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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차대전 종전 60년, 일본과 독일의 다른 길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10.

* KBS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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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60년, 독일과 일본의 다른 길
정제혁 1,972 2005.06.27
부헨발트.jpg

지난 5월 8일 종전기념일을 즈음해 기자는 독일을 찾았다. 나치정권의 과오를 사죄하기위해 최근 수도 베를린의 심장부에 대규모 추모공원을 개장한 독일. 이제는 전범국가의 오명을 씻고 유럽통합의 주도국가로 성장하고 있는 통일 독일의 과거사 청산 노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런 갑작스런 출장 기회를 마련해준 것은 고맙게도(?) 일본 시마네 현의 독도조례 제정과 고이즈미 총리등의 잇따른 망언 시리즈였다.
 

최근 유력정치인들의 뻔뻔스러운 언행과 패권주의로 회귀하는 일본의 거꾸로 가는 행보에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움을 갖고 있던 기자에게도 이번 독일 취재는 좋은 배움의 기회였다. 2차대전의 패전국가였던 독일의 전후 역사는 일본의 오늘을 비추는 잘 닦인 거울과도 같았다. 그 거울에 비춰보면 거침없이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속내가 더 잘 보였고 앞으로 한일 관계가 지향해야 할 미래과제도 어렴풋이 드러났다.
 

통일독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앞에서

독일 도착 나흘째 비가 오락가락하던 궂은 날씨가 활짝 개고 화창한 봄 햇볕이 따사로웠다. 베를린 도심을 흘러가는 슈프레 강가엔 벌써 많은 베를리너들이 밝은 표정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강물위를 흘러가는 유람선위에서 느긋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는 한가로운 풍경들을 바라보며 오래 전 비극의 한토막이 떠올랐다. 20세기초 독일 공산당 창당의 주역으로 불꽃같은 삶을 산 여성 로자 룩셈브르크는 이곳 슈프레 강에서 목숨을 잃었다. 맹렬한 반전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됐던 그녀는 1차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날 즈음 정국 혼돈속에서 민병대에 붙잡혀 강물에 내던져 졌다.
 

독일 베를린 영화제가 열리는 포츠담 광장의 한 복합 영화상영관에서는 ‘소피 숄-마지막 나날들’이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는 지난 70년대 논픽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통해 잘 알려진 반나치 학생조직 ‘백장미단’의 젊은 여성 소피 숄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당시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소피 숄은 오빠 한스 숄과 또 친구들과 함께 게슈타포의 감시를 뚫고 나치에 반대하는 격문을 써 붙이며 반 나치 운동에 앞장서다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영화에서 여 주인공을 맡은 율리아 옌취는 올해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강물이 어제와 다름없이 흘러가듯이 평화를 위해 헌신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의 궤적은 이렇게 변함없이 독일의 전후세대에이어지고 있었다.


폰 함머슈타인 목사와의 한때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강제수용소에까지 투옥됐던 폰 함머슈타인 목사와의 만남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과거 우리나라 민중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본 회퍼 목사에게 직접 목사 안수를 받은 전후 독일의 대표적 종교지도자라고 한다. 폰 함머슈타인 목사에게 본 회퍼 목사의 치열한 삶은 평생의 좌표가 됐다고 한다. 본 회퍼 목사는 "미친 사람이 모는 차가 인도를 질주하는 것을 목격한 목사는 죽은 희생자를 장사지내고 위로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차에 뛰어 올라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모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말로 히틀러 암살 계획의 정당성을 역설한 분이다. 부헨발트 수용소에 함께 투옥돼 있다 강제수용소로 이감되면서 본 회퍼 목사와 마지막 작별을 고해야 했던 순간을 떠 올리는 그의 눈은 아직도 스무살 청년의 뜨거운 이상주의로 빛나고 있었다.
 

종전 이후 유태인과 독일인간의 화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함머슈타인 목사는 요즘도 주말마다 유태인 예배에 참석해 독일인이 저지른 과거 잘못을 참회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폰 함머슈타인 목사는 우리 모두는 부당한 차별에 저항해야 하고 종교간 차이를 넘어서 서로 화해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의 얼굴에 굵게 패인 주름은 신념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한 저항적 지식인의 삶을 백마디 말보다 더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었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다큐멘터리 감독 게프하르트와 함께

흔히 생각하듯이 나치 집권시기 독일에서는 히틀러와 그 동조자, 방관자들의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의 강제수용소에는 반나치운동을 하던 수많은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계 인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투옥됐으며 이가운데 많은 이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반나치의 선봉에 섰던 양심세력들이 독일 주류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거리에서 만난 독일인들은 한결같이 종전 기념일을 전쟁에 진 날이 아니라 다수의 선량한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나치당의 광기로부터 해방된 날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 집권 사민당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에카르트 바르텔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도 나치정권의 과오를 자신들의 주도로 청산 해나가고 있는데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기자는 바르텔 의원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질문을 했다.
 

“일본의 경우 미국이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극우파와 타협하면서 전범세력들에 대한 단죄를 소홀히 한 반면 독일에서는 미국과 함께 프랑스 영국등 연합국들이 주도적으로 나치세력과 군부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단행한 것이 현재 두나라의 과거사 처리방식의 차이점을 낳은 게 아닌가 ?”
 

바르텔 의원은 순간 굳은 표정으로 정색을 하고는 나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전후 독일의 철저한 과거사 처리는 연합국등 외부세력의 주도가 아니라 독일 국민 자신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노력으로 이뤄졌다는 반론이 10여분 동안 이어졌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에서도 과거사 단죄가 하루아침에 이뤄졌던 것은 아니었고 독일 내부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여전히 나치전력자들이 재계와 법조계, 산업계에 남아 있을 만큼 나치의 어두운 잔재는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독일에서 나치에 대한 청산 작업이 보다 가속화된 계기는 전후 세대가 자라나 성인이 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흔히 68세대로 대표되는 당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부모와 할아버지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깨닫고 여기에 대한 해명과 보다 철저한 반성을 촉구한 것이 중단없는 과거사 청산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현재 8년째 연정을 이어가고 있는 독일 사민당과 녹색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바로 이 68세대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고 과거 어느 정부보다 강한 과거사 청산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이런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약속된 인터뷰시간을 넘겨가며 열변을 토하는 바르텔 의원은 어느덧 기성세대의 위선에 저항하던 30여년 전 당시로 돌아간 듯 보였다.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독일은 1차 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양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두 번이나 전화에 휩싸이게 만들었지만 패전국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는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1차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쟁을 일으킨 독일 군부세력과 관료들은 사민당등이 주도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을 계기로 패전의 직접적인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군부세력 대신에 민간정부가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군부는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군부와 관료등 보수세력들은 후일 히틀러와 결탁했고 유럽은 또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됐다.


1차대전때의 뼈아픈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2차대전 승전국들은 전범들에게 철저한 책임을 물어야 뒤탈이 없다는 점에 공감대를 이뤘고 실제로 전후 독일의 군부세력을 숙청하고 나치당 인사는 물론 그 부역자들도 철저히 단죄했다.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서 당시 독일 군부와 나치 친위대간부등 5천여명이 전범으로 기소됐고 79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486명이 처형됐다. 뿐만아니라 연합국은 독일 이전 영토의 3분의 1 가량을 소련과 폴란드에 이양하고 동서독을 분리시켜 독일이 다시 유럽의 문제아로 등장할 가능성을 원초적으로 봉쇄했다. 이런 구도아래서 동독에서는 소련의 주도로 강력한 과거청산이 진행됐고 서독지역에서는 독일 민주세력들이 서방연합국들과의 협력아래 전범처벌과, 피해자배상 문제등을 비교적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될 수 있었다.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 천황제가 전후 히로히토 천황의 인간선언을 통해 전쟁 책임을 벗고 지금 다시 패권주의 일본의 상징으로 살아나고 있는 일본의 현 상황은 독일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오히려 단죄받지 않고 살아남은 태평양전쟁의 전범 세력들이 전후 일본의 재건을 주도했고 그 아들과 손자들이 이른바 정치명문가를 형성해 대를 이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을 보면 적반하장이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닌 가 싶다.
 

지금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를 노리며 세계의 패권국가로 다시 부상하려는 일본.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서구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는 데는 누구보다 빨랐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합리적 시민정신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제도를 뿌리내리는 데는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천황제로 대표되는 전근대적인 질서가 아직도 일본인들의 사고체계를 구속하고, 태평양전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미국과의 타협속에 살아남아 자민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내리 집권하고 있는 일본사회의 기묘한 전근대성은 ‘아시아의 문제아’ 일본의 행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과거사 논란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장소가 일본의 전통종교시설인 야스쿠니 신사라는 사실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최소한의 이성적 토론을 거부하고 태평양 전쟁당시에 사고의 시계가 멈춰 있는 듯한 그 사람들의 완고함에서 21세기 첨단 일본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깊은 전근대성의 한 징후를 읽을 수 있기에 말이다.
 

군국주의라는 전근대적인 유사종교에 빠져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주류사회는 아직도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성적 비판에 닫혀 있는 종교 ,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굳이 현해탄을 건너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사고를 확장해 본다면 오늘날 미국이 주창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 원칙이 이라크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온전히 실현되는 날 아시아 제국들이 과거사의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일 것 같다.



60년 전 포츠담 회담의 장소 세실리안호프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 돌이켜보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였던 우리 한국민들에게도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 해이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열강들이 전후처리를 논의했던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의 장소, 베를린 근교의 세실리안호프에 서니 아직도 지난 세기 전쟁의 상처와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 제국들의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고 있는 유럽의 오늘과 대비한다면 지금까지 시시콜콜 과거 잘잘못을 따지는데 머물고 있는 아시아의 현 상황은 양식있는 세계시민들의 부끄러움의 대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거꾸로 가는 일본의 역사인식에 오히려 분노보다는 연민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다.
 

독일의 적극적인 과거사 청산노력은 자주 일본과 비교된다. 독일은 잘하는데 왜 일본은 저모양인가 하는 비난이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입에 오르내린다. 이런 분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우리 학계와 언론 , 시민단체들은 서로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독일과 일본의 행로에 대해서 보다 긴 호흡으로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평양 전쟁의 피해당사자들인 아시아 여러나라 국민들과 평화와 정의의 연대를 구축하고 일본의 양심세력들과도 손잡는 장기적 전망을 세워나가는 일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긴 세월 일본의 진정한 참회를 기다려온 우리는 이제 일본의 양식있는 시민들과 비판적 지식인, 젊은 전후세대들과 더불어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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