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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 - 인천 개항기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8·15이후 떠나는 일본인들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17.

 '잘있거라 인천아. 이별한 후에도 탈없이 피어나렴 벚꽃아/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이면 꿈속에서 울리겠지 월미도야//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하다.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뜨거운 인사를 받아주오. 그대여 고마왔어요. 안녕!'
 인천에 대한 진한 사랑과 이별의 마음을 담고 있는 이 글은 우리나라 시인의 작품이 아니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해방직후 인천항을 떠나면서 읊은 '잘있거라 인천아!'란 제목의 노래가사다.

8·15 이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단체였던 인천 일본인세화회(日本人世話會)의 회장을 맡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사업을 주도했던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인천에서의 일본인 철수과정을 담아 1952년 펴낸 '인천인양지'에 등장하는 이 노래구절은 일제치하에서의 인천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 인천을 발판으로 삼아 조선인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산 지배자가 패퇴하면서 남긴 노랫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통곡하며 떠나면서도 인천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보여 주고 있다. 인천에서 산 삶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는 지가 한 눈에 드러난다.

8·15 이전까지 인천에 거주한 일본인은 2만38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 대부분이 패망과 함께 본국으로 떠났지만 1천326명의 일본인은 패망 4개월이 지난 연말까지도 여전히 당당하게 생활했단다. 오히려 미군의 도움을 받아 인천의 주인으로 행세하려 하기도 했다. 패망과 함께 조선인들의 테러를 가장 우려했던 일본인들은 그것이 기우였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경찰 등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을 펼쳐 나갔다. 이 때부터 일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본국으로 빼돌리려 했고, 중요 공공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해방 당일 부평지역에 있던 거대 군수공장의 모습을 생생히 그린 이규원의 단편소설 '해방공장'은 8·15 직후에도 일본의 '산업기지 인천'에선 여전히 해방이 실감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해방 후)사흘되던 날 몇몇 사람이 게양탑 꼭대기에 태극기를 달았더니 헌병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숙직원 한 사람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 밤 사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커다란 액판을 써서 문앞에 붙인 것을 보고 헌병은 두 눈에 불꽃을 반사하면서 도끼로 찍어 버렸다…'.

전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등지에서까지 쇠붙이를 공출해 이 곳으로 모은 뒤 차량이며, 포탄이며 각종 군수물자를 만들던 일제의 상징장소가 해방 사흘이 지나도록 일제의 창칼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인공 김용갑이 '해방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외치는 절규는 더욱 간절하다. “여러분! 이 강도 회사 중역들은 아직도 반성할 줄 모르고 우리를 착취해서 저축했던 막대한 금액을 몰래 일본으로 돌려 빼는 모양입니다”라면서 공장의 자금을 환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해방직후의 우리행정기관의 일처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허술했으면 공장 근로자들이 직접 나서 일제의 자본반출을 막아내려 했던 것일까.

광복 60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 곳곳에 숨어 '탈없이 핀 벚꽃'을 왜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지를 '해방기 인천'의 모습은 웅변하고 있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 8. 15

 

* 경인일보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