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http://v.media.daum.net/v/20161228112019782?d=y
< His Story >"명량해전때 13척으로 왜선 133척 격침?.. 100여척은 퇴각"
장석범 기자 입력 2016.12.28 11:20 | 문화일보
‘이순신을 연구한 핵공학자’ 최희동 서울대 교수
지난 8월 발간된 ‘이순신의 일기(난중일기)’는 누가 봐도 평범한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겉표지 안쪽에 쓰인 저자들의 약력만 몇 줄 읽어보면 이 책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된다. 저자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박혜일(작고)=오스트리아 빈대학 핵물리학 전공 이학박사. 최희동=영국 버밍엄대학에서 핵물리학 전공으로 이학박사. 배영덕(작고)=서울대 대학원에서 원자핵공학 전공으로 공학박사. 김명섭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원….
1998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출신 4명의 핵 과학자들이 ‘이순신의 일기’라는 타이틀의 책을 펴냈다. 출판계는 물론 이른바 ‘이순신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이순신 전문 저서가 등장한 것이다. 예상 밖의 초판이 나온 이후 저자들은 고증과 연구를 거듭, 올해 개정증보판을 냈다. 핵공학과 이순신의 일기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지난 21일 서울 관악산 자락 서울대 공대 32동 최희동(61)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만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핵 과학자가 어쩌다가 이순신 연구에 나섰느냐였다. “박혜일 교수님 때문이었죠, 하하.”
2005년 작고한 박 교수는 최 교수와 배영덕 박사, 김명섭 연구원이 다닌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였다. 박 교수는 전공 외에 1960년대 이후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거북선의 철갑선 여부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 이순신 관련 연구에서 상당한 성과를 낸 분이었다.
“천재에 가까운 분이셨어요. 핵공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이순신 연구, 거북선 연구에 몰입하셨어요.”
최 교수는 1974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했다. 그해는 박 교수의 소문만 들었지,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듬해 전공 수업을 듣게 되면서 박 교수를 알게 됐다.
최 교수는 이날 박 교수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을 꺼냈다. 박 교수는 1976년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거북선(龜船) 토론회에 참석하고 올라왔다. 박 교수는 상경길 내내 토론회에서 나온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다’라는 다른 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철갑선이 아니라는 측은 “문헌적 기록이 없고, 전설에서나 나오는 ‘철갑선’”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내려 남대문 쪽으로 걷던 박 교수 눈에 들어온 것은 남대문 성문의 철갑비(鐵甲扉)였다. 목판인 성문에다 철갑으로 둘러놓은 것이었다. 박 교수는 무릎을 쳤다. 철갑이 조선시대에는 흔한 기술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남한산성 성문 등 도성이나 산성의 문 등에 철갑 기술이 흔히 쓰인 사실도 알았다. 박 교수는 이를 토대로 1979년 과학사학회지 창간호에 ‘이순신 귀선(龜船)의 철장갑과 이조 철갑의 현존 원형과의 대비’란 논문을 실었다.
“박 교수님은 과학자이자 학자로서, 굉장히 철두철미한 분이셨죠. 원문을 꼭 보라고 하셨고, 대충 대충은 없었어요.”
박 교수는 무서울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반드시 찾아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디지털화된 자료가 없어 자료 복사할 일이 상당히 많았다. 최 교수는 박 교수의 복사 심부름을 하면서 이순신 장군과 인연을 맺었고, 유학 등의 기간을 제외한 20여 년 동안 이순신의 일기 연구에 몸담게 됐다. 최 교수의 일생, 특히 이순신 연구에 관련해서는 박 교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듯했다.
“거북선을 알려면 난중일기를 연구해야 했는데, 어떤 텍스트를 사용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순신이 쓴 일기는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된 친필 일기 초본과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가 있다.
박 교수와 최 교수 등은 국보(國寶) 76호인 친필 일기 초본은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박 교수가 친필일기 영인본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인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의 존재를 알게 됐다. 1980년대 후반쯤이었다. 난중일기 연구를 작심한 뒤 난중일기초 연구에 돌입하기까지 시간이 꽤 흘렀다.
최 교수는 “아무래도 비전문 영역인 데다 본 전공 분야 연구와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결한 난제들이 전공자였으면 수월하게 풀렸을 법한 일도 많았다는 것이다.
난중일기초를 원문과 가깝게 컴퓨터에 입력했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와 문화재청이 촬영한 현충사 보관 친필 일기 사진과도 대조했다. 8년가량이나 걸려 작성된 난중일기초와 달리 정조 때 학자 2명에 의해 서둘러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는 누락된 글자나 빠진 부분이 많아 부정확했다. 비교적 원본에 충실했다고 여겨졌던 난중일기초에서도 140여 개의 오류가 발견됐다.
최 교수 등은 오류를 일일이 바로잡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98년 ‘이순신의 일기(난중일기)’를 펴냈다. 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핵 과학자들이 ‘일’을 낸 것이어서 당시 학계의 화제가 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팩트 발굴과 확인을 사명처럼 여긴 박 교수나 그를 사사한 최 교수는 자료 발굴을 계속했다. 2000년에는 이순신의 친필 일기 뒷부분에 남겨져 있던 별책부록이 숙종 때 작성된 이순신의 일기 필사본으로, 325일 치 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들은 새로 발견한 사실을 반영해 이순신의 친필 일기와 가장 가까운 활자본을 만들고자 했다. 친필 일기 한 장에 담긴 글자와 여백, 문장 행갈이, 부호 등을 최대한 원형대로 활자화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2005년 박 교수가 급작스레 폐암이라는 ‘불운’이 닥친다.
“그때 별책부록 부분인 친필 일기초(日記草) 활자본 작업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박 교수님이 주변 사람을 시켜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작고하시기 전날이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때 워낙 이순신 연구에 몰두하셨던 선생님이셨던지라 일기초 작업을 잘 마무리하란 당부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죠.”
박 교수는 이승을 떠났지만 이들의 연구 성과는 빛을 봤다. 2007년 ‘이순신의 일기초(日記草)’가 출판된 것이다. 당시 연구물은 올해 발간된 개정증보판 ‘이순신의 일기(난중일기)’에 CD-ROM 형태로 붙어 있다.
최 교수는 “이순신을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말도 안 되는 오류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여진(女眞)과의 동침’으로 해석된 부분이다. “난중일기 병신년 9월 12일에 ‘저녁 무장에 도착해 잤다(暮倒茂長宿)’는 문장 이후 한참 여백을 두고 ‘여진’이란 단어가 쓰여 있어요. 이를 일부 소설에서 잘 숙(宿)자와 잘못 연결해 해석하는 바람에 여진과 잤다고 해석하면서 동침을 한 것처럼 돼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더불어 여(與)’가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최 교수는 “여진이란 여성이 있었는지 동침이 아닌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시 고려 때도 아닌 조선 시대에 여성과의 동침을 버젓이 기록할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문장 부호까지 써가며 세세하고 정확하게 의미를 기록하려 했던 이순신의 평소 일기 형식과 비교해도 ‘더불어 여’자를 빼놓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영화에서 조선 수군이 적선을 충돌해 깨부숴 버리는 장면에 대해서도 오해를 빚을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는 “이순신 일기에 ‘당파’라는 말과 ‘충파’ ‘촉파’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면서 “당파는 포를 쏴 격침시키는 것을 일컬었고, 충파는 폭풍이 왔을 때 배 결속을 잘못해 쿵쿵 충돌하다 부서진 경우, 촉파는 결속된 배들이 서로 비비적대다 파손된 경우 이렇게 세분해서 썼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당파로 쓴 부분까지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 모두 직접 가서 부딪쳐 격침하듯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해석도 여럿 있단다. 대표적인 것이 이순신이 명량해전 때 조선 배 13척으로 왜선 130척의 배를 격침했다는 식의 해석이다.
최 교수는 “일기에는 133척이 몰려왔고, 그중 31척을 당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면서 “적선 31척이 당파된 이후 100여 척이 퇴각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적으로도 우리 배만 강도가 뛰어나 일본 배를 연달아 충돌해 격침하는 것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면서 “조선 수군 전선 한 척이 적선 10척을 부수어야 하는데 그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학도여서 이순신 연구에 도움이 된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최 교수는 “옛 지명을 현 지명과 맞추는 연구를 할 때 시뮬레이션을 통해 상대적으로 찾아낼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순신의 일기에 등장하는 16세기 말 지명은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잘못 알려진 곳도 있다고 했다. 그는 “지명은 마을 사람들 일부를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아예 달라지기도 해서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이순신이 정유년에 백의종군한 다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명령장만 진주땅 운곡에서 받고 이동하는데 배를 타는 곳이 회령포라는 곳”이라며 “전남 보성군에 회령리, 장흥군에 회진리가 각각 있는데 보성군 회령리는 고려 때 회령리에 있던 진을 폐해 회령폐현으로 부르고 당시 장흥도호부에 귀속시켰다”고 설명했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 회령포는 보성 땅이 아니라 장흥 땅으로 봐야 이순신의 동선과도 일치한다는 설명이었다.
스승인 박 교수의 연구 기간까지 합하면 40년 이상의 이순신 연구로 5번째 증보판을 낸 ‘이순신의 일기(난중일기)’는 완벽할까. 최 교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박 교수님은 굉장히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이순신도 철저한 사람이었죠. 일기 곳곳 사람 이름 밑에 암호 같은 게 있는데 사람들을 기억하려 했던 것 같더라고요. 그만큼 철두철미한 분이셨단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철저한 검증과 치밀함을 강조하신 박 교수님의 가르침을 배운 제자들이어서 규율에 엄격하고, 철저한 성격을 소유했던 이순신의 인생에 천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석범 기자 bu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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