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의 전반적인 역사
< 차례 > ----------------------------------------------------------------
1. 각 나라들의 상황(14세기 전)
2. 아프리카의 탐험(14세기 초~)
3. 항해 왕자 엔리케(1394~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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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범선의 개량 - 시에라리온에 도착(1460) |
4. 희망봉의 발견(1488) - 바톨로무 디아스 (Bartholomeu Diaz;1450?~1500년)
5. 신대륙의 발견(1492) -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6. 인도 항로 개척(1498) -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1524년)
7. 동방무역의 시작(1500) -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 1467?~1520년)
8. 마젤란 해협의 발견(1520) -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
9.
최초의 세계 일주(1521) -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
수도 리스보아의 근교 열차역, 까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에서, 까스까이스행(Cascais)행 열차를 타고 두어 정거장 가서 벨렝(Belem)이라는 곳에서 내리면,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의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들을 잠시나마 느껴 볼 수 있다.
먼저..빠드라웅 두스 데스꼬브리멘뚜스(Padrao dos Descobrimentos)를 만나 볼 수 있다.
1960년에,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주역이었던 엔리케(Enrique) 왕자의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항해를 시작했다는 지금의 이 자리에 세운 발견 기념 탑이다.
범선 모양의 높이 53 미터의 거대한 탑으로 대항해에 참가했던 역사상의 많은 인물상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맨 앞 부분에 자리하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엔리케 왕자이다.
그 바로 앞 부분 광장 바닥에는 지역별로 발견 연도가 새겨진 세계지도가 색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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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 나라들의 상황은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395년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비잔틴) 제국으로 갈라졌다. 각각의 수도는 로마와 비잔틴(콘스탄티노플) 즉 현재의 이스탄불(터키)이었다. 그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여 서유럽에서는 그 후 잉글랜드(영국)ㆍ서프랑크(프랑스)ㆍ신성 로마 제국(독일)이 성립하였고, 지중해 지방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모두 이탈리아)의 두 공화국이 세력을 얻었다. 그들은 모두 크리스트 교 국가이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교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이를테면 신성 로마 제국(962~1806년)은 로마 교황이 대대로 독일 황제로 가관(加冠)한 데서 온 이름이다.
한편 마호메트(Mahomet;570~632년경)를 시조로 하는 이슬람 교도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아라비아 반도를 제압하여 이슬람(사라센)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사라센은 ‘사막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 이슬람 제국의 발전은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년)ㆍ우마이야 왕조 시대(~750년)·아바스 왕조 시대(~1258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수도는 각각 다마스쿠스(시리아)와 바그다드(이라크)였다.
이슬람 제국은 정통 칼리프 시대에는 시리아·이집트·페르시아(이란)를,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북아프리카ㆍ에스파냐ㆍ포르투갈ㆍ중앙 아시아ㆍ서북 인도를 지배하였다. 조금 앞서 말하면 칭기즈 칸의 손자 후라그(재위 1258~1265년)의 바그다드 공략에 의하여 1258년에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였는데도, 이슬람 제국의 영향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2. 동방 무역과 프레스터 존 왕 전설이 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을 부추겼다.
4세기 말 게르만 민족의 남하에서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문예 부흥)의 개시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중세 암흑 시대’라고 한다. 이슬람 왕조 시대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은 이슬람이 문화의 파괴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철학·천문학·수학·의학·지리학 분야의 그리스 어 고전 등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 전하였다. 또 그들은 아라비아 숫자에 의한 십진법 계산, 화학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 <아라비안 나이트(천일 야화)> 등을 후세에 전하였다.
북아프리카를 서쪽으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711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현재의 포르투갈 공화국과 에스파냐가 있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거기에 그라나다(현재의 에스파냐 남부) 등의 이슬람 제국을 세웠다. 그 수도 그라나다에는 알람브라 궁전 등이 만들어졌다. 이것에 대한 서유럽 쪽의 저항이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 회복 운동)이고, 그 중심이 된 것은 카스티야(에스파냐 중앙부)와 아라곤(에스파냐 동북부)이다.
15세기 초의 이베리아 반도에는 그라나다, 카스티야, 아라곤 이외에 포르투갈이 있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와 마주하는 해안의 북아프리카에는 이슬람 도시 세우타가 있었다. 이것 역시 조금 앞서 말하면 1479년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병하여 에스파냐 왕국이 성립하였고, 15세기 말에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났다.
이슬람 세력에 포위당한 동로마 제국이 서유럽의 크리스트 교 국가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에 걸쳐 8차례 이상이나 이동한 십자군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우위에 선 적은 있어도, 크리스트 교 국가는 이슬람 세력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서유럽의 크리스트 교 국가들은 이슬람 제국이 우위를 지키는 것은 섬유ㆍ향료ㆍ수탄(짐승의 뼈·피·털 등을 건류하여 만든 탄)·도자기·보석 등 동방에서 들어오는 값비싼 물건의 교역을 그들과 페르시아 그리고 제노바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12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초 유럽에서는 ‘프레스터 존 왕’이 지배하는 크리스트 교 왕국이 아라비아나 아프리카 안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을 믿고 있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에서는 프레스터 존 왕이 바로 에티오피아 황제라고 여겼다.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유럽에서는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남하하여 동방과의 교역을 생각하게 되었다.
3. 엔리케 항해 왕은 사글레스라는 거리에 항해자를 육성하는 학교를 창설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자인 엔리케(Henrique O Navegador, 영어로는 헨리) 항해 왕(1394~1460년)은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재위 1394~1460년)와 영국의 랭커스타 공주 필립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아들 두아르테, 페드로, 엔리케 중에서 막내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주앙 1세, 큰형 두아르케(재위 1433~1438년), 아폰수 5세(재위1438~1481년) 등 3명의 왕을 섬기면서 통상·식민 대신의 직책을 맡았다. 따라서 엔리케를 ‘항해 왕’이라 부르는 것은 정식으로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실질적으로 그는 왕 이상의 훌륭한 일을 충분히 해 냈다.
포르투갈은 은밀하게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도시 세우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우선 시칠리아로 보낼 외교 사절을 태운 두 척의 배를 준비하고, 도중에 기항하는 척하며 세우타 부근에서 닻을 내리고 그 방어 시설 등을 조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 삼형제의 장남인 두아르테는 전쟁의 재정을, 차남 페드로는 나라의 남쪽 절반에서, 셋째 엔리케는 북쪽 절반에서 선원 동원을 분담하였다. 더욱이 엔리케는 배을 건조하는 일도 분담하였다. 준비는 끝났고, 1415년 8월 16일 이른 아침 약 200척의 포르투갈 선박이 순식간에 세우타를 공격하여 단 하루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에 편승한 에스파냐는 나중에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병합하였으며, 포르투갈 역시 아프리카 특히 서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에 세우타에서 두 번째로 귀국한 엔리케는 포르투갈 서남단의 산비센테 곶에 있는 라고스에 정착하여 수학·천문학·지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아라비아 인들이번역한 그리스의 기하학자 에우클레이데스(Eucleides;기원전 300년경), 천문학자 에라스토테네스(Eratosthenes;기원전 284경~기원전 192년?),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2세기경) 등의 저서가 많은 참고가 되었다. 그리고 라고스 부근에 사글레스라는 이름의 거리를 만들고 요새, 관측소, 조선소 그리고 항해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는 그 곳에서 유망한 뱃길 안내인이나 선장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항해 및 관측용 기계ㆍ도구를 연구하여 제작하고, 또 여러 가지 항해 계획을 세우거나 원정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3.1 해외의 항해술을 도입하여 엔리케 항해 왕은 대형 범선의 개량을 추진하였다.
여기서 당시 사용된 항해·관측용 기계와 도구를 한데 모아 정리해 보자. 자석이 북극이나남극을 가리키는 지극성(指極性)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중국인이고, 마침내 자침이 만들어져 적어도 11세기 말에는 그것이 중국의 무역선에 장착되었다. 그러나 자침이 정확하게 극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과, 자침이 가리키는 방향과 극 방향의 차이인 편각이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그것에 주의하여 자석이 쓰이게 되었다.
북반구 위의 한 점 P에서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지구에 대하여 접선을 긋는다. 그것은 P점에서의 수평선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그 접선 위의 북쪽 방향에서의 고도각이 그 점의 위도 θ와 같게 직선을 그으면 그것은 진북(북극성의 방향)을 가리키고, 그 직선은 적도면으로의 수직선이 된다.
이 사실을 이용하여 관측점의 위도를 결정할 수 있다. 별의 수평면에서의 높이를 나타내는 각도를 고도각이라 하고, 그 고도각을 재는 기계를 고도계(아스트롤라베)라고 부른다. 초기에 사용된 항해용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금속제의 둥근 고리를 조환(弔環)으로 매단 것인데, 그 둥근 고리를 따라 각도가 기록되고 있었다. 조환에 수직인 방향이 수평 방향이고, 그 고도각은 0°이다. 둥근 고리의 중심 둘레에는 회전하는 정규(선을 긋는 제도 도구)가 달려 있다. 매달린 고도계의 정규의 아랫단에 눈금을 표시하고, 정규의 연장선상에 별이 오게 한다. 그 때 정규와 수평선이 이루는 각도가 그 별의 고도각이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북극성의 고도각은 관측점의 위도를 나타낸다. 따라서 아스트롤라베는 관측점의 위도 측정에도 사용된 것이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해시계를 만들 수도 있다. 관측점이 북반구에 있는 경우를 생각하자. 원반에 그것과 수직인 축을 만들고, 우선 그 축을 수평면상의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그 앞쪽 끝을 위도에 해당하는 각도 θ만큼 수평면에서 위로 기울인다. 조금 전의 일러스트레이션과 대응시켜 생각하면 그 축이 지구의 자전축에 평행한 선, 원판이 적도면에 평행한 면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은 적도면에 평행한 면 위를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등속도로 돌기 때문에 판 위의 시각 눈금은 등간격이 된다. 또한 북반구에서 태양은 남쪽에 있기 때문에, 태양에 의한 축의 그림자를 이용하는 시각 눈금은 판 위의 아래 절반 부분 즉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된다.
북반구의 태양은 정오에 남중한다. 즉 일반적으로 진남 방향에 온다. 또한 정오에는 수평면에서의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아진다. 따라서 예를 들어 배의 갑판(수평면)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의 그림자는 정오에는 가장 짧고 일출이나 일몰 때에 가장 길어진다. 이것을 사용하여 시각을 결정할 수 있다. 북반구에서 정오의 태양 고도는 하짓날에 가장 높고 동짓날에 가장 짧으며, 봄과 가을에는 그 중간이 된다. 그것을 이용해 계절의 순환을 결정할 수도 있다.
지구상의 점의 위치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정해진다. 엔리케 당시에도 위도의 측정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밀한 시계가 없고 전파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도는 측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떤 기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느 만큼의 거리(=거리×속도)에 있는가를 재서 지구상의 점의 위치가 정해졌다. 그래서 초기의 선원들이 사용한 시계는 모래 시계와 해시계였다. 또 바닷속에 던진 나무조각(로그)이 배의 가로 쪽을 따라 흐르는 속도를 모래 시계로 재고, 그것에 의해 배의 속도를 정하였다. 현재도 배의 속도계를 로그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의 배는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이었다. 범선의 돛에는 횡범과 종범이 있다. 배의 앞뒤(선수에서 선미) 방향으로 직각으로 펴지는 돛이 횡범(橫帆)이고, 평행으로 펴지는 돛이 종범(從帆)이다. 횡범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고, 종범은 횡풍 또는 역풍을 이용한다. 횡범 쪽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예전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을 때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맞바람으로 바뀌면 번거로워진다. 서둘러 돛을 내리고 노(oar)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리케는 어떤 바람 에서도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돛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였다. 그 결과 종범이 채택되어 그것이 대형선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중국의 범선인 정크 선 등에서는 옛날부터 사용되고 있던 돛이다. 하나의 배에 1개가 아닌 여러 개의 돛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3.2 포르투갈 범선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도착한 해에 엔리케 항해왕은 세상을 떠났다.
아프리카 북서부의 대서양에 접한 곳에 구에스파냐령 서사하라가 있고, 그 북서쪽에는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가 있다. 카나리아 제도와 거의 같은 위도의 아프리카 본토에서 약간 튀어나온 곳이 난 곶, 서사하라에서 카나리아 제도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곳이 바하도르 곶이다. 카나리아 제도 북쪽에는 마데이라 제도, 마데이라 제도 북서쪽에는 아조레스 제도가 있다. 이들 3개 제도는 예전부터 유럽인에게 알려져 있었다. 특히 카나리아 제도에는 카스티야가 진출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에스파냐령인 것이 그 흔적이다. 포르투갈이 마데이라 제도·카나리아 제도·아조레스 제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각각 1418년~1420년, 1425년, 1427~1432년경, 난 곶을 통과한 것은 1426년경이다. 지금도 마데이라주를 생산하는 마데이라와 아조레스 제도는 여전히 포르투갈령이다.
앞에서 말한 바하도르 곶은 지도에서 보아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약간 돌출된 곳으로서, 일찍이 유럽 인들이 ‘땅의 끝’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었다. ‘바하도르 곶 저쪽의 바다는 뜨거운 수증기가 치솟고 있다. 사람 하나 없고 물이나 나무도 풀조차도 없다. 바다는 얕아 육지에서 5~6km 떨어진 곳에서도 깊이가 30cm밖에 되지 않는다. 물살이 세서 그 곳을 지나는 배는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여기고 있다. 포르투갈 함대가 이 바하도르 곶, 그 남서쪽에는 있는 블랑 곶과 블랑 곶 남쪽에 있는 베르데 곶(아프리카대륙의 가장 서쪽)을 통과한 것은 각각 1434년, 1441년 그리고 1443년경이다.
어떤 곶을 통과해도 끓어오르는 바다는 없고, 나무와 녹색의 풀 그리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바하도르 곶을 통과한 함대의 우두머리는 그 후 ‘세인트 메리의 장미’ 또는 ‘부활초’라고 불리게 된 풀을 가지고 돌아와 엔리케에게 보여 주었다.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베르데 곶은 ‘녹색의 곶’이라는 의미이다. ‘땅의 끝’ 앞쪽에서 식물을 본 사람들의 놀라움이 잘 표현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함대가 베르데 곶 난바다에 있는 베르데 곶 제도(현재의 카보베르데 공화국)를 발견하고 또 시에라리온(공화국)에 도달한 1460년에 항해 왕 엔리케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뜻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여전히 시에라리온의 남동쪽에 있는 리베리아(공화국)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은 동쪽으로 향해 달리게 된다.
4. 1488년에 디아스에 의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이 발견되었다.
포르투갈 군대가 바하도르 곶을 지난 시기를 전후로 엔리케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재위1417~1431년)에게 청하여 ‘앞으로 인도까지의 구간과 인도에서 발견된 모든 토지를 포르투갈령으로 한다’는 내락을 받았다. 1493년에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재위 1492~1503년)가 아조레스 제도의 서쪽(서경 약 30°)을 경계선으로 그것보다 동쪽의 반구(동경 약 150°까지)를 포르투갈, 서쪽의 반구를 에스파냐의 세력 범위로 하는 교황 경계선을 제안하였다. 다음 해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는 교황 경계선을 약 1600km 서쪽으로 움직인 것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국이 합의하였다.
포르투갈 인들은 1471년 적도를 넘어 현재의 가나 즉 황금 해안을 황금 거래와 탐험의 기지로 삼았다. 이후 서해안을 남하하여 1484년에는 자이르(콩고) 하구를 발견하여 상륙하였다. 1487년에 3개의 석주를 배에 싣고 포르투갈을 출발한 디아스(Bartholomeu Diaz;1450?~1500년)는 나미브 사막 남단에 있는 오렌지 강 하구에 도달하여 그 곳에 최초의 석주를 세웠다. 그 후 남하한 곳에서 격렬한 폭풍우에 휘말려 약 2주일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다. 폭풍우가 가라앉았을 무렵에 이제까지의 포르투갈 배의 상식에 따라 동진하였지만 육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북진을 감행했을 때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착한 것 같음을 알게 된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여, 마침내 해안선이 북쪽을 향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을 따라 그대로 북상하자고 제안하였지만 겁이 난 선원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제2의 석주를 세우고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도중에 큰 곶을 만났는데, 폭풍 때문에 가는 길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 이름붙이고 그 곳에 제3의 석주를 세웠다. 1488년의 일이다. 귀환한 그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주앙 2세는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여기고, 그것을 ‘희망봉’이라고 이름지었다. 인도 항로를 찾는 희망을 북돋운 곶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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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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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콜롬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은 유명하다. 콜롬버스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출생, 14세부터 배를 타기 시작, 고향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일찍이 포르투갈에 건너가 결혼을 하고, 선원생활을 하던 중 1484 년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에 갈 수 있다는 계획을 포르투갈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이에 에스파니아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1492 년 이사베라 여왕의 후원을 얻어 1492 ~1504 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대서양을 왕래하였다. 콜롬버스는 산타마리아호, 니나호, 핀타호등 세 척과 78 명의 선원을 거느리고 1492 년 8 월 파로스항을 떠나 1 차 항해에 나서 2 개월여의 항해 끝에 10월12일 육지를 발견하고 상륙한 곳이, 지금의 바하마에 있는 산살바도르(San Salvador) 였다.그는 쿠바와 아이티에도 갔는데 그곳에서 산타마리아호는 좌초되어 버렸다. 11월 19일 푸에르토리코에 상륙, 그는 그가 발견한 고장을 끝내 인도 땅 인줄로 알고 "서인도"라 하며 원주민을 인도사람, 즉, "인디안"(Indian) 이라 명명했다. | ||||||
콜롬버스의 2 차 항해는 그의 flagship(기함) Mariagalante호와 16 척의 배와 선원, 군인, 이주민, 사무원, 법원판사등 1,200 명을 대동하고 식민을 목적으로 1493 년 9 월 25일 Cadiz항을 출발, 11월 3일 새로 도미니카, 자마이카, 과테말라를 발견하고는 이곳이 일본의 부근에 있는 섬으로 착각. Hispaniola에 남겨둔 그의 선원들이 인디안에 의해 살해된 것을 11월 27일 발견. Santo Domingo를 최초의 식민지로 삼고 총독이 됨.1496년 7월 31일 스페인 Cadiz항에 귀국. 1498 년 5월 30일 6척의 배와 함께 중국을 찾기위해 남쪽으로 3 차 항해하였으나, 비로소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 상륙, 그곳은 남미 북단 트리니다드, 토바코, 그라나다, 마가리타 등 이였다. 그후1502년 5월 9일 4척의 배와 선원 150명을 데리고 Cadiz항을 4 차 항해 출발, 1503년 1월 6일 오늘날 중앙아메리카 파나마를 발견 함. 그 후 귀족들과의 불화로 큰 뜻을 펴지 못한 채 실의 속에 그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으며 1505 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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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엔리케 항해 왕이 죽은 지 약 40년 후,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 항로가 개척되었다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남하하여 동방과 교역을 하고자 하는 ‘엔리케 항해 왕’의 꿈을 마침내 실현시킨 것은 가마(Vasco da Gama;1469?~1524년)이다. 그는 1497년 7월 8일에 170명의 선원과 함께 포르투갈의 도시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배의 선대는 기함 산 가브리엘 호(200톤), 산 라파엘 호(200톤), 팔리오 호(100톤)와 식량 운반선(400톤)등 모두 4척이었다. 약 1주일에 걸쳐 카나리아 제도 부근까지 남하한 곳에서 짙은 안개에 휩싸여 배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약 2주일을 헤맨 다음에 보다 남서쪽의 베르데곶 제도 부근에서 만나, 섬으로 기항하여 식량과 물을 보급받고 8월 3일 그 섬을 출발하였다.
이후 선대(船隊)는 기묘한 항로를 찾았다. 대서양을 우선 남서쪽으로 계속해서 남동쪽으로 나아간 반원형의 항로를 더듬어 브라질에서 약 1000km인 곳까지 갔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의 세력권이 된 해역 내에서 새로운 섬을 발견하는 것이 이 항해의 목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약 100일에 걸친 항해로 일행은 모두 신선한 과일과 채소 부족에서 일어나는 괴혈병에 시달렸다.
11월 4일에 간신히 세인트헬레나 만에 도착하였다. 희망봉 북쪽 약 50km에 있는 케이프타운 북쪽에 있는 만이다. 배의 동체 부분에 달라붙은 굴등을 떨어뜨리고, 찢어진 돛을 수리하고, 식량·물·땔감 등을 보급받아 출발하여 11월 22일에 희망봉을 통과하고, 그 1주일 후에 아프리카 남해안의 모셀 만에 기항하였다. 여기서 식량선을 버리고 남은 식량을 나누어 12월 말에 인도양으로 들어갔다.
인도양을 북상하면서 더반(남아프리카 공화국)·켈리마네·모잠비크(모잠비크 공화국)ㆍ몸바사ㆍ말린디(케냐 공화국)로 기항하였다. 모잠비크 부근에서 이슬람 교도와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가마 일행은 자신들이 크리스트 교도임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이슬람 교도는 가마 일행을 경계하였고, 가마 일행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방울ㆍ산호ㆍ모자ㆍ외투 등이 아무래도 빈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렵사리 인도로 가는 길을 아는 안내인을 고용하여, 그의 안내로 1498년 5월 21일 가마 일행은 마침내 인도 남서 해안의 항구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7. 포르투갈은 마누엘 1세 시대에 동방 무역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캘리컷 왕이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년)에게 보내는 ‘우리 나라에는 계수나무·정향나무·생강·후추나무가 많다. 당신 나라의 금과 은, 산호와 진홍의 직물이 우리가 원하는 물건이다’라는 의미의 자필 서신을 받은 가마 일행은, 1498년 10월 초 인도의 고아에서 아프리카로 향해 서진(西進)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풍을 만나 고전하여 1499년 1월에 모가디슈(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에 도달할 때까지 30명이 괴혈병으로 죽었다. 어쩔 수 없이 몸바사로 기항하였을 때 산 라파엘 호를 버리고, 남은 선원을 모두 산 가브리엘 호와 팔리오 호에 태우고, 희망봉을 돌아 1499년 9월 초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출발해서 약 26개월 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500년 3월 9일에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 1467?~1520년)은 희망봉의 발견자인 디아스와 함께 가마와 다른 항로를 찾아 인도로의 왕복을 시작하였다. 대서양을 보다 서쪽으로 나아간 그들은 브라질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되돌아온 희망봉 부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디아스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카브랄은 인도로의 왕복을 마치고 1501년 7월 1일경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배에는 다량의 향료ㆍ도자기ㆍ생강ㆍ향목ㆍ진주ㆍ다이아몬드ㆍ루비 등이 실려 있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어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는 ‘행운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엔리케 항해 왕의 꿈이 멋진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8. 마젤란 해협 발견(1520)으로 인해 세계사가 바뀌어졌다.
그 옛날 배들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나들려면 남극반도와 남미대륙의 남단 사이 드레이크 해협을 통하지 않고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엉성한 목선이 돛을 올려 바람을 타고 남극의 폭풍이 몰아치고 해류가 계곡의 급류처럼 빠른 이 거친 해협을 빠져나가는 건 목숨을 파도에 저당 잡히는 일이었다. 1520년 겁없는 모험가 마젤란은 대선단을 이끌고 대서양 연안으로 내려오다 드레이크 해협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 날 따라 파도는 미친 듯이 날뛰고 바람은 돛을 부러뜨릴 듯이 맹렬히 불어와 남미 대륙 끝에 널에 있는 섬 사이 안전한 곳으로 선단을 몰고 갔다.
강풍과 파도가 좀 누구러지면 드레이크 해협을 건너겠다고 하구로 들어가 대피했다. 강이라고 생각했던 그 물줄기는 넓어졌다 좁아지며 계속 이어졌다. 자꾸 올라가던 마젤란 선단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태평양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사나운 드레이크 해협이 아닌, 좁지만 잔잔하고 안전한 새로운 해협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세계사를 바꾼, 마젤란 해협"인 것이다. 그 이후 수많은 배들이 마음놓고 마젤란 해협을 지나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나 다녔다.
마젤란 해협가의 작은 마을 푼타아레나스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 낮이고 밤이고 흥청 거렸다. 상점들이 들어서고, 술집은 목마른 뱃사람들로 왁자지껄하고, 바람따라 굴러 온 여인들은 훌럴훌렁 치마를 벗었다.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1914년 남북미를 잇는 잘룩한 파나마 운하가 뚫리자, 남미대륙 아랫쪽 끝을 돌아 가던 뱃길은 하루 아침에 끊겨 버렸다. 번창한 항구 푼타 아레나스도 마젤란 해협과 운명을 같이했다. 늙은 퇴기 주막집에 발길 끊어지듯 푼타 아레나스는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두침침한 납 빛깔의 바다처럼 푼타 아레나스는 한적한 포구로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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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만곡진 해협이다. 전장 583㎞, 폭은 3㎞로 부터 서쪽과 동쪽에 이르기까지 35~40㎞정도로 다양하다.
9.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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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은 원래 포르투갈의 귀족이었다. 그는 젊어서 인도에 건너가 공도 세웠으나 왕실의 냉대에 실망하여 1517 년 에스파니아로 갔다. 그는 당시 포르투갈 세력권에 들어있는 희망봉을 거치는 동쪽 항로를 거치지 않고서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에스파니아는 포르투갈의 세력권이 아닌 서쪽항로의 개척이 필요했던 시기로 포르투갈왕 카롤로스 1세의 후원을 얻어 트리니다트호(Trinidad), 산 안토니오호(St. Antonio), 콘셉시온호(Concepcion), 빅토리아호(Victoria), 산디아고호(Sandiago)등 5 척과 265 명의 선원을 데리고 1519 년 9 월 카네츠항을 출항했다. |
그것은 역사에 남은 유명한 항해였으나 마젤란 자신의 생명까지 빼앗긴 참담한 것이었다. 대서양을 건너 남미에 도착할 때까지는 무사했다. 그러나 여기서 산디아고호는 폭풍에 좌초, 산 안토니오호는 반란을 일으켜 대서양을 되돌아 먼저 귀국해 버렸다. 그래도 나머지 3 척은 그의 이름이 붙여진 남미 최남단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남미 서쪽 바다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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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와 절망에 허덕이었으나 다행히 해로는 순탄했다. 그 바다를 "태평양"이라 이름 지으면서 서진하여 1521년 3월 필리핀 군도에 도달했으나 마크탄도 주민과의 분쟁에 휘말려 활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여기서 콘셉시온호는 포기되고,뒤이어 트리니다트호도 해일에 난파, 빅토리아호만이 1522 년 9월, 3년만에 13 명의 선원만이 귀국하였다. 이 항해로 지구는 둥글고 주항할 수 있다는 것이 실증되었고, 그들은 세계일주를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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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먼 옛날, 이베리아 반도에 나타난 "신라인"의 이야기도 함께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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