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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日, 명성황후 弑害상황 은폐 드러나"
등록자 : 조선일보 | 날짜 2005.11.13 | 조회수 5815
"日, 명성황후
弑害상황 은폐 드러나"
'명성황후 시해장소 명시' 日문건발굴한 이태진 서울大 교수
글=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사진=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 이태진 교수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가 침전(寢殿)이 아닌 궁궐 뜰이었다고 명시한 일본측 자료 ‘우치다(內田) 문건’을 발굴, 공개한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3일 “이 문건은 궁궐에 난입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만행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며 “그동안 이것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시해 장소를 포함한 사건의 전모를 은폐하려 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치다 문건’은 기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나?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는 1895년 11월에도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12월 21일에 작성한 이번 문건은 처음 밝혀진 것이다. 11월의 보고서는 일본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건 주범을 일본인이라고 명시해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 문건의 신뢰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당시 경성 주재 일본 일등영사였던 우치다는 을미사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사건을 주도했던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도 매우 사이가 나빴다.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된다. 이번 보고서는 당시 일본 외무차관이었던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에게 보낸 것인데, 하라는 나중에 총리대신까지 지낸 유력 인사였다. 우치다란 인물은 국내학계에 알려져 있으나 을미사변 이후 행적 등은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문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보고서의 작성 시점이 을미사변 범인들에 대한 히로시마 재판이 열린 1896년 1월 20일보다 1개월 앞선 점을 주목해야 한다. 히로시마 재판 법정에는 우치다 문건과 같은 내용이 전혀 제출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 보고서에서 보듯이 진상을 파악하고서도 그동안 철저히 숨겼다는 것이 된다.”
―우치다는 동학운동을 주도한 전봉준(全琫準)이 체포된 뒤 신문을 했던 경력의 소유자인데?
“이 사건과는 별개로 놓고 보아야 한다.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솔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문건은 어떻게 찾아냈나?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한·일관계 자료를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 모두 네 권으로 이뤄진 문서철의 일부다. 문서철의 다른 부분에는 공판 기록과 다른 조사 기록들이 있다.”
―보고서에 실린 지도에서 또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나?
“그동안 일부 그림에서만 존재 여부가 알려졌던 경복궁 내 ‘시계탑’이 건청궁 서쪽에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궁궐 안에 신문명의 상징을 세웠다는 것은 당시 왕실의 개화 의지를 보여준다.”
―명성황후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명성황후가 ‘나라를 망친 여인’ 정도로 폄하됐던 것은 일제가 주도한 역사 왜곡의 결과다. 실제로는 고종의 개화 정책을 도와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긍정적인 인물로 봐야 한다.”
1895년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시해한 장소 침실이 아니고 마당이었다
당시 日영사가 보고한 기밀문서 발견 日帝, 진상 알고도 ‘침실弑害’로 왜곡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알려져 온 사진. 사진 속 주인공이 궁녀라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돼 진위 여부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DB사진
1895년 일본인 폭도들이 조선 고종(高宗)의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과 시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일본측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자료는 명성황후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침실 안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침전(寢殿) 밖 뜰로 끌려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시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문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2일,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최근 찾아낸 기밀 문건 ‘한국 왕비 살해 일건(一件) 제2권’에 수록된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다. 당시 일본의 경성 주재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 직접 현장을 조사한 뒤 사건 발생 후 석 달이 채 안된 1895년 12월 21일 본국에 진상을 보고한 내용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乾淸宮)에 침입한 경로와 황후 시해 지점, 황후의 시신을 잠시 안치했던 장소와 시신을 불태운 지점을 표시했다.
경복궁 내부의 세밀한 평면도에 표시된 침입 경로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침입, 경회루 왼쪽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건청궁으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당시 건청궁 내 장안당(長安堂)에는 고종이, 곤령합(坤寧閤)에는 명성황후가 거처하고 있었으며, 이중 어딘지 확인되지 않는 장소로부터 명성황후를 찾아냈다고 기록했다. 이어 일본인들은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 뜰로 황후를 끌고와 시해했으며, 황후의 시신을 곤령합의 일부인 동쪽 건물(옥호루·玉壺樓)의 방 안으로 잠시 옮겨 놓았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에선 그동안 폭도의 일원이었던 일본인과 목격자 등의 수기와 증언을 근거로 명성황후가 옥호루 실내에서 시해된 것으로 여겨 왔으며, 이를 토대로 광복 이후 정부에선 옥호루 근처에 ‘명성황후 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를 세우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는 “실내가 아닌 궁궐 마당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해됐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자객에 의한 암살이 아니라 군사작전과 다름없는 궁성 점령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며 “일본이 살해장소를 오랫동안 은폐했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이 사건이 움직일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명성황후 시해 개념도(上)와 취재내용 필사본(下) /유석재 기자
▲ 지도에서 표시된 점선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乾淸宮)에 침입한 경로. /유석재 기자
日帝 기밀문서에서 드러난 진상
高宗 침소밖 10m 땅바닥서 황후를 난도질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우치다의 보고서가 실린 ‘한국 왕비 살해 일건 제2권’의 표지.
늦가을 새벽, 조선의 황후는 침전 바깥 뜰 위로 내팽개쳐진 뒤 난자(亂刺)당했다. 새로 밝혀진 일본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는, 명성황후의 최후가 지금까지 뮤지컬이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위엄을 갖추고 실내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12일 기자가 찾은 명성황후 시해 장소인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는 내년 6월까지 계획된 복원공사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1929년 일제에 의해 철거된 건청궁 터에는 공사를 위한 잡석이 수북이 쌓여 있었을 뿐 을미사변의 비극적인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복원현장 사무소측은 “발굴 결과 을미사변 당시 이곳 마당은 박석(薄石)을 깔지 않은 흙바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우치다의 보고서를 토대로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여기서 일어났던 비극을 재구성해 본다.
◆폭도들, 경회루 서쪽을 통해 난입
새벽 5시, 60여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광화문 앞에 나타났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일본 견제에 나선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9월에 조선공사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은 일본인 검객과 낭인패들을 불러모아 경복궁 난입 작전을 세웠다. 폭도들은 광화문 안쪽에서 기다리던 일본 수비대의 협조로 광화문을 열었다. 일본 수비대와 폭도들의 진격로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번 보고서에선 광화문을 통과한 일본인들이 흥례문(興禮門) 서쪽의 용성문(用成門)을 통해 침입한 뒤 경회루 서쪽으로 나 있던 도랑을 따라 들어가 신무문(神武門) 앞을 지나 건청궁까지 이른 것으로 표시했다.
▲ 명성황후 시해된 자리 건천궁 복원공사 관계자가 '우치다 문건'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시신이 잠시 안치됐다는 옥호루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정경렬 기자
◆흙바닥 위에서 황후를 짓밟고 찔러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과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 장군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건청궁에 난입한 폭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황후가 어디 있느냐”며 윽박질렀다. 일본인들은 황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황후와 용모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궁녀 3명도 살해했다. 일본인들은 건천궁의 한 지점에서 황후를 찾아내 내동댕이친 후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함께 칼로 찔렀다. 지금까지는 ‘방안에서 황후를 보았다’는 증언이 많았기 때문에 살해 장소가 곤령합의 일부인 옥호루(玉壺樓)일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번 보고서는 이 장소가 침전 밖 흙바닥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은 그때 고종이 머무르고 있던 장안당(長安堂)의 뒷마당이었고, 장안당에서 시해 지점까지는 불과 10m 정도였다. 그럼에도 고종이 명성황후가 죽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시신을 불태운 곳은 녹산
폭도들은 죽은 네 여인 중에서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이번 보고서는 그동안 피살 장소로 알려졌던 옥호루가 임시로 시신을 안치한 장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 뒤 궁에 들어온 미우라는 이곳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화장을 지시했다. 그동안 폭도들이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웠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보고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남쪽 지점에 표시했다. 우치다는 “타고 남은 땔나무들이 아직도 녹산 남쪽에 흩어져 있었고, 그 곁엔 무엇인가 파묻은 자리가 보였다”고 썼다.
▲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 전 옥호루. 그동안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선 시신이 잠시 안치됐던 곳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DB
그간 왜 '실내 시해'로 알려졌나
日, ‘궁궐 유린 만행’ 축소·은폐 노린듯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명성황후가 실외에서 시해됐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온 것은 ‘한국 왕비 살해 일건’에 수록된 우치다 사다쓰지의 사건현장 보고서가 처음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그동안 왜 명성황후의 ‘실내 시해설’을 주장해 왔을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후에 발간한 ‘민후(閔后) 시해사건의 진상’에서 “(고종이 있던 방의) 오른쪽 방은 민(閔) 왕비(=명성황후)의 거실로서 (난입 당시) 여러 명의 부인이 당황했고, 민후는 이 방 안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고 썼다. 수기는 “양복을 입은 조선인이 섞여 들어와 시해한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는 등 시해의 주범이 자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이 밖의 많은 일본측 기록에서도 ‘실내 시해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싣고 있다.
▲ ‘실내 시해’ 상상도 경복궁내 건청궁터 동쪽에 비치돼 있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를 상상한 기록화. 명성황후는 이 그림처럼 실내에서 시해됐다고 알려졌으나 새로 공개된 문건은 건물 밖 뜰에서 시해됐다고 기록했다.
일인들이 당시 진상을 왜곡해서 전한 기록을 보면, ‘실내 시해설’ 역시 을미사변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일본의 조작 중 일부일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실외 시해’란, 단순히 시해 장소가 달라지는 차원이 아니라 공개적인 장소에서 죽인 ‘군사 작전’이었다는 측면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왕이 기거하던 장안당의 뒷마당에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후를 시해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궁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을 것”이라며 “이와 같은 사실은 가해자인 일본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기 때문에 ‘방 안에서 암살했다’며 은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896년 법무협판 권재형(權在衡)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자객이 깊은 방으로 피하던 왕후(황후) 폐하를 찾아 끌어내 칼로 내리쳤다”며 시해 장소에 대해 다소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다.
명성황후 얼굴삽화 첫 공개
1894년 日공사 접견현장 실린 잡지 발견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1894년 일본공사를 궁중에서 접견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삽화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지금까지 명성황후 본인 여부가 불투명한 인물 사진과 초상화 말고는 공개된 장소에서 직접 명성황후를 묘사한 사진이나 스케치 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3일 최근 일본 도쿄의 고서점에서 입수한 일본 잡지 ‘풍속화보(風俗畵報)’ 제84호에 실린 삽화를 공개했다. 1895년 1월 25일 동양당(東陽堂)이 발행한 이 잡지에 실린 삽화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통역으로 보이는 사람을 배석시킨 가운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 1894년 12월 고종과 함께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접견하는 명성황후의 모습이 담긴 일본화가의 삽화. 1895년 1월 발행된 일본 잡지‘풍속화보’에 수록된 것으로, 명성황후를 현장에서 직접 본 뒤 모습을 그린 스케치는 이번이 처음이다.
삽화 속 장면은 1894년 12월 8일의 일로 삽화 위에는 ‘왕과 왕비가 우리 공사의 충언(忠言)에 감동해 비로소 개혁 단행의 단서를 깨우치는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당시 활동했던 일본인 화가 이시쓰카(石塚空翠)의 서명이 있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는 좀처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회견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며 “복식과 배경 묘사가 매우 세밀해 이노우에를 따라갔던 화가가 현장을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림에 묘사된 명성황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 외교관이었던 카를로 로제티의 책 ‘한국과 한국인’(1904) 등에 실려 ‘명성황후 진위 논쟁’을 일으켰던 사진과 비슷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교수는 “머리 모양과 비녀를 두 개 꽂은 모습이 로제티 책의 사진과 같아 그 사진이 실제 명성황후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만물상] 아! 명성황후
김태익 논설위원
110년 전인 1895년(을미년) 10월 7일 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선 파티가 벌어졌다. 명성황후가 친정 조카인 민영준이 궁내부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해 베푼 자리였다.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처참한 궁중 비극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일어났다. 일본 낭인 60여명이 새벽 6시쯤 국왕 부부의 처소인 건청궁에 난입,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운 것(을미사변)이다.
▶낭인 무리 중에 후지카쓰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8·15 광복 후 죽었을 때 집에서 길이 120㎝ 가량 되는 칼이 하나 발견됐다.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계속 ‘민비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떨고 있는 궁녀들 중 용모와 복장이 아름다운 두 명을 참살했다. 또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 옆방의 옥호루로 끌어내 살해했다.…’왕비의 관자놀이에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세 구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쓰노다 후사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던 지엄한 국모였다. 폭도들 중 하나였던 고바야가와는 “방 안에 들어가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 위에는 짧은 흰 속옷만 입고 있었고 아래는 흰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는 맨살이다”고 썼다. 또 한 사람의 폭도 이시즈카 에조는 “정말로 이것은 쓰기 어려우나…”하며 황후를 향해 말 못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을 고백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전하는 또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당시 서울 주재 일본 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옥호루 실내에서가 아니라 마당에 끌려가 여러 사람이 짓밟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것이다. 시해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황후가 누구인지 목표를 정하고 군사작전하듯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진실의 일부일 뿐이다. 폭도들 중에는 하버드대학과 도쿄대를 나온 지식인, 훗날 국회의원 장관 외교관을 지낸 인물들도 많았다. 시해의 주모자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권력의 핵을 이루고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실무책임은 육군 중장 출신 주한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맡았다. 그러니 사실상 일본 정부가 저지른 범죄였다. 폭도들은 훗날 형식상으로 재판에 회부됐다가 모두 풀려나 영달의 길을 걸었다.
힘이 없으면 언제 능욕을 당할지 모르는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명성황후 시해장소 명시' 日문건발굴한 이태진 서울大 교수
글=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사진=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 이태진 교수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가 침전(寢殿)이 아닌 궁궐 뜰이었다고 명시한 일본측 자료 ‘우치다(內田) 문건’을 발굴, 공개한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3일 “이 문건은 궁궐에 난입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만행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며 “그동안 이것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시해 장소를 포함한 사건의 전모를 은폐하려 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치다 문건’은 기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나?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는 1895년 11월에도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12월 21일에 작성한 이번 문건은 처음 밝혀진 것이다. 11월의 보고서는 일본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건 주범을 일본인이라고 명시해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 문건의 신뢰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당시 경성 주재 일본 일등영사였던 우치다는 을미사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사건을 주도했던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도 매우 사이가 나빴다.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된다. 이번 보고서는 당시 일본 외무차관이었던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에게 보낸 것인데, 하라는 나중에 총리대신까지 지낸 유력 인사였다. 우치다란 인물은 국내학계에 알려져 있으나 을미사변 이후 행적 등은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문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보고서의 작성 시점이 을미사변 범인들에 대한 히로시마 재판이 열린 1896년 1월 20일보다 1개월 앞선 점을 주목해야 한다. 히로시마 재판 법정에는 우치다 문건과 같은 내용이 전혀 제출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 보고서에서 보듯이 진상을 파악하고서도 그동안 철저히 숨겼다는 것이 된다.”
―우치다는 동학운동을 주도한 전봉준(全琫準)이 체포된 뒤 신문을 했던 경력의 소유자인데?
“이 사건과는 별개로 놓고 보아야 한다.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솔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문건은 어떻게 찾아냈나?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한·일관계 자료를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 모두 네 권으로 이뤄진 문서철의 일부다. 문서철의 다른 부분에는 공판 기록과 다른 조사 기록들이 있다.”
―보고서에 실린 지도에서 또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나?
“그동안 일부 그림에서만 존재 여부가 알려졌던 경복궁 내 ‘시계탑’이 건청궁 서쪽에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궁궐 안에 신문명의 상징을 세웠다는 것은 당시 왕실의 개화 의지를 보여준다.”
―명성황후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명성황후가 ‘나라를 망친 여인’ 정도로 폄하됐던 것은 일제가 주도한 역사 왜곡의 결과다. 실제로는 고종의 개화 정책을 도와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긍정적인 인물로 봐야 한다.”
1895년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시해한 장소 침실이 아니고 마당이었다
당시 日영사가 보고한 기밀문서 발견 日帝, 진상 알고도 ‘침실弑害’로 왜곡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알려져 온 사진. 사진 속 주인공이 궁녀라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돼 진위 여부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DB사진
1895년 일본인 폭도들이 조선 고종(高宗)의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과 시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일본측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자료는 명성황후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침실 안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침전(寢殿) 밖 뜰로 끌려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시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문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2일,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최근 찾아낸 기밀 문건 ‘한국 왕비 살해 일건(一件) 제2권’에 수록된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다. 당시 일본의 경성 주재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 직접 현장을 조사한 뒤 사건 발생 후 석 달이 채 안된 1895년 12월 21일 본국에 진상을 보고한 내용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乾淸宮)에 침입한 경로와 황후 시해 지점, 황후의 시신을 잠시 안치했던 장소와 시신을 불태운 지점을 표시했다.
경복궁 내부의 세밀한 평면도에 표시된 침입 경로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침입, 경회루 왼쪽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건청궁으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당시 건청궁 내 장안당(長安堂)에는 고종이, 곤령합(坤寧閤)에는 명성황후가 거처하고 있었으며, 이중 어딘지 확인되지 않는 장소로부터 명성황후를 찾아냈다고 기록했다. 이어 일본인들은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 뜰로 황후를 끌고와 시해했으며, 황후의 시신을 곤령합의 일부인 동쪽 건물(옥호루·玉壺樓)의 방 안으로 잠시 옮겨 놓았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에선 그동안 폭도의 일원이었던 일본인과 목격자 등의 수기와 증언을 근거로 명성황후가 옥호루 실내에서 시해된 것으로 여겨 왔으며, 이를 토대로 광복 이후 정부에선 옥호루 근처에 ‘명성황후 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를 세우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는 “실내가 아닌 궁궐 마당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해됐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자객에 의한 암살이 아니라 군사작전과 다름없는 궁성 점령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며 “일본이 살해장소를 오랫동안 은폐했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이 사건이 움직일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명성황후 시해 개념도(上)와 취재내용 필사본(下) /유석재 기자
▲ 지도에서 표시된 점선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乾淸宮)에 침입한 경로. /유석재 기자
日帝 기밀문서에서 드러난 진상
高宗 침소밖 10m 땅바닥서 황후를 난도질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우치다의 보고서가 실린 ‘한국 왕비 살해 일건 제2권’의 표지.
늦가을 새벽, 조선의 황후는 침전 바깥 뜰 위로 내팽개쳐진 뒤 난자(亂刺)당했다. 새로 밝혀진 일본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는, 명성황후의 최후가 지금까지 뮤지컬이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위엄을 갖추고 실내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12일 기자가 찾은 명성황후 시해 장소인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는 내년 6월까지 계획된 복원공사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1929년 일제에 의해 철거된 건청궁 터에는 공사를 위한 잡석이 수북이 쌓여 있었을 뿐 을미사변의 비극적인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복원현장 사무소측은 “발굴 결과 을미사변 당시 이곳 마당은 박석(薄石)을 깔지 않은 흙바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우치다의 보고서를 토대로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여기서 일어났던 비극을 재구성해 본다.
◆폭도들, 경회루 서쪽을 통해 난입
새벽 5시, 60여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광화문 앞에 나타났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일본 견제에 나선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9월에 조선공사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은 일본인 검객과 낭인패들을 불러모아 경복궁 난입 작전을 세웠다. 폭도들은 광화문 안쪽에서 기다리던 일본 수비대의 협조로 광화문을 열었다. 일본 수비대와 폭도들의 진격로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번 보고서에선 광화문을 통과한 일본인들이 흥례문(興禮門) 서쪽의 용성문(用成門)을 통해 침입한 뒤 경회루 서쪽으로 나 있던 도랑을 따라 들어가 신무문(神武門) 앞을 지나 건청궁까지 이른 것으로 표시했다.
▲ 명성황후 시해된 자리 건천궁 복원공사 관계자가 '우치다 문건'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시신이 잠시 안치됐다는 옥호루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정경렬 기자
◆흙바닥 위에서 황후를 짓밟고 찔러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과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 장군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건청궁에 난입한 폭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황후가 어디 있느냐”며 윽박질렀다. 일본인들은 황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황후와 용모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궁녀 3명도 살해했다. 일본인들은 건천궁의 한 지점에서 황후를 찾아내 내동댕이친 후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함께 칼로 찔렀다. 지금까지는 ‘방안에서 황후를 보았다’는 증언이 많았기 때문에 살해 장소가 곤령합의 일부인 옥호루(玉壺樓)일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번 보고서는 이 장소가 침전 밖 흙바닥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은 그때 고종이 머무르고 있던 장안당(長安堂)의 뒷마당이었고, 장안당에서 시해 지점까지는 불과 10m 정도였다. 그럼에도 고종이 명성황후가 죽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시신을 불태운 곳은 녹산
폭도들은 죽은 네 여인 중에서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이번 보고서는 그동안 피살 장소로 알려졌던 옥호루가 임시로 시신을 안치한 장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 뒤 궁에 들어온 미우라는 이곳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화장을 지시했다. 그동안 폭도들이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웠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보고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남쪽 지점에 표시했다. 우치다는 “타고 남은 땔나무들이 아직도 녹산 남쪽에 흩어져 있었고, 그 곁엔 무엇인가 파묻은 자리가 보였다”고 썼다.
▲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 전 옥호루. 그동안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선 시신이 잠시 안치됐던 곳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DB
그간 왜 '실내 시해'로 알려졌나
日, ‘궁궐 유린 만행’ 축소·은폐 노린듯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명성황후가 실외에서 시해됐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온 것은 ‘한국 왕비 살해 일건’에 수록된 우치다 사다쓰지의 사건현장 보고서가 처음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그동안 왜 명성황후의 ‘실내 시해설’을 주장해 왔을까?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후에 발간한 ‘민후(閔后) 시해사건의 진상’에서 “(고종이 있던 방의) 오른쪽 방은 민(閔) 왕비(=명성황후)의 거실로서 (난입 당시) 여러 명의 부인이 당황했고, 민후는 이 방 안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고 썼다. 수기는 “양복을 입은 조선인이 섞여 들어와 시해한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는 등 시해의 주범이 자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이 밖의 많은 일본측 기록에서도 ‘실내 시해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싣고 있다.
▲ ‘실내 시해’ 상상도 경복궁내 건청궁터 동쪽에 비치돼 있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를 상상한 기록화. 명성황후는 이 그림처럼 실내에서 시해됐다고 알려졌으나 새로 공개된 문건은 건물 밖 뜰에서 시해됐다고 기록했다.
일인들이 당시 진상을 왜곡해서 전한 기록을 보면, ‘실내 시해설’ 역시 을미사변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일본의 조작 중 일부일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실외 시해’란, 단순히 시해 장소가 달라지는 차원이 아니라 공개적인 장소에서 죽인 ‘군사 작전’이었다는 측면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왕이 기거하던 장안당의 뒷마당에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후를 시해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궁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을 것”이라며 “이와 같은 사실은 가해자인 일본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기 때문에 ‘방 안에서 암살했다’며 은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896년 법무협판 권재형(權在衡)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자객이 깊은 방으로 피하던 왕후(황후) 폐하를 찾아 끌어내 칼로 내리쳤다”며 시해 장소에 대해 다소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다.
명성황후 얼굴삽화 첫 공개
1894년 日공사 접견현장 실린 잡지 발견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1894년 일본공사를 궁중에서 접견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삽화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지금까지 명성황후 본인 여부가 불투명한 인물 사진과 초상화 말고는 공개된 장소에서 직접 명성황후를 묘사한 사진이나 스케치 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3일 최근 일본 도쿄의 고서점에서 입수한 일본 잡지 ‘풍속화보(風俗畵報)’ 제84호에 실린 삽화를 공개했다. 1895년 1월 25일 동양당(東陽堂)이 발행한 이 잡지에 실린 삽화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통역으로 보이는 사람을 배석시킨 가운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 1894년 12월 고종과 함께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접견하는 명성황후의 모습이 담긴 일본화가의 삽화. 1895년 1월 발행된 일본 잡지‘풍속화보’에 수록된 것으로, 명성황후를 현장에서 직접 본 뒤 모습을 그린 스케치는 이번이 처음이다.
삽화 속 장면은 1894년 12월 8일의 일로 삽화 위에는 ‘왕과 왕비가 우리 공사의 충언(忠言)에 감동해 비로소 개혁 단행의 단서를 깨우치는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당시 활동했던 일본인 화가 이시쓰카(石塚空翠)의 서명이 있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는 좀처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회견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며 “복식과 배경 묘사가 매우 세밀해 이노우에를 따라갔던 화가가 현장을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림에 묘사된 명성황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 외교관이었던 카를로 로제티의 책 ‘한국과 한국인’(1904) 등에 실려 ‘명성황후 진위 논쟁’을 일으켰던 사진과 비슷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교수는 “머리 모양과 비녀를 두 개 꽂은 모습이 로제티 책의 사진과 같아 그 사진이 실제 명성황후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만물상] 아! 명성황후
김태익 논설위원
110년 전인 1895년(을미년) 10월 7일 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선 파티가 벌어졌다. 명성황후가 친정 조카인 민영준이 궁내부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해 베푼 자리였다.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처참한 궁중 비극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일어났다. 일본 낭인 60여명이 새벽 6시쯤 국왕 부부의 처소인 건청궁에 난입,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운 것(을미사변)이다.
▶낭인 무리 중에 후지카쓰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8·15 광복 후 죽었을 때 집에서 길이 120㎝ 가량 되는 칼이 하나 발견됐다.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계속 ‘민비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떨고 있는 궁녀들 중 용모와 복장이 아름다운 두 명을 참살했다. 또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 옆방의 옥호루로 끌어내 살해했다.…’왕비의 관자놀이에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세 구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쓰노다 후사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던 지엄한 국모였다. 폭도들 중 하나였던 고바야가와는 “방 안에 들어가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 위에는 짧은 흰 속옷만 입고 있었고 아래는 흰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는 맨살이다”고 썼다. 또 한 사람의 폭도 이시즈카 에조는 “정말로 이것은 쓰기 어려우나…”하며 황후를 향해 말 못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을 고백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전하는 또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당시 서울 주재 일본 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옥호루 실내에서가 아니라 마당에 끌려가 여러 사람이 짓밟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것이다. 시해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황후가 누구인지 목표를 정하고 군사작전하듯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진실의 일부일 뿐이다. 폭도들 중에는 하버드대학과 도쿄대를 나온 지식인, 훗날 국회의원 장관 외교관을 지낸 인물들도 많았다. 시해의 주모자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권력의 핵을 이루고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실무책임은 육군 중장 출신 주한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맡았다. 그러니 사실상 일본 정부가 저지른 범죄였다. 폭도들은 훗날 형식상으로 재판에 회부됐다가 모두 풀려나 영달의 길을 걸었다.
힘이 없으면 언제 능욕을 당할지 모르는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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