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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단/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의 현대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by 아름다운비행 2005. 7. 25.

*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박사 (사이버)기념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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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강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유영익(柳永益),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 연구>,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연세대출판부, 1998)를 요약한 것입니다.




‘수정주의(修正主義, revisionism)’란 무엇인가?  1950~70년대 초에 걸쳐 미국 위스콘신대 역사학과 교수로서 『미국외교의 비극』(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등을 저술한 외교사가(史家) 윌리암스(William Appleman Williams)와 그의 제자들이 주도한 냉전시대사 연구의 학풍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위스콘신 학파’라고도 불리는 이들 비(非)주류 역사학자군은 1 내지 네오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19세기이래 미국이 추구한 대외팽창정책은 미국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데 따른 경제적 필요에 기인한 것이라 파악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정통주의(traditional/orthodox)학파 및 현실주의(realist)학파의 정치, 이념 중심 통설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이 참여한 주요 전쟁의 원인을 구명하는 작업을 펼쳤는데, 그중 ‘급진적 수정주의자’로 알려진 콜코(Gabriel Kolko)는 “미국의 대외정책은 미국 자본주의의 위력과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있었다”는 기본관점하에 미국이 개입한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 등은 모두 미국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발단되거나 참전한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전개된 동서냉전(the Cold War)의 원인을 논함에 있어 미국은 전후의 세계질서를 ‘팩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재편하기 위해 군사적 경제적으로 취약한 소련에 공세를 취하였고,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도전에 시종 수세로 임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소련의 대외정책을 옹호하였다.





브루스 커밍스로서 대표되는 수정주의적 한국현대사 인식은, 최장집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측면과 남한의 반동성, 그리고 이들의 결합에 의한 음모적 전쟁유도, 따라서 북한에 대한 상대적인 또는 독점적인 민족정통성의 부여와 전쟁성격의 민족해방전으로의 규정 등”으로 요약된다.

미국의 수정주의 학설이 한국현대사 연구에 막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197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 참전반대운동에 앞장섰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관련 논저들이 한국학계에 소개된 다음부터였다.

 

‘신좌파’(the New Left)의 이론적 기수였던 커밍스는 1981년 그의 대표작『한국전쟁의 기원 : 해방과 분단정권의 등장, 1945~1947』(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제1권(아래에서 『기원 1』로 약칭)을 저술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폭포의 큰울림, 1947~1950』(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이라는 부제가 달린 제2권(『기원 2』로 약칭)을 1990년에 출판하였다.

『기원 1, 2』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930년대 일제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 거작(巨作)이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서술 요지는 아래와 같다.

(1) “해방 당시 한국은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즉, 계급혁명―이 성취될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2) “외세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사회혁명은 성공했을 것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었다.

(3) 38선 획정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물론, “단독정부 수립에 의한 남북분단 고착화의 책임도 미국에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4) 남한의 지도자와 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시종 비판적으로 논급하는 반면 북한의 지도자 및 정부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로 일관했다.

-- 1948년 5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OCK)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를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은 정통성을 결여한 정부―즉, 일종의 괴뢰정부―로 간주하였다.

-- 김일성과 북한정권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그는 김일성이야말로 1930년대에 한·만 국경지대에서 독자적으로 항일 게릴라전을 영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린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하면서 그를 이승만 내지 임정계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앞지르는 ‘민족주의자’로 파악했다.

 

커밍스는 “김일성은 소련의 장교가 아니었”고 또 김일성의 집권을 가능케 한 것은 소련군의 후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33세의 젊은 김일성을 중공의 모택동(毛澤東), 베트남의 호지명(胡志明),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등에 비견시켰다.

 

나아가 커밍스는 “북한은 결코 소련의 괴뢰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1946년 이후 북한정권이 추진한 ‘민주개혁’이야말로 해방 당시 한국 민중이 갈망했던 사회혁명의 기대를 충족시킨 것이었고, 1950~1960년대 북한이 이룩한 경제성장은 전세계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과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5) 6.25전쟁의 성격을 ‘내전’(civil war) 내지 ‘시민적 혁명전쟁’(civil revolutionary war)으로 규정하였다. 나아가 그는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학문적으로 의미 없는 우문(愚問)이라고 못박았다. 6.25 전쟁은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관점이었다.

 

6.25 전쟁의 발발 배경을 해명함에 있어 커밍스는 1950년 1월 유명한 ‘미극동방위선 한국 제외’ 연설을 한 에치슨 미국무장관이 한반도에서 ‘공격하는 측이 큰 실수를 범하도록 만드는 방어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대한정책을 오판, 남한을 침공토록 부추긴 것으로 추론하였다.

 

동시에 그는 1950년 5월 선거 후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자구책으로 미국의 군사개입을 얻어내기 위해―‘북진통일’의 명목하에―남한 군대로 하여금 옹진반도를 침공하게 했을 것이라고 추단했다.

 

한마디로, 그는 6.25 전쟁의 도발책임을 은근히 미국 및 남한측에 전가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북한이 6.25 전후에 중공으로부터 상당한 인적 지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되 소련으로부터는 아무런 실질적 원조를 받지 않았다고 강조함으로서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없이 거의 독력으로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하려 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