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辛未洋擾)
1871년(고종 8)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江華島)를 침범한 사건.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그 진상조사와 손해배상요구를 위해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북경주재미국공사
F.F. 로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아시아함대사령관 J. 로저스에게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개항시키는 전통적 포함외교정책을 취하였다. 71년
4월 로저스는 군함 5척과 군사 1200여 명을 이끌고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로저스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고 강화해협을 탐측하면서
물치도(勿淄島)에 정박하였다. 조선에서는 충돌사태의 발생에 대비하여 교섭을 진행시켰으나 미국은 파견된 조선대표의 품계가 낮다는 이유로 교섭을
거부하고 강화부의 관문인 손돌목[孫乭項(손돌항)]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외국함대가 허가없이 침범하므로 함대에 포격을 가하였고,
미국함대도 이에 응수함으로써 조선과 미국 사이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손돌목사건 직후 미국대표는 포격에 대한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미국의 행위를 주권침해와 영토침략행위로 간주하고 협상을 거부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함대는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였고, 초지진·덕진(德鎭)·광성진(廣城鎭)을 점령하였다. 광성진싸움은 치열하여 조선측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고,
미국측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여 명이었다. 다음날 첨사 이염(李濂)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적의 선박을 물리쳤다. 미국은 싸움에서는 이겼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양이정책에 부닥쳐 조선개항을 단념하고 함대를 철수하였고, 조선에서는 배외감정이 고조되어 쇄국정책이 강화되었다.
(야후 백과사전)
미해군 기함
콜로라도호(1871년)
모노카시호의 미군들. 침공했던 군함 중 한 척인 모노카시호의 선상에서 기념촬영한
미군들.
사령관
로저스 미 해군제독
강화도를 침공했던 군함 중 한척인 콜도라도호의 해군 제독과 수행원들. 제복으로 미루어 중앙에 앉은 사람이 로저스 제독으로 추측되며,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종이는 지도이고, 장소는 선상이다.
로저스
미 해군 제독과 수행원들
로저스의 작전회의. 1871년 5월. 두 명의 중국인이 보이는데 이들은 아마 안내자나 통역관일 것이다.
1871년 5-6월. 미국 함선에 승선한 한 한국인. 빈 맥주병과 미국 신문인 [Every
sat
-urday] 한 부를 들고 있다. 사진 설명으로 보아 신미양요 당시 포로로 보이지는
않
는다.
초지진에
상륙하는 미 해병대. 뒤에 이들은 광성진에서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초지진
포대를 점령한 미 해병. 초지진을 점령한 부대는 킴벌레이 중령 이하 장병들이며 그 수는 약
450명이었다.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들. 1871년 6월 2일.
1871년 6월 2일.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을 하다 전사한 조선군.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앨버트 가스텔)
"남북전쟁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블레이크 중령)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는 반드시 이 전적지에 수학여행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나 여행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보고 그들 조상을 추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규태의 [역사산책] 중)
1871년 6월 2일.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을 하다 전사한 조선군.
미군과의 전쟁 과정에서 잡힌 조선인 포로들. (미국배 위) 이 두 사람은 나중에 곧
풀려났다.
미군과의 전쟁 과정에서 잡힌 조선인 포로들. (미국배 위) 갓을 쓴 사람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문정관(問情官)이다.
미군에게
빼앗긴 수(帥)자가 쓰여진 조선군 사령관기. 현재 이 기는 미국 해군
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미군에게
빼앗긴 수(帥)자가 쓰여진 조선군 사령관기. 현재 이 기
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기념촬영한 미군들.
당시 신시내티 데일리 인콰이어러에 실린 관계기사. 1871년 6월 29일자 기사. 강화도에서 있었던 미군과 조선군의 교전 즉 신미양요에 대한 기사임. 아래 사진은 왼쪽에서 셋 째단을 확대한 것임.
번역:
한국 완전 격파
-------------
로저스 함대 사령관 다섯개의 요새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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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량의 무기
노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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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키 중위(또는 소위일 수도 있습니다. 미군은 소위(2nd Lieutenant)와 중위(1st
Lieutenant)를 보통 줄여서 Lieutenant로 부르기 때문에. - 역주) 외 2명 전사
6월 28일 워싱턴 발 - 오늘 오후 해군성에 전달된 소식
1871년 6월 28일, 한국
해군성 장관님께:
지난 10일 있었던 부당한 공격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는 한국에 대하여, 아군은 Kang Noe(아마도 '강화'의 중국식 발음이 아닐까 합니다. 미 함대가 당시에 중국인 통역을 대동했던 점을 볼 때.. 누구 중국어 하시는 분 있으면 확인해 주셨으면.. - 역주)에 상륙하여 저지의 요새를 점령하고 군수품을 파괴하였습니다. 11일 우리는 또 하나의 요새를 점령하였고, 구 후 그들의 본거지를 공략, 획득하였습니다. 지금까지 5개의 요새를 점령하였습니다. 그 요새들을 방어하던 병력은 11,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요새 안에서는 처절한 백병전이 있었습니다. 파괴된 병기들은 481개이며, 주로 소형 금속 병장기(칼이나 창등을 의미합니다. 꼭 놋쇠라기 보다는.)들입니다. 많은 소형 무기들과 깃발 50여기를 노획했습니다. 요새 주변에서 발견된 한국인 전사자는 243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아군 전사자는 3명입니다. 요새에 맨 처음 진입한 맥키 중위는 총탄과 창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다른 전사자는 데니스 해머헌 해병과 육전요원인 세스 앨런입니다. 아홉명의 아군 부상자는 모두 안전하며 상태가 좋습니다.
서명 JNO. 로저스
미해군 사령관
대영제국 외무성에 급전
전투지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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