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선생의 자취에 대한 기록을 옮겨왔다.
1. 시인 조동화 선생의 글
("시조21" - 시조의 새로운 지평을 꿈꾸는 잡지 - 중에서)
출처 : blog.naver.com/sijo21/20107729642
위당 정인보의 조춘(早春)
- 조 동 화 (시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조선 말기 영의정을 지낸 동래 정씨(鄭氏) 원용(元容)의 4대손으로 서울 출신이다. 1893년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은조(誾朝)와 어머니 달성서씨(達成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장흥방(회현동)이고, 10세 전후까지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1905년 성계숙과 결혼했다.
1910년 대한제국 말기의 양명학자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에게 집지(執贄)를 드린 후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하다가 이듬해 벽초(碧初) 홍명희와 함께 상하이(上海)로 가서 동양학을 전공했는데 이때 생모인 서씨(徐氏)가 동행했다.
1913년 9월 장녀 정완(貞婉)을 낳고 그 산고(産苦)로 첫 부인 성계숙이 사망하자 생모와 함께 귀국했다. 같은 해 11월에 후취(後娶) 조씨(趙氏)와 재혼했고, 1915년 장남 선모(先謨)가 출생했다. 1918년 생모인 서씨가 사망했는데, 박은식, 신채호, 신규식, 김규식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상하이와 난징 등지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위당도 귀국했다. 1920년 차녀 경완(庚婉)이 출생했고, 1922년에는 3녀 임완(壬婉)이 출생했다.
1923년부터 서울 양사골에 우거하면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 연희전문학교에 나가 강의를 시작했고, 이 해 3월에 양모(養母) 이씨(李氏)가 사망했으며, 9월에는 차남 연모(淵謨)가 출생했다. 이듬해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도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했고, 시대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25년 효자동 시대일보사를 인천땅을 잡혀서 샀다가 여의치 않아 홍성희, 이승복에게 넘겨주었다. 1926년 12월 생부인 정은조(鄭誾朝)가 사망했으며, 1928년 4녀 양완(良婉)이 출생했다.
1931년 1월 3남 흥모(興謨)가 출생했고, 7월에 <조선고전해제(朝鮮古典解題)>를 17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3년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고자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고,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양명학연론>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으며, 이 해 11월에 4남 양모(良謨)가 출생했다. 1935년 1월 다시 동아일보에 연재한 <5천년간 조선의 얼>에서는 조선역사 연구의 근본을 ꡐ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ꡑ에서 찾고 조선역사는 곧 한민족의 ꡐ얼의 역사ꡑ임을 강조했고, 7월에는 <정다산(丁茶山) 선생 서거백년(逝去百年)을 기념하면서>를 조간 사설로, <다산선생의 일생>을 석간에 발표, 실학 연구를 주도했다. 그해 9월에 5녀 평완(平婉)이 출생했다.
1942년 차녀 경완(庚婉)이 벽초(壁初) 홍명희의 며느리로 출가하여 위당은 벽초와 사돈지간이 되었다. 1943년 일제탄압이 극에 달하자 전북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다 광복과 더불어 상경했다. 1946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 간)를 펴냈고, 8․15해방 후 우익진영의 문인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국학(國學)을 부흥 발전시키겠다는 각오 아래 국학대학의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간곡한 청으로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고, 이 해에 그의 유일한 시조집 『담원시조( 時調)』(을유문화사간)를 상재했다. 1950년 7월 31일 공산군에 납북되어 묘향산 근처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그의 사후 『담원국학산고( 國學散藁)』(1955, 부산 문교사), 『담원문록( 文錄)』(1967, 연세대출판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1972, 삼성문화재단),『담원시조( 時調)』(1973,을유문화사),『자모사(慈母思)』(2001, 태학사) 등이 간행되었다.
조 춘早春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쏜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기 어이 더딘고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타말고 헤쳐본들 어떠리
현대시조에서 가장 흔히 목격되는 3수로 구성된 연시조이다. 고교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을 대했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 당시 교과서에는 「조춘(早春)」 대신 「이른 봄」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교과서에 실린 다른 시인의 시와 함께 자주 혼자서 읊조려보곤 하던 일이 아슴아슴 떠오른다.
우선 내용을 일별해 보면, '봄이 왔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솔빛이 벌써 더 푸르고, 산골에 남은 잔설도 따뜻한 듯이 보이는데, 이웃에서는 벌써 토담집 고치는 소리가 봄 햇살 아래로 들려오는구나. 세미한 봄의 소리가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새싹이 돋고 씨앗이 눈뜨려고 곳곳마다 움직이고 있으련만 나비는 왜 아직도 날아올 줄 모르는가. 이른 봄의 작은 기운이 온 세상에 두루 변화를 일으키듯이 내 생각(나의 의지)이 골똘히 여물 때에는 먼 하늘에 가던 구름도 나를 위해 머무르게 마련이거니 우리 모두 손에 든 붓대만 탓하지 말고 겨울의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생각을 펼쳐봄이 어떠하겠는가.' 정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첫째 수에서 이른 봄의 은밀한 기미(機微)를, 둘째 수에서는 천지간에 부지런한 봄의 역사(役事)를, 그리고 마지막 수에서는 무기력을 떨치고 추스르는 새 마음을 각각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 전체 주제도 '새봄을 맞아 심기일전하자'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터이다.
『현대시조큰사전』을 펼쳐보면 이 작품의 발표연대가 1929년 4월이고 발표지면은 『신생』으로 되어 있다.
시조부흥운동이 1926년에 시작되었으니 이 작품의 탄생은 현대시조 초창기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당시의 몇 안 되는 명작 가운데 하나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평이한 우리말을 잘 살린 점이 돋보인다. 그의 대다수 작품들을 보면 생경한 한자어와 뜻을 깨치기가 쉽지 않은 고어들이 곧잘 목격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참고로 그의 다른 작품 두어 수를 살펴보자.
① 초하구(草河口) 궂은비에 깊이 맺힌 영릉지통(寧陵至痛)
저 비답(批答) 하오실 때 상하(上下) 아니 울었으리
그제가 성세(盛世)로 뵈니 산줄 몰라 하노라
<백마강 뱃속에서> 열한 번째 수
② 뮌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임이 아니 못보심가
내 없어 네 미워진 줄 어이 네가 알것가
<자모사> 여섯 번째 수
보다시피 ①은'영릉지통(寧陵至痛)', '비답(批答)', '성세(盛世)'등 생경한 한자어 투성이이고, ②는 '뮌', '되', '서워라' 등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말들이 구사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시어(詩語)의 전달력이 이렇게 어려워서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비해 '조춘(早春)'은 같은 시인의 작품인데도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모국어의 아름다움이 너무도 잘 살아 있다.
다음으로는 작품의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첫발을 내디디고 그것을 이은 중간 전개가 무난할 뿐만 아니라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마무리도 안정감(安定感)을 준다. 각 수의 종장의 끝 어미를 보면 세 수가 영탄, 설의, 설의로 되어 있다.
그의 시조 전체를 살펴보아도 영탄과 설의는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결미(結尾)의 마무리 기법(技法)이다. 참고로 <자모사> 40수의 종장 끝을 확인해보더라도 무려 영탄이 15번, 설의가 13번이나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종장 끝이 전혀 새로운 마무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춘'에서는 전혀 상투적(常套的)인 결미라는 생각이 들지 않음은 참으로 묘한 일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 이 작품이 조화미(調和美)가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위당은 애국지사, 학자, 교육자, 시인 등 여러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그 어느 분야에도 범상치 않은 업적을 보여주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는 그가 남다른 역량(力量)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시조는 인간으로서의 정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으로 어떤 특별한 문학적 소신이나 의식이 밑바탕이 된 것이 아니지만 일격(一擊) 필살(必殺)의 기세에 값하는 적중(的中)의 표현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편의상 '일격 필살의 기세에 값하는 적중의 표현'이라 했지만, 이는 그냥 짧게 '득의(得意)의 표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좀 더 부연하여 일찍이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발레리가 말한 바 '우주적(宇宙的) 감각(感覺)'에 근접한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작품들을 보자.
ⓐ 지나는 나그네들 노래 소리 문득 그쳐
거룩한 충무대감 사당 여기 계시다네
그 당시 배 한 척 위에 나라 실렸더니라
<여수 옥천사(麗水 玉泉寺)> 전문
ⓑ 단풍숲 터진 새로 누워 넘는 어여쁜 물
저절로 어린 무늬 겹친 사(紗)와 어떠하니
고요한 이 산골 속이 더 깊은 듯하더라
<옥류동(玉流洞)> 첫수
ⓒ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이라 여쭈오니
고국 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자모사(慈母思)> 37
여기서 ⓐ의 종장은 역설(逆說)이고 ⓑ의 초장은 의인법(擬人法)의 표현이며 ⓒ의 종장은 연발형(連發形)의 활용이다. 얼마나 엉뚱하면서도 감동적인 역설이며 오묘한 의인법인가. 또한 배구(排球)의 시간차 공격을 방불케 하는, 실로 얼마나 절묘한 연발형의 활용인가. 가위 일격 필살의 기세에 값하는 적중의 표현이요 우주적 감각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조춘'에서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득의의 한 표현을 목격하게 된다. '내 생각 엉기올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냥 내면에 일고지는 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내면의 생각의 영향으로 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이 머물 수가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것은 분명 예사 표현은 아닌 것으로 적어도 나의 판단으로는 빛나는 예지(叡智)를 지닌 시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득음(得音)이며, 곧 시인 자신의 굳은 결의(決意)의 현현(顯現)일 것이라는 심증(心證)이 간다.
성경에 보면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말이 있고, <주자어류(朱子語類)> 제8권을 보면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는 뜻의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이라는 말도 있다. 그뿐이랴, 우리가 익히 아는 말 가운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속담도 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인간은 만물 가운데서 신의 뜻을 구현(俱現)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이 천지의 으뜸가는 주인공이다. 따라서 인간이 슬픔에 잠기면 만물도 탄식에 젖을 수밖에 없고, 인간이 간절히 원한다면 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조차도 그 뜻에 부응해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진정 이 우주(宇宙)의 이치가 아니던가!
끝으로 위당과 그 부인에 관한 일화 한 가지씩을 소개하고 이 글을 끝맺기로 한다.
위당이 남다른 효자(孝子)였다는 사실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가 있다. 내용인즉 두 분 어머님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그는 슬픈 나머지 너무도 절절하게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튿날은 으레 목이 아주 잠겨 결강(缺講)을 하곤 했는데 워낙 해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이라 학생들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강이신 걸 보니 어제가 바로 선생님의 어머님의 기일이었던가 보지?' 하고 말이다.
여러 해 전 위당의 막내아들인 양모(良謨)씨가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있었을 때, 나는 어느 하루 박물관뜰 에밀레종 곁에서 그와 조우(遭遇)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나를 포함한 경주의 문인 몇 사람에게 에밀레종의 신비를 세세히 들려주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어느 시인이 들려준 양모씨 어머님의 이야기는 무척 슬프고도 감동적이었다.
위당이 납북된 후 그 부인은 수십 년 동안을 한결같이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마나 돌아올 것만 같아 위당이 입던 의복을 해마다 깨끗이 빨아 풀을 해서 다려 놓고 호호백발 할머니가 그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해 염려했던 대로 위당이 오래 전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나 자식들은 행여나 그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실까 봐 차마 말 못하고 아버지의 제사도 지내지 못한 채 쉬쉬 하며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식들도, 며느리들도, 사위들도 다 아는 위당의 죽음을 주름지고 눈 어두운 그 아내만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로 미당(未堂)의 『질마재 신화』 가운데 저 유명한 <신부(新婦)>라는 시가 눈물겹게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위당은 시조 하나에만 매달리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었다. 만일 그가 그의 역량을 온전히 시조에만 쏟았다면 누구도 그에게 미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그에게 시인으로, 학자로, 언론인으로, 애국지사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짐 지웠다. 생각건대는 숨 가쁜 근대사 속에서 민족시의 드높은 제단에 위당만한 천재가 『담원시조( 時調)』 한 권을 두고 간 사건이야말로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출처] 위당 정인보의 조춘早春 - 조동화 |작성자 시조21
2. 위당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다 만난 '경성부 옛지명'
( "굴어당의 한시·당시·송시" 중에서)
출처 : blog.daum.net/k2gim/11406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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