의 지식인이 처음 만나 의견을 교환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만남에서 로드리게스는 조선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톨릭 포교의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정두원은 서방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이들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깊은 호감과 존경심을 지니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정두원은 1631년 6월 중국에서 돌아왔으며, 로드리게스가 준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 서양의 기계와 마테오리치의 천문서(天文書), 직방외기(職方外紀),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천문도(天文圖),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 등의 서적을 인조에게 바쳤다. 인조는 특히 천리경과 서적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로드리게스가 어떤 인물인지도 물었다. 이에 정두원은 로드리게스를 도를 터득한 인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로드리게스는 로마로 보낸 서간문(1633년 2월5일자)에서 정두원과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조선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위대한 왕국이라고 평하고 성서,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의 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와 기타 과학적 자료들을 한반도에서 온 대사를 통해 인조에게 전달했으며 대사들은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알게 돼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대사로부터 매우 훌륭한 선물을 받았다고 기록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정두원은 로드리게스로부터 당시까지 대부분 중국에서 구입하던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굽는 법을 배워 이를 전국에 보급하였다. 이로부터 2년 후인 1633년 경상병사 박상은 앞으로 화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인조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일본을 통해서 빵(Po), 사분(Sabo 비누), 덴뿌라(tempero), 카스테라(castella)와 같은 포르투갈 단어가 우리말 어휘에 남게 되었으며, 고추, 담배 등 아메리카 원산의 식물들도 유입되었다. 포르투갈을 여행할 때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유명한 파티마(Fatima) 근처의 한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당의 빵이 맛이 있어 영어로 브레드를 더 달라고 했었는데 종업원이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식탁의 빵을 손으로 가리켰더니, 아 '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브레드 대신에 빵이라고 했으면 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투갈에서 온 단어 빵을 실감하는 경험이었다.


대양으로 나간 포르투갈, 문을 걸어 잠근 조선

 

포르투갈은 면적이 92,389 km2로 남한 면적의 93%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준비하여 대항해시대를 주도했으며, 바다를 발판으로 큰 도약을 이루어 지구의 반에 진출하였다. 신은 포르투갈이란 작은 땅덩어리를 요람으로 주셨지만 무덤으로는 전세계를 주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반면 조선은 쇄국을 국가의 정책으로 삼았다. 조선왕조는 외국과 왕성한 교역통상을 전개한 고려와는 달리 건국 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와 폐쇄적인 사대교란관계를 유지하였다.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과 신라방으로 상징되는 해양 진출의 시대와는 정말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국가 명운이 달린 위기를 겪고도 쇄국을 고집했던 조선은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당시 동양에 진출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자기(瓷器)에 매료되었다. 이들은 당시 경덕진(景德鎭)에서 생산되는 거울처럼 밝고,옥처럼 희며,종이처럼 얇고,악기와 같은 소리를 낸다는(明如鏡 白如玉 薄如紙 聲如響) 자기를 대량으로 수입하였다. 리스본은 당시 자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자기는 금과 맞먹는 값으로 팔려 나갔다. 그렇지만 명청 교체기의 전란 상황에서 중국 자기의 생산은 격감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유럽으로 일본에서 만든 도자기가 수출되었다.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우리 나라뿐이었다. 이 자기 기술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기에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도자사가(陶瓷史家)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림 8.

그림 8. 일본의 국보.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 조선의 막사발이라고 추측된다.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전란으로 황폐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다도(茶道)에 몰입하기도 했다. 다도를 위해서는 좋은 다기(茶器)가 필요하였고 아직 자기가 생산되지 않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자기가 귀하고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다도의 양식을 확립해가던 센리큐(千利休)를 초청하여 다도의 마음가짐을 받아들였다. 센리큐는 다도가 추구하는 미의식, 즉 고요하고 차분한 가운데 느끼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멋으로 생각할 수 있는 와비(わび)의 발견과 양식화에 노력하여 다도를 확립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에는 경덕진의 세련된 자기가 아니라 조선 도공이 만들어낸 투박하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막사발이 어울렸다.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은 바로 거친 물레자국이 보이는 투박한 모양과, 늙은 괴목의 등껍질을 연상시키는 갈라 터진 유약(釉藥)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조선 도공의 작품이었다.

 

임진왜란시 왜장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조선 백자의 가마터를 지나면서 많은 도공들을 강제로 납치하였다. 그 중에는 일본 도자기의 시조, 즉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는 이참평(李參平, 이삼평), 사츠마야키(薩摩燒)로 유명한 심수관(沈壽官)의 선조 심당길(沈當吉), 하기(萩)의 이작광(李勺光)과 이경(李敬) 형제가 있었다.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참평은 히젠(肥前)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 의해 현재의 사가현(佐賀縣)에 끌려왔다. 1616년 아리타(有田) 부근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白土)의 백자광(白磁鑛)을 발견하여 일본 근세 도자기를 대표하는 아리타야키(有田燒)를 창시하고 일본 도자기의 아버지가 되었다. 역시 히젠 나베시마의 가신이던 고토 이에노부(後藤家信)에 의해 붙들려온 김해(金海)의 도공 김종전(金宗傳, 본명은 김태도 金泰道)과 그의 부인 백파선(百婆仙) 역시 히젠의 우치다(內田)와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만들었고 이참평과 함께 신사(스에야마신사 陶山神社)에까지 모셔졌다. 아리타의 자기는 이마리(伊万里) 항구를 통해 수출되어 서양에서는 이마리 자기(Imari wares)로 알려지게 되었다.

 

심수관의 선조인 심당길(沈當吉)과 박평의(朴平義) 등 도공 43명은 정유재란이 끝나던 1598년 음력 8월15일, 남원(南原)성이 함락된 날, 사츠마(薩摩)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포로가 된다. 이순신의 조선해군을 피하고 풍랑을 만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 사츠마, 현재의 가고시마(鹿兒島)의 구시키노(串木野)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미야마(美山)인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정착하여 흑백의 구로사츠마(黑薩摩)와 백도(白陶)를 만들어낸다. 자존심이 높았던 이들 도공들은 우리의 성씨를 지키고 몇백년을 살았고 옥산궁(玉山宮)이란 단군(檀君)을 모시는 사당도 지었고 매년 추석에 제사를 올렸다 한다. 현재 사츠마야키(薩摩燒)를 지키고 있는 심수관가는 13대째 내려오며 아직도 심씨를 지키고 있고 명예일본총영사로 한국인 제자를 키워내고 있기도 하다.

 

그림 9.
그림 9. 도공의 후예였던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박무덕(朴茂德).

전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지만, 이 마을 출신의 도고시게노리(東鄕茂德)는 주미 대사를 거쳐 2차 대전 중 두 번이나 일본의 외무대신을 지냈고,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3국 동맹에 반대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군부에 대항하여 화평공작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그는 사츠마 도공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 이름은 박무덕(朴茂德)이었다.

 

경남 진주 일원 출신으로 생각되는 이작광(李勺光)과 이경(李敬)이라는 도공 명인 형제는 죠슈(長州)의 번주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에 의해 현재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萩)에 끌려와 도자기 굽는 가마를 열었다. 이들은 조선식 막사발을 다완으로 만들었으며 하기야키(萩燒)라는 독특한 자기를 구워내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의 어용가마로서 보호되기도 했다. 이경은 모리 번주로부터 사카고라이자에몬(坂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그의 후손인 12대 사카고라이자에몬이 하기야키의 전통을 잇는 명인으로서 지금도 유일하게 한국식의 옛 가마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모리 번주가 내린 이름에 '고려'가 들어가 있는 것이 이들 가문의 출신을 말해준다.

 

이마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자기의 서양 수출은 일본의 근대 자본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일본 명치유신(明治維新) 수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4대 번인 사츠마((薩摩), 죠슈(長州), 히젠(肥前), 토사(土佐)의 네 번 중 사츠마, 죠슈, 히젠의 세 번이 모두 명도자기의 산지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조선은 이 둘도 없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은 대양(大洋)으로 통하는 바다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주변의 정세에 어두웠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전란을 거울삼아 대비를 철저히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조선은 만주족 청나라에 유린당하고 결국 인조가 항복하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겪게 된다.

 

 

인체해부에 대한 태도로 본 한일의 차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전쟁의 시기에 우리 나라 최초로 시체를 해부한 기록이 나온다. 시체 해부가 절대적인 금기에 속하던 조선 중기에 문신 학송(鶴松) 전유형(全有亨, 1566-1624, 명종 21년-인조 2년)이 세 번이나 시체를 해부하여 5장 6부의 형태와 위치를 확인하고 오장도(五臟圖)를 작성했고 이 지식을 자기의 의학 이론에 적용하여 많은 질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있다.

 

이는 야마와키 토요(山脇東洋, 1705-1762)가 일본에서 최초로 인체를 해부한 1757년보다 150년 정도나 앞선 시기이지만, 그 후 19세기 말의 개화기까지 해부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이익은 전유형이 시체를 해부한 것이 화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 때 반란군과 내응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

 

"참판 전유형은 평소 의학에 밝았고 책을 펴내 후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갑자기 이괄의 난 때 참수를 당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임진년 왜란 때 길을 다니면서 시체 세 구를 해부한 까닭에 의술이 정통해졌지만 이처럼 비명횡사하게된 연유는 또한 시체를 해부한 재앙 때문이라고 한다."

 

전유형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왜군 방어책 10여 조, 민심수습 방안 등을 올렸고 1594년(선조 27년)에는 청안 현감이 되어 왜적의 격퇴에 힘썼다. 1603년 붕당타파와 세자보호 등에 관한 시사(時事) 15조를 상소했고 1605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감찰이 되었으며, 광해군 때에 함흥판관·광주목사(廣州牧使)·형조참판을 지냈고, 임취정(任就正)과 함께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문안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미의 탕감을 요청했고 1623년(인조 1년) 이유림(李有林)의 옥사 때 그를 두둔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반란군과 내응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4년 후 신원이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실 전유형의 활동했던 동시대에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지은 허준(許浚, 1539-1615)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의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한 것도 선조의 당부와 보살핌과 후원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성호사설의 기록을 보면 당시 사람들도 시체 해부를 의술 발달에 필요한 방법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의술 발달에 필요했다고 해도 실제로 해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대에 실사구시의 실학이 학문의 대종이었던 시대에도 다시는 시체를 해부한 어떤 기록도 없다. 허준이 스승을 해부했다는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의 이야기는 허구에 불과하며 이를 뒷받침해 줄만한 어떤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결국 전유형의 인체 해부는 그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오장도와, 후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책도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이후 서양에서 해부가 공식적으로 시행된 것은 1315년경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몬디노 데 루치(Mondino de Luzzi)에 의해서이다. 중국은 이보다 300여년 전 송(宋)나라 때 이미 인체 해부를 하였다. 구희범 오장도(歐希範 五臟圖)는 11세기 송의 영간(靈簡)이 구희범 등 56인의 시체를 해부한 것을 토대로 그렸다고 한다. 또한 양개(楊介)는 송나라 숭녕(崇寧) 년간(1102-1106)에 처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해부한 것을 바탕으로 존진도(存眞圖)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송대 이후 해부의 전통은 단절되었으며, 청(淸)나라 때 왕청임(王淸任, 1768-1831)이 내장이 드러난 시체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과거 의학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의 의림개착(醫林改錯)이란 저술을 남긴 것이 그나마 해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전부이다.

 

그림 10.

그림 10.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펴낸 장지(藏志)의 흉복도(胸腹圖)

반면 일본에서의 사정은 달랐다. 일본에서 최초로 인체를 해부한 해는 1757년 야마와키 토요(山脇東洋, 1705-1762)에 의해서였으며 그는 이를 토대로 장지(藏志)라는 책을 펴내었다. 도요는 어려서부터 예로부터 전하는 오장육부설이 정말 옳은가를 실제 사체와 대조하여 확인해 보고자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결국 실증적인 입장에 서서 중국에서 전래된 오장육부설이 실제와 다름을 지적하고 의학은 직접적인 관찰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 후 도요의 제자였던 쿠리야마 코안(栗山孝庵)과 쿠마 겐주쿠(熊玄宿)가 1758년, 1759년에 남자와 여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였고, 1762년에는 도요가 두 번째 해부를 하였다. 또한 1769년, 1770년, 1771년, 1775년, 1776년, 1783년, 1797년, 1802년, 1861년 등 여러 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해부를 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해부만 이루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서양 해부학 책을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가 1774년 출판되었다. 이를 번역한 사람은 스기타 겐파쿠(衫田玄白, 1733-1817)와 마에노 료타쿠(前野龍澤)였고,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 카츠라가와 호슈(桂川甫周) 등이 협력하였다. 이들은 모두 당시 막부의 의관(醫官) 등 의자(醫者)들이었다. 1771년 현재의 동경인 에도(江戶)의 북쪽 사형장에서 여자 사형수의 시체가 해부되었고 이를 겐파쿠와 료타큐가 참관하였다. 이들은 독일인 쿨무스(Johann Adam Kulmus)의 "해부서판(Anatomische Tabellen, 1722)"을 화란어로 번역한 해부학 책을 갖고 있었다. 기존의 한의서와는 달리, 이 서양 해부학 책의 그림이 해부를 지켜본 결과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겐파쿠와 료타쿠는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심하여 번역을 시작하였다. 겐파쿠는 화란어를 전혀 알지 못했고 료타쿠는 약간의 화란어 지식이 있었지만 화란어 사전이 없는 상태에서 번역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3년 반이 지난 후 해체신서가 나오게 되었다.

 

이들의 작업은 제자인 오츠키 겐타쿠(大槻玄澤)에게 이어져 1826년에는 중정해체신서(中訂解體新書) 13권이 출판되었고, 지란당(芝蘭堂)이란 사립학교를 만들어 화란어를 배우는 학문이란 뜻의 난학(蘭學)이 체계적으로 교육되어 많은 난학자(蘭學者)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의학뿐만이 아니라 천문학, 역학(曆學) 물리학, 화학 등 과학은 물론 세계 지리와 서양 사정의 연구도 진전되어 근대 일본의 토대를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과학과 철학 용어들이 한자어로 번역되어 지금도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동양 삼국 중에서 일본은 가장 뒤늦게 해부를 하였지만 그 전통은 계속 이어진 반면 중국과 우리 나라는 일찍 해부를 하였으나 전통이 단절되었다. 서세동점 이전까지 우리 나라는 화포와 도자기 등 선진 기술을 갖고 있었으나 그 전통 역시 계승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차이점이 중국과 우리 나라는 침략을 당했으며, 일본은 오히려 침략을 할 수 있던 국력을 갖춘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엔리케 왕자란 걸출한 지도자 밑에서 오랫동안 준비하여 대항해시대를 주도했으며, 바다를 발판으로 큰 도약을 이루었다. 우리도 한 때 청해진을 바탕으로 해상왕국을 이루었으며, 첨성대, 금속활자, 화약과 화포, 도자기 등 과학정신과 장인정신이 결합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전통이 계승 발전되지 못할 때 발전은 정체되고 결국 다시 약소국으로 전락의 길을 밟게 된다.

 

우리 나라는 높은 교육열과 하면 된다는 의지, 세계를 놀라게 하는 근면성에 힘입어 다시 국력이 충실한 시대로 도약하고 있다. 반도체, 통신기기, 조선, 자동차 등은 규모와 기술면에서 이미 선진국을 능가하거나 적어도 동등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렇지만 최근 다시 이과 기피 현상이 나타나는 등 새로운 전통의 계승이 위협받고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는 교훈은 선진적인 기술이라도 이를 계승 발전시키지 않으면 결국 국제사회에서 자멸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

* 그 먼 옛날, 이베리아 반도에 나타난 "신라인"의 이야기도 함께 참고하세요.
--> http://blog.daum.net/soo3301/1165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