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땅이름 왜 털지 못하나
서을 시내 동(洞)이름 30% 일제 때 지명 사용
일제잔재를 아직도 너무도 많이 안고 사는 우리들,
그 중 한국 땅이름학회장 배우리씨가 제기한 우리가 아직도 쓰고 있는 지명들 중 일제 때 일본이 우리 것을 말살하고자 제멋대로 바꾼 지명을 아직도 쓰고 있는 현실을 그의 글을 통해 알아 보자.
o 출처 : 이름사랑 http://namelove.com/menu5_4.html
일본식 땅이름 |
2001년 09월 20일 [마이너리티의 소리]
일본식 땅이름 왜 털지 못하나
배우리 <한국 땅이름학회 회장>
용산 미군 헬기장을 중지도로 옮길 것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내가 관계하는 모임의 회원들은 아침부터 서로 전화를 거느라 부산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의문의 중심은 헬기장의 이전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중지도` 라는 섬 이름이 문제였다. 몇 년 동안 이 섬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는 '중지도(中之島)'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었다. 대신 '노들섬'이 등장했다. 옳거니!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섬의 이름은 분명히 '노들섬'이었기 때문이다. 광복 50주년 되던 해에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확정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느닷없이 '중지도'란 이름이 튀어나와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든 것이다. `중지도(中之島)` 라는 이름은 엄밀히 말하여 땅이름이 아니다. '가운데의 섬(나카노시마)'이란 뜻의 일본말이다. 1910년대에 우리 나라를 거저 삼키다시피한 일본은 갖가지 명목으로 곳곳을 뒤지며 이름이 정착되지 않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산.강.내.섬 등에 자기들 임의대로 이름을 붙였다. '물 가운데의 섬'이란 뜻의 '중지도'니 '하중도(河中島)'니 하는 식의 이름(실제 이름도 아니지만)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광복 50주년이던 95년엔 어느 해보다 일본 잔재 청산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식 땅이름의 정리. 각 자치단체나 해당 지역 지명위원회가 일본식 이름을 찾아 정리해 나갔다. 최종 결정은 중앙지명위원회에서 했다. 무척 많은 일본식 땅이름을 찾아내 우리 식으로 바꿔 세상에 알렸다. 새로 제작된 지도들이 새 이름으로 하나하나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만 해도 '인왕산'이 '仁旺山'에서 '仁王山'으로, '욱천(旭川)'은 '만초천(蔓草川)', '중지도(中之島)'는 '노들섬'이 됐다. 그러나 이런 약속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일부 지도는 옛날 일본식 표기 그대로다. 몇 해 전에 필자는 남영역 근처의 한 일터에서 커다랗게 붙여 놓은 '욱천(旭川) 정비공사'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욱천을 '만초천'으로 고쳐 쓰기로 했으면 '만초천 정비공사'이지 어떻게 '욱천 정비공사'인가? 일본 사람 보라고 하는 공사가 아니지 않은가. 일제시대 서울 원효로 일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자기들 고향에 있는 이름을 따다 붙인 것인데, 이것을 정식 이름으로 쓰고 있다니. 관에서는 왜 이것을 네거리에 버젓이 붙여 놓고 공사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이 땅에는 정리되지 않은 일본식 이름이 무척 많다. 지금 서울에서 명소나 다름없는 '인사동(仁寺洞)'만 해도 그렇다.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보면 '인사동'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관인방(寬仁坊)'과 '사동(寺洞)'이란 이름이 나온다. 원래는 원각사(圓覺寺)라는 절이 있는 근처 마을이기에 '절골'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사동'이다. 절골의 이웃마을인 '탑골(탑동)'과 '이문골' 역시 이 일대에선 잘 알려진 마을이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우리부터 일본 냄새를 말끔히 털어내는 것이다. 무조건 남이 쓰니 나도 써도 좋다는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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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011009 보도
서울 시내 동이름 30% 일제때 지명 사용
서울의 동(洞) 이름 10개 중 3개꼴로 우리 고유의 명칭이 아닌 일본식 지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말 쓰기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땅이름학회(회장 배우리) 가 8일 발표한 '서울 지명 현황'에 따르면 종로.서대문 등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8개구의 4백70개동중 31.1%인 1백46개동이 일제때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특히 종로구의 경우 87개 동 가운데 53개동(60.9%) 이 일본식 지명이었다. 종로구 관수동의 경우 '넓은 다리(板橋)'라는 의미의 '너더리'로 불리던 것을 일제가 청계천의 흐름을 살피는 곳이란 뜻의 관수동(觀水洞) 으로 바꾼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잣골'로 불리던 동숭동도 일제가 행정편의를 위해 숭교방(조선시대 행정구역) 의 동쪽이란 뜻의 동숭동(東崇洞) 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전통거리인 인사동(仁寺洞) 도 큰 절(원각사) 옆에 있는 동네란 뜻의 대사동(大寺洞) 이 더 적절하다고 학회는 주장했다. 배우리 회장은 "한강 중지도(中之島) 는 공식적으로 노들섬,인왕산의 한자표기는 '仁旺山'에서 '日'을 뺀 '仁王山'으로 표기키로 했으나 행정기관에서 조차 이를 지키기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동명을 바꾸면 65개 관계법령에 따른 후속조치가 있어야 한다"며 "이처럼 엄청난 행정수요와 혼란이 있어 개명은 어렵지만 지하철 역 등 새로 생기는 시설물에는 최대한 고유 지명을 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 ||
970320 경향신문
"일제 때 지명 바꿔라"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장 주장-
"은평구는 갈현구로, 仁旺山(인왕산)은 仁王山으로, 중랑천은 한내(漢 川)로, 수서동은 궁촌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장은 18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서울시 주최 제392기 시민대학에서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뀐 땅이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회장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내의 일본식 동이름은 전체의 31%. 특히 종로구의 경우 전체 87개 동 가운데 61%인 53개 동이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고 배회장은 밝혔다. 일제는 창씨개명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얼을 하나로 묶는 땅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인왕산. 신라와 고려시대에 개최된 호국법회인 인왕도량(仁王道場)의 그 「인왕」을 따서 지은 인왕산은 일제 때 어느틈에 '仁旺山'으로 이름이 변했다. '旺'은 일본의 '日'과 '王'을 합친 것으로, 일본이 조선의 왕을 누른다는 뜻 . 이 밖에 서달산이 일본인 별장 이름을 딴 명수대(明水臺)로 둔갑했고 일 제 때 지명인 연은방과 상평방에서 한 자씩 따온 은평구도 일제의 잔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 일본어로 「가운데의 섬」을 일컫는 중지도(中之島)가 있는가 하면 일제 때 쌀창고가 있던 북미창정(北米倉町)은 고작 쌀미자만 빼고 북창동으로 굳어졌다. 배회장은 원래 궁말 또는 궁촌(宮村)이었던 수서동은 궁촌동으로, 안양 천은 우리 고유이름인 갈내로, 신사동은 새펄 또는 사평동으로, 현저동은 모래재(沙峴)의 밑이라 해서 예부터 일컬어졌던 사현동으로, 약고개(藥峴) 였던 중림동은 약현동으로 각각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회장은 행정 지명을 갑자기 바꿀 경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불가피한 분구(分區)나 분동(分洞) 때 우리 고유의 땅이름을 되찾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일제 때 청풍동과 백운동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청운동의 경우 지명은 청풍동으로, 그 곳을 지나는 길은 백운로로 부르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기환기자> | ||
00911106 연합 서울시내 洞이름중 30%에서 일본 냄새 한국 땅이름 학회 세미나서 지적 (서울=聯合) 서울시내 지명 가운데 상당부분에서 아직 日帝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돼 가능한 범위내에서 적절한 시정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서울교통연수원 배우리 교수는 9일 한국땅이름학회 세미나(한글학회 강당)에서 발표할 논문에서 서울 시내 洞이름 가운데 약 30%에서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 다고 지적했다. 갑오경장 당시 5署47坊2백88契7백75洞이었던 서울의 행정구역은 우리가 주권을 잃으면서 난도질을 당하기 시작해 '한성'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경기도의 京城府로 바뀐다. 총독부는 또 경성부 행정구역에 部와 面을 만들어 성안은 5部와 36坊으로 성밖 은 城外八面을 만들면서 지명을 제멋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배우리 교수는 이 과정에서 "우리의 얼과 정신이 어린 무형문화재인 땅이름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기 시작했다"면서 "아무 원칙도 없이 순전히 자기들의 편리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분석했다. 그 때부터 간선도로의 이름에 '丁目','通'이라는 이름이 붙고 黃金町(을지로), 서대문정(신문로), 元町(원효로), 竹添町(충정로)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지명이 등장 하게 된다. '구리개' 혹은 '굴개'로 불려진 을지로의 경우에는 구리(銅)가 일본어로 황금이 된다고 황금정으로 바꿨다고 한다. 특히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던 종로일대의 지명은 아예 없어지는 대신 관수동, 동숭동, 공평동, 권농동, 예지동, 낙원동, 원남동, 원서동 등의 이름이 새로 생기고 堅平洞은 堅志洞으로, 桂生洞은 그냥 桂洞으로 변형됐다. 日帝의 인위적인 칼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던 을지로 및 용산 일대는 "일본식 이름으로 깔아버렸다"는 것이 배우리 교수의 표현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오시마(大島) 부대가 한동안 주둔했었다는 용문동 일대를 大島町으로, 일본군 부대가 있던 남영동 일대를 鍊兵町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 오밀조밀하게 모여 살고있던 종로구 일대에서는 2개의 지명이 하나로 뭉쳐져 원래의 지명이 완전히 사라졌다. 배우리 교수는 이 지역에 있는 15개동의 이름이 2개 지명이 합쳐진 것이라면서 수송동의 松峴, 옥인동의 玉洞, 운니동의 泥洞, 인사동의 寺洞은 '솔고개','옥골',' 진골','절골'등 아름다운 원래의 이름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여기에다 넝굴풀이 많아 蔓草川이라고 불리던 한강의 지류가 아직 일본냄새가 짙은 旭川으로 남아있고 일본인들의 별장지였던 明水臺의 경우에는 '서달산'이라는 아름다운 옛이름이 있는데도 학교명, 성당이름 등에 까지 애용되고 있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쌀창고가 있었다고 일제가 北米倉町과 南米倉町으로 불렀던 남대문 일대가 米자 가 빠진 북창동, 남창동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뒤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배교수는 이같은 실례를 들면서 법정동수 20개 이상인 서울의 區 가운데서 모두 4백70개 洞이름을 조사한 결과, 31.1%에 해당하는 1백46개 洞이름이 "일제의 칼질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배교수는 "본래의 洞이름을 찾는데는 상당한 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하천이나 산이름을 본래의 이름으로 당장 바꾸더라도 별 어려움이 없다"고 주장하고 "분동을 하거나 신설도로가 생기면 가능한 본래 지명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 제안했다. /// | ||
990301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서울 동(洞)이름 30%가 일제 잔재"
일제는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이른바 창씨개명 (創氏改名)이라 해서 한국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 고유 지명도 마음대로 일본식으로 고쳐 버렸다. 그런데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식 인명(人名)은 본래 이름으로 되돌려졌으나 일제가 남긴 일본식 지명은 광복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본래 이름을 되찾지 못한 채 전국 곳곳에 버젓이 남아 있다. 도대체 지금도 살아있는 일본식 지명은 얼마나 될까? 최근 시민문화운동단체로 출범한 열린문화운동시민연합이 개최한 공개토론회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올바른 땅이름 제정의 과제'란 주제로 일본식 지명의 현 황과 문제점을 발표한 이홍환 국학연구소 이사장은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이씨와 땅이름 조사전문가인 배우리씨 등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인사동이니 성북동이니 하는 전체 동(洞) 이름 가운데 무려 30% 가량이 일제가 식민통 치기간 동안 마음대로 바꾼 일본식 지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일제때도 있었던 종로.서대문.마포.중.성동.영등포.용산.성북 등 8개 구 470개 동 이름 유래를 조사한 결과 31.1%인 146개 동이 일제가 만든 것이었다. 특히 종로구의 경우 87개동 중 무려 60.9%인 53개동이 일본식이었으며 서대문구 도 20개동 중 8개동(40%)이 일제 잔재를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종로구만 예로 들 경우 넓은 다리라는 뜻의 너더리(板橋)라는 이름이 청계천 흐름을 살핀다는 일본식 이름의 관수동(觀水洞)으로 바뀌었고 잣골(栢洞)이라는 순 우 리 이름도 숭교방(崇敎坊)의 동쪽이라는 뜻의 `동숭동'으로 변조됐으며 회나무골(槐洞 혹은 檜木洞) 또한 의금부가 있는 자리라 해서 공평동(公平洞)이라는 일본이름으 로 둔갑했다. 또 수문골(農圃洞)은 권농동(勸農洞)으로,옥방골(玉房洞)은 예지동(禮智洞)으로, 탑골(塔洞)은 낙원동(樂園洞)으로,상삿골(相思洞)은 원남동(苑南洞)으로,원골(苑洞) 은 원서동(苑西洞)으로 바뀌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을지로 근처나 용산 일대는 일본식 지명으로 도 배를 하다시피 했다. 비단 일제는 동이름 뿐만 아니라 도시나 고개나 골,거리 이름도 마음대로 바꿔 솔고개는 송현(松峴)으로, 옥골은 옥동(玉洞)으로, 진골은 운니동의 이동(泥洞)으로, 절골은 인사동의 사동(寺洞)으로 마음대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사정은 지방도 마찬가지여서 충주 일대 내나 물과 관련이 있었던 달내가 달천동으로,가리여울이 용탄동으로,목수울이 목행동이란 이상한 한자식 지명으로 변조됐고 충남 홍주군은 홍성군으로, 경시 일뫼(韓山)는 현재의 신도시 일산(一山)으 로 바뀌었다. 이홍환씨는 "일본식 지명은 일일이 거론하기가 숨이 벅찰 정도"라면서 "정부당 국이 앞장서 새로 개발되는 도시나 공원,아파트,지하철역,길 등 많은 시설물에 우리 고유 이름을 부여하고 사라져간 옛 땅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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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220 연합통신 獨島의 역사적 유래 담은 碑 세우기로 =민간 학술단체들 `독도지키기'결의문
(서울=聯合) 獨島 영유권과 관련, 일본정부가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민간 학술단체들이 공동으로 독도문제를 주제로 한 학술세미나를 개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이를 알리는 유래비를 올해 안에 세우기로 결의했 다. 한국땅이름학회(회장 배우리), 토문회(회장 梁泰鎭), 한말글연구회(회장 정재도) 등 민간 학술단체들은 22일 오후 3시 서울 신문로 한글회관 강당에서 독도문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독도 지키기 결의문'을 채택했다. 참석자들은 이 결의문에서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지명학적으로 우 리 영토임이 확실함에도 일본이 이를 자기 영토로 억지 주장하는 일을 반복하는 현 실을 개탄한다"면서 "앞으로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위협하는 억지 간섭을 펴올 경우 우리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모든 피해에 대해 강하게 그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또 "독도가 우리 땅으로 엄연히 과거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리는 `독도 유래비'를 올해 안에 세울 것"이라면서 "이 계획의 실행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모든 지원을 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은 <독도와 죽도의 땅이름 고찰>이 란 주제발표에서 "獨島라는 한자식 이름은 울릉군청에 보관돼 있는 광무 10년(1906) 음력 3월5일 울릉군수가 보고한 보고서에 `本郡所屬獨島'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종 18년(1881) 울릉도 개척이후 울릉도주민이 지어낸 듯하다"면서 "그러나 실제 이 이름은 우리 어부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토박이말로 써 온 `독섬'에 바탕을 둔 것임에 틀림없으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이 섬을 `독섬'이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배회장에 따르면 `바위섬'의 뜻을 갖고 있는 `독섬'이 전국적으로 30여개에 달 하며 `독섬께', `독섬배기'등 `독섬'이라는 단어를 달거나 `독'자를 단 땅이름은 2 천여개나 발견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와 달리 독도를 `이서다케시마(石義竹島)', 혹은 다케시마(竹島) 라고 하지만 죽도라는 말도 우리 독도의 옛이름인 `于山島'나 `三峯島'와 뜻이 같다 는 것이 배회장의 주장. 죽도는 `대섬'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산의 섬'을 뜻하는 `달섬(山島)'이 변 한 말을 일본인들이 한자로 옮긴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또 `대'는 우리말에서 `山' 의 옛말인 `닫(달)'이 변한 말로 보이며, 독도의 옛이름인 `우산'이나 `삼봉도'도 모두 `산'이 들어간 땅이름이므로 이 이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배회장은 "어떻든 독도는 우리 토박이 땅이름으로 `독섬'또는 `대섬'이며, 이 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불러온 우리의 토박이 땅이름이므로 독도는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영토임이 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 土門會 梁泰鎭 회장은 <문헌사적으로 본 독도영유권론>에 대한 발표를 통해 "일본인 스스로가 저술한 문헌에도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시인한 기록들이 적지 않 다"면서 1905년 9월 일본의 한 지리학자가 간행한 <신한국지리>, 일본의 관찬산업지 로 1905년 5월에 나온 <조선산업지>, 1911년 10월에 출간된 <한국병합기념사>, 같은 해에 나온 <한국수산지>, 1930년 6월에 출간된 <歷史地理> 제55권 제6호 등을 예로 들었다. 이 날 세미나에서는 이 밖에도 명지대 김명기교수가 <국제법으로 본 독도영유권>, 서길수 고구려연구소장, 김정권 한민족 정통사상사연구소장, 이형석 백두문화연구원장 등이 <일본측 주장에 대한 대응 방안>에 대해 각각 발표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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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302 연합통신 일본식 地名, 우리 이름으로 개명해야 =땅이름학회 배우리 부회장 주장 서울시내 洞이름의 31%가 일본식 명칭
(서울=聯合) 日帝의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일본식으로 변경된 전국의 지명들에 토박이 땅이름을 되찾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부회장은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소장 安斗淳) 주최로 7일 서울시립대 본관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서울시민문화대학 강의에서 <식민지 시대 의 지명 수난사>라는 주제강연을 통해 "전국의 동네 이름들 중에는 산이나 물과 관 련된 토박이 땅이름이 많았으나 日帝의 민족말살정책과 日人들의 편의에 따라 일본 식 지명으로 개명돼 아직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裵부회장에 따르면 서울의 옛 지명중에는 내(川)나 물과 관련된 것으로 무수막( 水鐵.금호동), 모래내(沙川,남가좌동), 한내(上溪-中溪-下溪洞), 청숫골(淸潭), 물 치(水色), 새내(新川), 등 다수가 있었다. 또 고개나 산.골짜기.산등성이와 관련된 이름으로 애오개(阿峴), 배오개(梨峴.종로4가), 진고개(泥峴.충무로), 구리개(銅峴. 을지로2가), 박석고개(簿石峴.갈현동)등이 있었으며 두텁바위(厚岩), 북바위(鍾岩), 돌마리(石村), 돌무리(道谷) 등 바위나 돌과 관련된 地名도 많았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日帝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성을 京城府로 고쳐서 경기도에 붙여 버리는 등 대대적인 행정구역 및 지명개편을 단행한 결과, 오랫동안 불리워 왔던 地名들이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게 됐다는 것이다. 일제는 여러 부락을 한 행정구역에 묶어놓고 각 지명에서 한 글자씩 따서 새로운 지명을 만든 경우가 많았다. 서울의 육상궁과 온정동을 합쳐 宮井洞으로 개편하고 옥골과 인왕골을 합쳐 玉仁洞으로, 경기도 성남의 장터말(盆店)과 당모루(唐隅) 를 합쳐 盆唐洞으로 개편한 것이 대표적이다. 원래의 이름을 아예 없애 버리고 비슷한 한자로 바꾸어 놓거나 일본식 지명으로 대체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는 仁王山이었으나 일제는 자신들의 천황을 의미하는 旺자로 슬그머니 바꿔 仁旺山으로 지도 등에 표기했다. 또 지금의 청파동과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로4가에서 한강으로 유입하는 서울 서부 지역의 한강 지류는 원래 덩굴풀이 많아 蔓草川이라고 불렀던 유명한 내(川) 였으나 일제는 이 내의 이름에 일본에 있는 아사히카와(旭川)란 이름을 옮겨붙였다. 일본인의 별장이 있었던 한강가의 흑석동 일부는 당시 일본인 별장 이름 그대로 明水臺로 통하고 있으며,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제때 태평통이라고 이름붙여졌던 곳은 `通'을 `路'자로만 바꾼 채 태평로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裵부회장에 따르면 서울시내에서 洞수가 20개 이상인 종로구.중구 등을 대상으 로 洞이름을 조사한 결과 총 4백70개 洞중 31.1%에 달하는 1백46개 동이 일본식 동 이름인 것으로 나타났다. 종로구의 경우 87개洞중 60.9%인 53개동이 일본식 지명이 었고, 서대문구는 20개동중 8개(40%), 마포구는 27개동중 9개(33.3%), 중구는 74개 동중 22개(29.7%)가 일본식 이름이었다. 裵부회장은 "광복 50년이 되도록 일본인이 남겨놓은 땅이름이 그대로 남아 지금 도 계속 지도에도 표기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겨레의 수치일 뿐 아니라 후세들 에게도 주체성을 잃은 조상이라는 창피스런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우리식 땅이름으로 고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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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220 연합통신 <화제> "漢字 地名 보고 시설부지 찾아라" 동굴처분식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은 掘業島 雲鶴위성관제소, 靈光원전등 "예언지명" 수두룩
(서울=聯合) "국가의 대형시설부지를 선정하려면 漢字 地名이 적힌 전국지도를 보고 시설의 목적과 관련된 이름의 땅을 찾아라." 지난 6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전국민적 관심사가 된 방사성폐기물처분장부지 가 서해 掘業島로 확정되자 항간에 나돌고 있는 말이다. 이는 마치 掘業島가 애초부터 해안의 암반에 동굴을 뚫어 그속에 폐기물을 저장 하는 동굴처분방식의 폐기물처분장으로 예정된 땅인 것처럼 이름에 '굴을 판다'는 뜻의 掘字를 갖고 있기 때문. 오랜 기간동안 전국 2백10개 도서와 2백92개 임해지역 및 90개 폐광지역을 조사 한 끝에 기술적.지질적 타당성은 물론 지역주민의 수용성등 여러 측면에서 최적지로 선정된 곳이 掘業島였으니 "地名보고 찾으라"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기묘하게도 땅이름과 현재의 상황, 특히 국가의 대형시설 입지상황과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이른바 '遇合지명'(豫言지명이라고도 함)이 많아 놀라움을 주고 있다. 내년 6월 발사되는 무궁화위성의 지상관제소부지는 전국 30개 후보지를 대상으 로 주파수간섭등 전파환경조사를 실시한 끝에 지난 92년 최적지로 선정된 곳은 경기 용인 雲鶴里였다. '구름위로 나는 학'과 위성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전남 靈光이란 지명이 뜻하는 '신비로운 빛'은 원자 력과 관련이 있고 전남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곳은 쇠섬으로 '쇠를 녹이는 섬'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국제공항이 건설되고 있는 경기 永宗島는 원래의 토박이 땅이름 이 '제비섬'(紫燕島)으로 조선조 중기부터 지금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제비' 는 비행기, 永宗은 '긴 마루'의 뜻으로 활주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종도로 확정되기 전에는 한때 충북 청원 飛上里와 飛下里가 후보지로 떠올랐는데 이곳은 '철새가 오르는 곳'(새오름)과 '철새가 내리는 곳'(새내림)이란 뜻으로 역시 비행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정부출연연구소와 기업연구소등이 밀집해 있는 大德연구단지는 우리나라의 인재 들이 모여 있어 국가적으로 '큰 덕'을 이루는 곳이 된다는 것. 지명의 예언성이나 상징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국땅이름학회의 배우리 부회장은 "지명이 땅의 형국이나 토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면서 "지명이 현재의 상황과 일치하는 예언지명이 너무 많아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배부회장은 땅이름이 갖고 있는 이같은 예언성에 대해 "대규모 국가시설부지를 지명만 갖고 정할 수는 없지만 참고할 수는 있을 것"이라며 "땅이름을 지은 우리 조 상들의 먼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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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지난 1993~4년 서울 시립대학에서 치른 3차례의 시민 교양 강좌(서울특별시 후원)에서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의 강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입니다.
940317 일제서울 강의 14시(2시간) 땅강 시립대 시민 교양 강좌 `서울의 지명
서울의 땅이름과 일제에 의한 상처
배 우 리 * 한국 땅이름 학회 부회장 * 서울시 교통 연수원 교수
곳;서울 시립대학 대강당 때;제1기 1993년 6월 18일(금) 오후 2시 ;제2기 1993년 9월 3일(금) 오후 2시 ;제4기 1994년 3월 17일(목) 오후 2시
----------------------------------------------------------------------------- 후원; 서울 특별시 주최; 서울시립대학교 시민 생활 교육원
㈎ 서울의 땅이름
□ 서울이 도읍으로 정해진 배경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 도읍터를 한양(漢陽.서울)으로 정할 때 가장 눈여겨 본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땅모양과 방어상의 우수성이었다. 당시에 무학대사, 조준(좌정승), 김세형(우정승) 등은 지금의 서울터를 보고 경치가 좋고 산으로 둘러싸여 수도로서 가장 알맞은 터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북쪽에 화산(華山;삼각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용이 내리고 범이 쭈그려 앉은 형세가 있고 남쪽은 한강으로 띠를 둘러---- 정말 산과 강이 잘 어울어진 곳이다'라고 하여 서울의 땅모양이 지리.방어상 최적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울은 북쪽의 북악산(北岳山;342m), 동쪽의 낙산(駱山.駱駝山;125m), 남쪽의 목멱산(木覓山.남산;262m), 서쪽의 인왕산(仁王山;338m) 등 4개의 산이 가까이 울타리를 치고 있으며, 그 밖으로 북쪽의 북한산(北漢山;836m), 동쪽의 용마산(龍馬山;348m), 남쪽의 관악산(冠岳山;632m), 서쪽의 덕양산(德陽山;125m) 등 4 개의 산이 외곽을 튼튼히 두르고 있다. 안쪽 4 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 하고, 바깥쪽 4 개의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한다. 내사산의 안쪽을 청계천이 흐르고 있고, 또 남쪽으로 한강이 외곽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면서 수운(水運)에 큰 구실을 하고, 그 유역에 넓은 평지를 이루어 놓아 주거 지역으로 알맞아 수도(首都)로서 최적의 여건이었다. 그리고,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정치 중심지로 삼기에 더없이 좋았다.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서울의 좋은 입지 조건에 만족, 전국의 여러 후보지 중에 이 곳을 선택하고, 나라를 세운 1392년의 2년 후인 1394년에 고려의 5백 년 서울이었던 개성을 버리고 역사적인 천도를 단행했다.
□ '서울'은 '머릿도시'의 뜻
'서울'이라는 지명을 두고 항간에서 그 유래를 엉뚱하게 전하는 사람이 있어 혼선을 야기시키고 있다. 첫째, 서울이라는 지명이 '눈(雪)의 울타리'라는 뜻의 '설(雪)울'에서 왔다는 설이다. 조선 초에 서울에 성을 쌓는데, 하루는 눈이 많이 와서 그 눈의 녹은 자국을 따라 성을 쌓아 '설울'이 됐다는 것이다. 둘째, 서울은 성(城)으로 둘러싸여 '성(城)의 울타리'라는 뜻에서 '성(城)울'이었는데, 그것이 변해 '서울'이 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말일 뿐,아무런 역사적 근거나 문헌-어원적 근거가 없다. '눈의 울타리'의 '설(雪)+울' 또는 '성(城)의 울타리'의 '성(城)+울'이 변해 '서울'이 되었다는 주장은 우선 '설(雪)울-성(城)+울'이라고 하는, 한자말과 우리말의 복합 관계가 매우 부자연스럽고,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설울-성울'이 '서울'로 되었다는 주장은 우리말의 보편적 변화 과정으로 볼 때 타당하지 못하다. 서울'은 신라 때부터 써 온 말임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은 '서벌' 또는 '서라벌'이 그 바탕일 것으로 보이는데, 고 양주동 님이 한글로 풀이한 신라 시대의 향가 <처용가(處容歌)>의 ' '도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말로 보고 있다.
이 노래에 담긴 뜻은 이러하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아내의 것이지만 둘은 또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아내이지만 빼앗은 것을 어찌할 것인가?' 이 노래의 가장 앞에 '새발(새벌)'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새잘(새절)은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해당하고, 이것은 당시의 말로 '수도(首都)'에 해당하며, 신라 경주의 한자식 이름인 '서벌(徐伐)' 또는 '서라벌(徐羅伐.徐耶伐)'이 바로 이 '새벌'의 음차식(音借式) 표기로 여겨지고 있다. 학자들은 국호인 '신라(新羅)'나 '시림(始林)'도 '새발(서블)'이 음차된 이름으로 보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所夫里=부여)'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岳)'과 태봉의 수도인 '철원(鐵原)' 등도 모두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의 뜻인 이 '서벌-새벌'은 그 뒤로 조금씩 음이 변하면서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훈민정음이 나오고 난 후의 조선 시대의 문헌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서울'의 표기가 문헌에 따라서, '셔블' 또는 '셔불', '셔울' 등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문헌들에서는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이 이처럼 '셔블','셔울' 등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아서 신라 초 이래로 '머릿고을(首都)'의 개념으로 계속 써 왔던 '서울'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소리 변화 과정을 거쳐 정착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벌>셔벌>셔블>셔불>셔울>서울
□ 풍수적으로 본 서울의 지형
서울의 지형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은 곳임은 옛날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왔다. 우선, 서울은 주산인 북악(北岳)을 중심으로 하여 좌청룡,우백호가 아주 잘 갖춰져 있다.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맥은 주산인 북악에서 동쪽으로 뻗어 성북동의 응봉(鷹峰)을 거쳐 동대문 북쪽의 낙산(駱山)까지 이어진다. 또, 우백호에 해당하는 맥은 북악에서 서쪽으로 인왕산과 안산(鞍山)을 거쳐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뻗어내리다가 애오개[阿峴]와 큰고개[大峴] 등의 고개를 만들고, 계속 그 기세를 이어서 용마루를 거쳐 작은 산을 만들어 놓고, 마포 앞 한강가에 이르러서야 머리를 수그리고 나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우백호의 마지막 산이 '용산(龍山)'인데, 이것은 용이 물을 찾아 내려오다가 한강의 물을 만나 그 물을 먹으려고 머리를 수그린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다. 좌청룡-우백호가 잘 갖춰진 데다가 주산 앞쪽으로 안산(案山)인 남산(南山)이 있어 장풍(藏風)의 풍수적 요건을 갖춘 서울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좋은 명당(明堂)으로 평가되었다. 또, 앞에 한강이 판국을 싸고도는 것도 좋은 수구(水口) 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백호의 맥보다 좌청룡의 맥이 너무 짧고 허한 것이 조금 흠이고, 궁터인 경복궁에서 화산(火山)인 관악산이 빤히 바라보이는 것도 약점이다. 특히, 관악산의 화기설(火氣說)은 궁중에 큰 불안을 안겨 주어, 조선 오백 년을 두고 이 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보충함)에 어지간히 신경을 쓰게도 했다.
□ 서울의 성곽과 사대문
서울 주위엔 백악(白岳;북악), 낙산(駱山), 목멱산(木覓山;남산), 인왕산(仁王山)을 이어 거의 원에 가까운 모양으로 도성(都城)을 쌓았다. 이 성은 돌과 흙으로 쌓은 것으로, 태종 5년(1405)에 정월에 시작하여 그 해 가을에 완성하였다. 둘레가 약 19Km인 이 성에는 사방으로 동 서 남 북의 네 대문과 그 사이마다 작은 문 넷을 내었다.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의 이름은 각각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동쪽; 동대문;흥인문(興仁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흥화문=興化門) *서쪽; 서대문;돈의문(敦義門), 서소문;소의문(昭義門.소덕문=昭德門) *남쪽;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남소문;광희문(光熙門.시구문=屍口門) *북쪽; 북대문;숙정문(肅靖門), 북소문;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그 뒤, 성이 헐어 몇 차례 보수를 거듭하고, 흙성(土城)인 부분은 돌로 쌓아 석성(石城)으로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몇백 년을 온전히 유지하던 성곽과 문루들이 1910년대에 들어와 일제에 의해 불행하게도 도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헐려 지금은 몇 개의 문루와 함께 산간에 성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 시대의 서울 영역은 도성 안에 국한한 것은 아니고, 성 밖 10리까지도 포함했다. 이러한 지역을 따로 성저십리(城低十里)라 해서 성 안 지역과 구분하기도 했는데, 동쪽으로는 지금의 청량리-왕십리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남쪽으론 한강가 한남동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서쪽으로는 용산-마포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리고,북쪽으로는 북한산 밑의 세검정-부암동까지 이르는 지역이었다.
□ 서울의 옛 명칭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기 이전의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양(漢陽)이었다. 이 '한양'이라는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써 온 것이다. 삼국 초기에 서울은 백제의 수도로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불렀다. 그 뒤,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나서 한산주(漢山州)라고 불렀으며, 경덕왕 때에 이르러 지금의 서울 지역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였다. 고려 시대에 와서 이 지역을 양주(楊州)라고 개칭, 지방 군현으로 존속시켜 왔다. 1067년에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한 서울은 행정구획의 단위로 정치적인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고려 25대 충렬왕 34년(1308)에 서울은 한양부(漢陽府)가 된다. 조선 태조 4년(1396) 6월부터 결정된 한성부(漢城府)는 약 5백 년 동안의 공식 지명이긴 했어도 민중 속에서는 오랫동안 불려 왔던 '한양' 또는 '서울'이란 말이 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의해 서울은 경성(京城)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말았다. 1945년,광복을 맞아 '서울시'로 되면서,현재까지도 우리 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글식 법정 지명이 나오는 역사적 계기가 됐다. 다음해 8월에 와서 서울은 자유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신라 때부터 '수도(首都)'의 개념으로 겨레의 생각 속에 깊이 뿌리박아 온 '서울'이란 말은 어느 한 곳의 땅이름이기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 도읍지가 되든 보통 명사처럼 붙어 다녔다.
□ 서울의 옛 행정구역
조선 시대에 서울의 행정구역은 크게 다섯으로 나누었다. 즉, 서울이 한성부로 바뀌던 이듬해인 1397년, 나라에서는 수도의 영역을 성 안의 지역과 성 밖의 지역(성으로부터 대체로 10리에 이르는 외곽 지역)으로 정한 후, 행정구역을 5부(五部;북부,남부,동부,서부,중부)로 나눈 것이다. 각 부는 10개 안팎의 방(坊)을 관할하였는데, 초기에는 모두 52방(坊)이었다. 그 방 밑에는 다시 계(契), 또 그 밑에는 또 동(洞)이 있었다. 속담 중에 '동네방네 소문났네'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의 '동네방네'는 그 당시의 행정구역 단위인 '동(洞)과 방(坊)의 안(內)'이란 뜻의 '동내방내(洞內坊內)'라는 한자말에서 나온 것이다. 태조 때에 정해진 행정구역은 세종 때에 52방이 49방으로 변경되었을 뿐, 조선 말까지 350여 년을 거의 변경 없이 내려왔다. 26대 고종 초에 이르러 47방 339계로 조금 조정되었으나, 그 영역이나 명칭들은 거의 그대로였다. 따라서, 조선 5백년 동안 우리 서울의 행정 지명들은 각각 부-방-계-동의 꼬리를 달고 불려져 왔다. 이 지명들은 모두 한자로 붙여지긴 했지만,원래의 토박이 땅이름을 토대로 해서 옮겨진 것이 많았다. '너븐다리'가 있는 곳을 '광통방(廣通坊;지금의 광교 부근)'으로, '황토마루'를 '황토현계(黃土峴契;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부근)'로,'웃잣골'로 불리던 곳을 '상백동(上栢洞;지금의 혜화동 부근)'으로 정한 것 등이 바로 그 예가 된다.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는 갑오경장(1894) 때에 이르러 5서(署)로 바뀌어 동서(東署),서서(西署),남서(南署),북서(北署),중서(中署)가 된다. 갑오경장 무렵 서울의 행정구역은 5서(署) 47방(坊) 288계(契) 775동(洞)이었다.
□ 서울 옛 마을 이름들
서울의 현재 동네 이름들은 한자식의 동명으로 부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러한 동명들 중엔 원래 우리 토박이 땅이름에 바탕을 둔 것이 많다. 서울에는 현재 480개 정도의 법정동과 520여 개의 행정동이 있다. 이들 동(洞)이름들은 모두 한자식으로 되어 그렇게 불리우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그러한 동명들 중엔 원래 우리 토박이 땅이름에 바탕을 둔 것이 많았다. 토박이 땅이름 중에는 산과 관계된 것도 있고, 물과 관련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설치물이나 역사적 사실에 따라 붙은 것들도 있다. 서울 일대엔 한강이 지나고 있고, 그 한강으로 흘러드는 많은 갈림내들이 있어 물과 관련된 땅이름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한 곳으로 잘 알려진 것이 '모래내', '곰달내',' 한내', '마른내' 등이다. '모래내(사천=沙川)'는 북한산쪽에서 흘러내리는, 지금의 홍제천을 일컫는 이름인데, 그 하류인 남가좌동에 지금도 '모래내'라고 불리는 유명한 마을이 있다. '곰달내'는 지금의 양천구 신월동 일대를 지나는 내인데, 지금 이 곳을 지나는 길의 이름이 '곰달래(곰달내)'이다. '한내(한천=漢川)'는 지금의 중랑천이다. 지금 이 이름을 딴 '한천로'가 노원구에 있다. 이 근처의 '상계(上溪)-하계(下溪)' 등의 이름은 이 내의 위쪽과 아래쪽에 각각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마른내'는 지금의 중구 인현동 일대를 지나는 내로, 조선 시대엔 이 곳의 마을 이름을 '건천동(乾川洞)'이라 했으나, 일제 때에 이름을 없애 버렸다. 지금 이 곳을 지나는 길의 이름을 '마른냇길'이라 한 것은 그 옛 땅이름을 살려 쓴 것이다. '무수막'(수철=水鐵.금호동), '청숫골'(청담=淸潭), '물치'(수색=水色), '연못골'(연지=蓮池), '물아랫골'(수하=水下), '새내'(신천=新川) 등도 물 관련 땅이름이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고개나 산, 골짜기, 산등성이와 관련된 땅이름도 많았다. 마포구 아현동의 '애오개(아현=阿峴.兒峴)'는 작은고개가 있어 붙은 이름이고, 그 옆의 '큰고개(대현=大峴.만리재)'는 높은 고개 때문에 붙은이름이다. 종로4가의 '배오개'(이현=梨峴), 충무로 입구의 '진고개'(니현=泥峴), 을지로2가의 '구리개'(동현=銅峴) 등이 고개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것들이었다. '구름재'(운현=雲峴.운니동), '솔고개'(송현=松峴), '당고개'(당현=堂峴.상계동), '밤고개'(율현=栗峴), '갈고개'(갈현=葛峴), '박석고개'(박석현=薄石峴.갈현동), '논고개'(논현=論峴), '한치'(대치=大峙) 등도 모두 고개가 있어 붙은 이름들이다. 광화문 네거리 근처의 '황토마루'(황토현=黃土峴), 강서구의 '등마루'(등촌=登村), 성북-도봉구의 '되너미'(돈암=敦岩), '무너미'(수유=水踰) 등은 등성마루나 고개 이름으로 붙은 것이다. '매봉'(응봉=鷹峰)은 봉우리 이름이 들어간 경우이고, '간뎃골'(중곡=中谷), '가는골'(세곡=細谷) 등은 골짜기 이름이 들어간 경우이다. 산이 많으면 바위도 많게 마련이다. 바위나 돌 관계 땅이름으로 '두텁바위'(후암.厚岩), '감은돌'(현석.玄石), '검은돌'(흑석=黑石), '북바위'(종암=鐘岩), '붙임바위'(부암=付岩), '돌곶이'(석관=石串), '돌마리'(석촌=石村), '독부리'(도곡=道谷), '매바윗골'(응암=鷹岩), '바위절'(암사=岩寺) 등이 있었다. 서울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땅이름들도 있다. 산모양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머리'(용두=龍頭)가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고, 땅모양이 벼루를 닮아 문필가들이 많이 난다는 '벼루말'(연촌=硯村)이 노원구 월계동에 있었다. 그러나, '벼루말'은 대개 비탈이나 벼랑이 있는 곳에 많이 붙는 땅이름이다. 산모양이 시루를 닮아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될 것이란 예측으로 이름붙은 '시루뫼(증산.甑山)'이 은평구 증산동에 있다. 서울은 군데군데 넓은 들이 있어서, 들과 관계된 땅이름들도 더러 있었다. 마포는 '삼개'라는 들이 있어 나온 이름으로, 이것은 '마포(麻浦)'라는 한자로 옮아 갔다. '신촌(新村)'도 전에는 새로 일군 터라는 뜻의 '새터말'이었고, 이 마을의 서쪽의 서교동도 좁은 들이 있어 '잔다리'(세교=細橋)라 불렀었다. '노들'(노량=鷺粱), '너벌섬'(여의도=汝矣島), '갯들'(포이=浦二), '개패'(개포=開浦) 등도 들 관련 땅이름이었다. 마을이 있는 곳의 땅모양을 따라 붙은 땅이름도 있었다. 도봉구의 우이동(牛耳洞)은 마을 뒤 북한산에 소의 귀처럼 생긴 '쇠귀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 '쇠귀골'로 불렸던 곳이고, 강남구의 학동은 마을이 학을 닮아 '학실'(학동=鶴洞)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송파구의 풍납동(風納洞)은 마을 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지형이라 하여 '바람들이'라 했던 곳이다. 성동구 성수동에는 물(내) 있는 쪽으로 땅이 튀어나갔다고 해서 이름붙은 '살곶이'(箭串)란 벌이 있었는데, 예부터 말을 많이 놓아 먹이던 곳이다. 서초구의 '염통골'(염곡=廉谷)은 마을이 염통을 닮아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마을의 위치에 따라 붙은 땅이름들도 있다. 들의 머리쪽에 있어 이름붙은 '덜머리'(절두=切頭)가 마포구 망원동에는 있었고, 물가에 있어 나온 이름인 '가재울'이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있었다. 지금의 남가좌-북가좌의 '가좌(佳佐)'는 '가재울'의 소리옮김이다. 물가 마을의 뜻인 '무수막'(수철=水鐵)이 성동구 금호동 등에, 두 물줄기가 합해진다는 뜻의 '두뭇개'(두모포=豆毛浦)가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다. '간뎃말'(중곡=中谷), '안골'(내곡=內谷), '성안말'(성내=城內), '새문안'(신문내=新門內) 등도 마을 위치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그 곳에 무엇이 있다고 해서 붙은 땅이름들도 있다. 용산구 신창동의 '새창고(신창=新倉)' 동대문구 회기동의 '떡전거리', 중랑구의 '먹굴'(묵동=墨洞), 마포구 용강동의 '독막'(동막=東幕.옹막=甕幕), '조개우물'(합정=蛤井.合井), 은평구의 '역말'(역촌=驛村), 강남구 역삼동의 '말죽거리', 성동구 사근동 '사근절'(사근=沙斤), '마장안'(마장동=馬場洞.장안동=場安洞), 동작구 상도동의 '장승백이', 종로구 '사직골'(사직동=社稷洞), 중구 '다방골'(다동=茶洞), '배다릿골'(주교동=舟橋洞), '갓우물골'(입정동=笠井洞), '붓골'(필동=筆洞) 등은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그 곳에 있는 식물의 이름이 들어간 땅이름들도 있었다. '복삿골'(도화동=桃花洞)은 복숭아나무가, '은행나뭇골'(행촌동=杏村洞)은 은행나무가, '가락골'(가락동=可樂洞)과 '갈울'(갈월동=葛月洞)은 갈나무가, '대춧말'(대조동=大棗洞)은 대추나무가 많아 나온 이름이다. '삼밭'(삼전동=三田洞), 약밭(약전=藥田.약현=藥峴.중림동), '미나릿골'(미근동=渼芹洞) 등도 식물 이름 따라 붙여진 이름이고, '서래'(반포동=磐浦洞)나 '서리풀이'(서초동=瑞草洞)는 풀이 많이 서렸다고 해서 나온 이름들이다. 서울은 역사가 오랜 도시여서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는 땅이름들도 많다. 종로구의 '잿골'(재동=齋洞)은 조선 세조 때 이 곳에서 살상극이 벌어져 그 피 내음을 없앤다고 재를 뿌려 나온 이름이라 전하고 있고, 송파구의 '오금골'(오금동=梧琴洞)은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해 가던 중에 이 곳에서 오금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땅이름이라 전한다. 또, 강동구의 '고더기'(고덕동.高德洞)는 고려 말에 벼슬을 지냈던 이양중(李養中)의 높은 덕을 기려 붙여졌고, 영등포구의 '문래동(文來洞)'은 일제 때 방직공장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감 넘치고 우리 냄새가 물씬 나던 서울의 토박이 땅이름들은 한자식으로 옮겨지고, 또 일제 시대의 행정구역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입에서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 일제에 의한 땅이름 상처
□ 상처가 나기 시작한 서울 땅이름
우리 서울 곳곳의 땅이름은 20세기 초 우리가 나라를 잃음으로써 하나하나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조선 27대 순종 융희 4년(1910) 8월 29일, 합병 조약이 발효되자,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두고 우리 땅이름에 대대적인 칼질을 가했다. 총독부는 그 해 10월 1일, 서울의 당시 이름인 '한성'을 없애고 경성부(京城府)로 고쳐서 경기도에 붙여 버렸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의 땅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이른바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착수하고, 지형 측량,지도 작성 등을 하면서 전국의 땅이름을 자기들 장부에 올려 놓기 시작하였다. 이 때 채집된 땅이름은 약 180만 개로서 상당수가 일본 제국 참모 본부 간행의 지형도에 기입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명 조사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고, 일본인들의 사용에 편리하게 변질된 것이 상당히 많았다. 또, 지형도에는 일본글인 카다카나를 병기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파생된 혼란이 심했다. 1911년 4월, 일본은 경기도령 3호로써 경성부 행정구역에 부(部)와 면(面) 제도를 창립하였다. 성 안은 5부(部)와 36방(坊)으로 하고, 성 밖은 방(坊)을 면(面)으로 이름을 바꾸어 성외 8면(城外八面)이라는 묘한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표1 참조)
# 표1: 일제의 서울 행정 구역과 명칭 변경 사례
* 1910년 10월 1일 관제(官制)를 실시, 종래의 관찰사를 폐하여 각 부의 장관으로 함. 한성부(漢城府)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쳐서 경기도에 붙임. * 1911년 4월 1일 경기도 도령(道令) 3호로 경성부 행정구역에 부(部),면(面) 제도를 창립. 성 안은 5부(部) 36방(坊), 성 밖은 8면으로 획정. ※8면은 용산면(龍山面), 서강면(西江面), 숭신면(崇信面), 두모면(豆毛面), 인창면(仁昌面), 은평면(恩平面. 延恩坊+常平坊), 연희면(延禧面), 한지면(漢芝面). * 1913년 12월 총독부령 111호로써 부(剖)와 군(郡)의 명칭,위치 및 관할 구역 개정. *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7호로써 동(洞), 정(町)의 명칭과 구역 공포. ※동의 수 186 * 1914년 9월 27일 경성부에서 조례(條例) 포고, 4부(東部, 西部, 北部, 龍山)에 출장소를 둠. * 1915년 6월 1일 3부(東部,西部,北部)의 출장소를 폐지하고 경성부가 직접 관할. * 1936년 4월 1일 부령(府令) 8호로 경성부 관할 구역 확장 변경.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관내 1읍 8면 71리 및 5리 일부를 경성부 관할에 편입. *동부, 서부, 영등포 출장소 신설. *동(洞), 정(町), 리(里)의 3가지로 불러오던 이름을 전부 정(町)으로 통일. * 1943년 4월 1일 출장소를 폐지하고 구제(區制)를 실시.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영등포구, 서대문구 등 7개구 설치. * 1944년 10월 23일 연희면의 편입으로 마포구를 더 설치하여 8개구로 함.
서울 곳곳에 있던 많은 토박이 마을들은 일제에 의해 마구 통폐합되어 그 땅이름이들이 사라져 갔다. 1914년 4월 1일 일제는 부제(府制) 실시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땅이름에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이 때, 서울의 동이름들이 반 이상 뒤바뀌어 버렸다. 이 땅에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숨쉬어 온 무형 문화재인 땅이름들을 차례로 자기들 입맛에 맞게 바꾸어 버린 것이다. 종로 일대에도 조선 초부터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던 곳이어서 마을이 많았다. 땅이름도 그 마을만큼이나 많았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의 토박이 땅이름을 제쳐 두고 생소한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이기도 했다. 지금의 관수동, 동숭동, 공평동, 권농동, 예지동, 낙원동, 원남동, 원서동 같은 동이름은 그 곳에 있던 토박이 땅이름들을 뭉개 놓고 그들이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지금의 을지로는 예부터 땅이 질어서 '구리개(굴개)'라 불려 오면서 한자로 '동현(銅峴)'이라 해 왔다. 그러나 일본은 구리(銅)가 자기들 말로 황금(黃金)이 된다고 해서 황금정(黃金町=고가네마찌)이란 엉뚱한 이름을 붙여 버렸다. 또, 지금의 종로, 을지로와 같은 큰길에는 일본식으로 '정목(町目)'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정목'이란 말은 자기네 본국의 큰 도시 거리에 붙여 온 거리 이름으로, 지금 우리의 '1가(街)-2가(街)'와 같은 식이다. 이렇게 해서 이 땅의 거리엔 '1정목-2정목' 식의 왜식 지명이 자리를 잡는다. 거리 이름도 황금정(黃金町:을지로), 서대문정(西大門町:신문로), 원정(元町:원효로), 죽첨정(竹添町:충정로), 의주통(義州通:의주로), 남대문통(南大門通:남대문로),한강통(漢江通:한강로), 태평통(太平通:태평로) 등으로 자기들 멋대로 지었다. 그럼, 여기서 종로 일대의 몇 곳만 골라 그 땅이름을 바꾼 과정을 알아보자. * 관수동 너더리[板橋]→관수동(觀水洞);청계천의 흐름을 살핀다고 해서. * 동숭동 잣골[柏洞]→동숭동(東崇洞);崇敎坊의 동쪽이라고 해서. * 공평동 회나뭇골[槐洞.檜木洞]→공평동(公平洞); 법을 집행하는 의금부가 있다고 해서. * 권농동 수문골[農圃洞]→권농동(勸農洞);이 곳의 채소를 권장하는 농포서(農圃暑)의 이름을 따서. * 예지동 옥방골[玉房洞]→예지동(禮知洞);유학의 네 대강(大綱)의 하나. * 낙원동 탑골[塔洞]→낙원동(樂園洞) * 원남동 상삿골[相思洞]→원남동(苑南洞) * 원서동 원골[苑洞]→원서동(苑西洞);含春苑 서쪽. 기존의 지명을 딴 글자로 바꿔 놓거나 마음대로 붙여 놓기도 했다. 견평방(堅平坊)의 '평(平)'자를 '지(志)'자로 바꾸어 견지동(堅志洞)으로 했고, 계생동(桂生洞)을 줄여서 계동(桂洞)으로 해 놓았다. 여러 동이 합쳐진 경우, 그 중의 두 동의 이름에서만 한 글자씩 따서 행정지명을 만들어 원래의 지명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곳도 많다. 이런 현상은 마을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종로구 일대에서 특히 심했다. 그 중에 몇만 예를 들어 보자. 경운동(慶雲洞):경행방(慶幸坊)+운현궁(雲峴宮) 관철동(貫鐵洞):관자동(貫子洞)+철물교(鐵物橋) 관훈동(寬勳洞):관인방(寬仁坊)+훈동(勳洞) 궁정동(宮井洞):육상궁(毓祥宮)+온정동(溫井洞) 당주동(唐珠洞):당피동(唐皮洞)+야주현(夜珠峴) 돈의동(敦義洞):돈화문(敦化門)+어의궁(御義宮) 수송동(壽松洞):수동(壽洞)+송현(松峴) 연건동(蓮建洞):연화방(蓮花坊)+건덕방(建德坊) 옥인동(玉仁洞):옥동(玉洞)+인왕동(仁王洞) 운니동(雲泥洞):운현궁(雲峴宮)+니동(泥洞) 익선동(益善洞):익동(益洞)+정선방(貞善坊) 인사동(仁寺洞):관인방(寬仁坊)+사동(寺洞) 청운동(淸雲洞):청풍계(淸風溪)+백운동(白雲洞) 청진동(淸進洞):등청방(燈淸坊)+수진방(壽進坊) 통인동(通仁洞):통동(通洞)+인왕동(仁旺山) 합치기 전의 동이름 중엔 우리말이 그 바탕이었던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수송동의 송현(松峴)은 '솔고개', 옥인동의 옥동(玉洞)은 '옥골', 운니동의 이동(泥洞)은 '진골', 인사동의 사동(寺洞)은 '절골'이 그 원래 이름이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을지로 근처나 용산 일대에는 일본식 지명으로 거의 모조리 깔아 버렸다. 중구의 신정(新町:묵정동), 임정(林町:산림동), 욱정(旭町:회현동), 수정(壽町:주자동), 삼각정(三角町:삼각동), 대화정(大和町: 필동), 초음정(初音町:오장동), 장교정(長橋町:장교동),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 용산구의 경정(京町:문배동),영정(榮町:신계동), 원정(元町), 암근정(岩根町:청암동), 산수정(山手町:산천동), 청수정(淸水町:신창동), 금정(錦町:효창동), 삼판통(三坂通:후암동), 강기정(岡埼町:갈월동), 청엽정(靑葉町:청파동) 등이 그러한 예이다. 특히, 오시마(大島)라는 일본인의 이름을 따서 대도정(大島町:용문동)으로 정한 것이라든가 일본군의 영문(營門)이 있는 곳이라 해서 연병정(鍊兵町:남영동)이라 한 것 등은 이 땅을 자기들의 영원한 터로 삼고 땅이름에까지도 자기들의 얼을 심고자 하는 저의를 뚜렷이 드러낸 증거들이다.
□ 일제 잔재를 그대로 받은 광복 후의 땅이름
광복 이후 일제가 붙인 땅이름은 많이 고쳐졌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표2와 표3 참조) 옛날에 덩굴풀이 많아 만초천(蔓草川)이라고 불렀던, 서울 서부 지역의 한강 지류가 아직도 일제가 붙인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가 하면, 일본인의 별장이 있었던 한강가의 흑석동 일부는 당시 일본인 별장 이름 그대로 명수대(明水臺)로 통하고 있다. 이 곳의 학교 이름, 성당 이름까지도 '명수대'이다. 중국인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제 때 태평통이라고 붙여졌던 곳은 '통(通)'을 '로(路)'자로만 바꾼 채 '태평로'란 이름을 달고 서울 중앙의 거리에서 뽐내고(?) 있다.(표4 참조)
# 광복 이후의 우리 정부 조치(1945-1949) -------------------------------------------------------------------------------- 때 조 치 사 항 -------------------------------------------------------------------------------- ① 1945.8.15 *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 ② 1946.8.18 * 법령 108호로 서울 특별 자유시로 승격. ③ 1946.10.1 * 일본식의 통(通) 정(町)을 우리식 로(路),동(洞)으로 개칭. ④ 1946.10.18 * 군정 법령 108호로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서울 특별시로 승격. ⑤ 1949.8.13 * 동대문구 일부와 고양군 숭인면 통합,성북구 설치. ⑥ 1949.8.14 * 숭인,뚝도,은평 출장소 설치. +-------------------------------------------------------------------------------------------------------- + # 서울의 구별 일본식 동이름 현황 - 법정 동 수 20 개 이상의 구만 비율을 구함 -
쌀 창고가 있어서 일제 때 북미창정(北米倉町)과 남미창정(南米倉町)이라고 불렀던, 남대문 근처의 동네는 해방 후에 왜식 동명을 없앤다고 북창동, 남창동이라고 고쳐 짓기는 했지만, 일제가 지은 이름에서 겨우 '쌀미(米)'자만 빼고 정한 것이어서 개운치가 않다. 서울의 구(區)이름 중의 하나인 은평(恩平)도 일제의 잔재이다. 은평은 일제가 1911년 경기도령(京畿道令)으로 경성부의 성외 8면을 정할 때 당시 이 지역의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앞의 표1 참조) 한강 가운데의 섬을 아직도 중지도(中之島)로 부르는 것도 문제다. 중지도는 지명이라기보다는 '가운데의 섬'이란 뜻의 일본어이다. 일제는 한강의 섬들을 자기 멋대로 이름을 짓거나 고쳤는데, 그 중 몇 개의 섬은 이름 아닌 이름인 '중지도'(일본말로는 '나까노시마')로 불러 왔고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서울의 예만 들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광복 후, 우리 정부는 이러한 일제 잔재의 땅이름을 원래대로 돌려 놓거나 우리식으로 바꿔 놓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본식 땅이름이 버젓이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다. 또, 새로운 땅이름을 붙일 때도 기존의 동명에다 일련번호식 숫자나 붙여서 행정지명을 만드는 우를 범해 왔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 정리해야 할 땅이름
그러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현재의 서울 땅이름들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짚어 보겠다.
□ 일본식 땅이름을 없애 나가야 한다
우리 땅엔 일본식이거나 일제 때 지은 땅이름이 너무도 많다. 광복 50년이 가깝도록 일본인이 남겨 놓은 땅이름이 그대로 남아 지금도 계속 지도에도 표기되고 우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음은 겨레의 큰 수치요 후세들에게도 주체성 잃은 조상이라는 창피스러운 평가를 받을 것이다. 특히, 수도 서울에 일본식 동이름이 30% 이상이나 되는데도 모두의 무관심 속에 계속 방치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표3 참조) 이러한 것은 이제라도 손을 대서 우리식으로 하나둘씩 정리해 나가야 한다. 우리 땅엔 우리식의 땅이름이 자리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식 땅이름을 당장 모두 고칠 때 따르는 혼란도 예상되지만, 그러한 상황은 일시적일 것이다. 당장 손대기가 어렵다면 우선 고쳐도 별 문제가 없는 것부터 하나둘씩 고쳐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내(川)나 산, 섬의 이름과 같은 자연 지명은 당장 고쳐도 그리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길이름(路名) 같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표4 참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구(區)나 동(洞)의 이름이다. 이것은 이미 사람들의 입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갑작스럽게 지명 변경을 단행할 경우, 그에 따른 혼란도 예상된다. 따라서, 이러한 땅이름은 분구(分區)나 분동(分洞)이 될 때 시행함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새로운 길이 생기거나 지하철이나 공원 같은 시설이 마련될 때마다 그 이름으로 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제 때 변경되기 이전의 땅이름도 철저히 찾아서 이를 가급적 많이 살려 쓸 필요가 있다. 부-방-계-동의 이름으로 붙여졌던 많은 옛 땅이름들을 모두 찾아 정리하고, 이를 법-행정동명으로 활용하거나 길이나 공원, 아파트 등의 이름을 지을 때 넣어 줘야 한다. 예를 들면, 종로구의 경운동은 '경행방'과 '운현궁'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니, 이를 다 살리는 방법으로 법정동은 '경행동(慶幸洞)'으로, 이 곳을 지나는 길은 '운현로(雲峴路)'나 이의 토박이 땅이름인 '구름재길'로 붙이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을 종로구의 몇 동에서 예를 들어 보겠다. 관철동(貫鐵洞):관자동(貫子洞)과 철물교(鐵物橋 *쇠물전다리) 관훈동(寬勳洞):훈동(勳洞)과 관인로(寬仁路) 궁정동(宮井洞):온정동(溫井洞)과 육상궁(毓祥宮)공원 당주동(唐珠洞):당피동(唐皮洞)과 야주현(夜珠峴 *야주개고개) 돈의동(敦義洞):돈화동(敦化洞)과 어의궁(御義宮)길 수송동(壽松洞):수동(壽洞)과 송현로(松峴路 *솔고개길) 연건동(蓮建洞):연화동(蓮花洞)과 건덕로(建德路) 옥인동(玉仁洞):옥동(玉洞)과 인왕로(仁王路 *인왕산길) 운니동(雲泥洞):운현동(雲峴洞)과 진골길(泥洞路) 익선동(益善洞):익동(益洞)과 정선방(貞善坊)길 인사동(仁寺洞):관인로(寬仁路)와 사동로(寺洞路 *절골길) 청운동(淸雲洞):청풍동(淸風동)+백운로(白雲路 *백운동길) 청진동(淸進洞):수진동(壽進洞)과 등청로(燈淸路) 통인동(通仁洞):통동(通洞)과 인왕로(仁王路 *인왕산길)
<고쳐 놓아야 할 땅이름(서울)> 현재 이름의 가나다 순 배열 --------------------------------------------------------------------------------------- 지금의 이름 이렇게 고쳐야--- 고쳐야 할 근거 (일제 때 이름) (옛 땅이름) (또는 참고 사항) --------------------------------------------------------------------------------------- 1 금호동(金湖洞) 수철동(水鐵洞) 원래 '무수막' 또는 '무쇠막[水鐵]' 2 대흥동(大興洞) 동막동(東幕洞) 원래 '독막[옹막.甕幕]' '동막[東幕]' 3 명수대(明水臺) 서달(서달산) 명수대는 일본인 별장 이름 (아파트 등의 이름이 있다.) 4 모진동(毛陳洞) 전관동(箭串洞) 모진동은 일제가 지은 이름.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 5 미근동(尾芹洞) 미근동(渼芹洞) 미동(尾洞)과 근동(芹洞)을 일제가 합성시킨 이름 6 방산통(芳山洞) 조산동(造山洞) 청계천의 모래 쌓은 조산 있었던 곳 7 삼각동(三角洞) 홍문동(紅門洞) 원래 홍문(紅門)이 있던 곳 8 수서동(水西洞) 궁촌동(宮村洞) 원래 '궁말' 또는 '궁촌(宮村)'이라 불리던 곳 9 신사동(新沙洞) 사평동(沙平洞) 원래 '새펄' 또는 '사평(沙平)'이라 불리던 곳 10 신계동(新契洞) 만초동(蔓草洞) 신계동은 일제가 지은 이름. 만초천(蔓草川)이 지남 11 쌍림동(雙林洞) 쌍리문동(雙里門洞) 원래 '쌍리문골' 또는 '쌍리문동(雙里門洞)' 12 안양천(安養川) 갈내[葛川] 옛날부터 '갈내' 또는 '갈천(葛川)'으로 불림 13 양평동(楊平洞) 양화동(楊花洞) 원래 '버들고지' 또는 '양화(楊花)'라 불리던 곳 14 욱천(旭川) 만초천(蔓草川) 일제 때 일인들이 '욱천(旭川.아사이가와)'으로-- 15 은평구(恩平區) 갈현구(葛峴區) 옛날에 주로 갈현계(葛峴契) 지역 16 의주통(義州通) 개정로(盖井路) 원래 '뚜께우물'(개정.盖井)'이 있던 곳 17 인사동(仁寺洞) 대사동(大寺洞) 원래 '큰절골' 또는 '대사동(大寺洞)'이라 불림 18 인왕산(仁旺山) 인왕산(仁王山) 일제가 '왕(王)'을 '왕(旺)'으로 바꾸어 붙임 19 자양동(紫陽洞) 자마장동(雌馬場洞)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자마장리(雌馬場里)' 20 중랑천(中浪川) 한내[漢川] 원래 '한내' 또는 '한천(漢川)'이라 불리던 곳 21 중림동(中林洞) 약현동(藥峴洞) 원래 '약고개' 또는 '약현(藥峴)'이라 불리던 곳 22 중지도(中之島) 노들섬 '가운뎃섬'의 일본식 이름 '중지도(中之島.나카노시마) 23 태평통(太平通) 관정로(館井路) 원래 '관우물[館井]'이 있던 곳 24 한강통(漢江通) 새남터길[沙南路] '한강통'은 일제가 새로 붙인 이름. 새남터 근처. 25 한남통(漢南洞) 한강동(漢江洞) 원래 '한강방(漢江坊)'이라 하던 곳 26 합정동(合井洞) 합정동(蛤井洞) 원래 '조개우물' 또는 '합정(蛤井)'으로 불리던 곳 27 현저동(峴低洞) 사현동(沙峴洞) 모래재[沙峴=무악재]의 밑 28 회기동(回基洞) 회릉동(懷陵洞) 연산군 생모 회묘(懷墓)가 있어 '회릉'이라 하던 곳 +------------------------------------------------------------------------------------------+ * 이 중 '인왕산(仁旺山)'과 '욱천(旭川)'은 1995년 중앙지명 위원회에서 원래의 땅이름인 '인왕산(仁王山)'과 '만초천(蔓草川. 또는 蔓川)'으로 고치기로 결정했으나, 아직도 지도나 공사장 이름 등에서는 여전히 예전(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 숫자식 동이름을 새 고유 동명으로 고쳐 줘야 한다
서울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숫자식 동이름이 나왔다. 이런 경우는 특히 변두리 새 개발 지역에서 특히 심한데, 관악구 신림동의 경우는 본동에서 13동까지 무려 14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다. 그 밖에 관악구의 봉천동이 12개동, 노원구의 상계동이 10개동, 도봉구의 미아동과 송파구의 잠실동, 강서구의 화곡동이 각각 9개동, 중랑구의 면목동이 8개동, 양천구의 신월동과 신정동, 영등포구의 신길동, 구로구의 구로동이 각각 7개동 등 7개 이상으로 분동된 동만도 무려 10개에 달한다. 이러한 숫자식 동은 분동된 차례에 따라 나오므로 위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도리어 혼동만 안겨 줄 뿐이다. 예를 들어 1동 옆에 2동이 있는 식으로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동은 지금이라도 그 위치에 따라 고유의 땅이름을 찾아 행정지명으로 올려 줘야 할 것이다. 이미 동이 분동되어 숫자식 동이름을 달고 있거나 앞으로 분동되는 동이 나올 경우, 가급적 토박이 땅이름을 붙여 볼 만도 하다. 예컨대, 주로 '장승백이'로 불리우고 있는 동작구의 노량진2동은 '장승동(또는 장승백이동)'으로, '모래내'로 많이 불리우고 있는 서대문구 남가좌1동은 '모래내동'으로 붙여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숫자식 동이름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사라져 간 우리 토박이 땅이름을 찾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숫자 동명을 순수 토박이 땅이름으로 바꿀 수 있는 곳을 서울에서 몇 군데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강남구 청담1동→ 청숫골동 ·강남구 역삼2동→ 말죽거리동 ·강서구 화곡6동→ 까치산동 ·강동구 암사3동→ 양지마을동 ·강북구 수유4동→ 무네미동 ·관악구 봉천3동→ 능고개동 또는 능현동(陵峴洞) ·관악구 봉천8동→ 새실동 또는 쑥고개동 ·관악구 신림7동→ 낙골 또는 난곡동(蘭谷洞) ·금천구 시흥2동→ 탑골동 ·노원구 상계1동→ 샘말동 ·노원구 상계3동→ 당고개동 ·노원구 월계2동→ 안골동 ·동작구 흑석2동→ 비개동 ·동작구 노량진2동→ 장승동 또는 장승백이동 ·마포구 아현3동→ 애오개동 ·서대문구 남가좌1동→ 모래내동 ·서대문구 연희3동→ 대궐재동 ·성동구 금호4가동→ 무수막동 ·성북구 석관2동→ 돌곶이동 ·송파구 잠실7동→ 숯내동 ·송파구 풍납2동→ 바람들이동 ·양천구 신월7동→ 곰달내동 ·은평구 갈현1동→ 연신내동 ·은평구 불광2동→ 독바위동 ·은평구 불광3동→ 박석고개동 ·중랑구 묵2동→ 먹골동
□ 같거나 비슷한 동이름도 정리해야 한다
서울에는 음(音)으로 봐서 똑같거나 비슷한 것이 많아서 많은 혼동을 주고 있는 동이 많다. 이러한 동이름도 새로운 동이름으로 고쳐 줄 필요가 잇다. 서울에는 신사동이 둘 있다. 하나는 은평구의 신사동이고, 다른 하나는 강남구의 신사동이다. 이 때문에 택시나 버스를 타고 '신사동'이라고 행선지를 말해도 다시 어느 신사동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신정동도 둘 있다. 하나는 양천구의 신정동이고, 다른 하나는 마포구의 신정동이다. 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양천구의 신정동은 잘 알지만, 마포구의 신정동은 잘 알지 못한다. 법정동으로서의 양천구 신정동은 무척 넓고 인구도 많지만, 마포구의 신정동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창동은 용산구에 있는데도 대개의 서울 시민들은 도봉구에 이런 이름의 동이 있는 줄 알고 있다. 60년대에 도봉구 창동에 새(新) 마을이 생기면서 '새(新) 창동'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그 곳을 신창동(新倉洞)이라고 불러 왔고, 버스 행선지 표지에도 그렇게 표기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의 그 동은 법-행정 동명으로만 남아 있을 뿐, 죽은 이름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발음이 비슷해 혼동을 주는 동이름도 많다. ·남현동(관악구)과 남영동(용산구) ·목 동(양천구)과 묵 동(중랑구) ·서교동(마포구)과 서계동(용산구) ·홍지동(종로구)과 홍제동(서대문구) ·둔촌동(강동구)과 등촌동(강서구) ·삼선동(성북구)과 삼성동(강남구) ·창전동(마포구)과 창천동(서대문구) ·학 동(강남구)과 합 동(서대문구) ·신천동(송파구)과 신촌동(서대문구) ·방학동(도봉구)과 방화동(강서구) ·번 동(도봉구)과 동작동(동작구) ·정릉동(성북구)과 전농동(동대문구) ·동자동(용산구)과 동작동(동작구) ·산천동(용산구)과 삼청동(종로구) ·효자동(종로구)과 효제동(종로구) ·자양동(성동구)과 가양동(강서구) 비슷한 음의 동이름은 이용자들에게 많은 불편과 혼동을 안겨 준다. 따라서, 이러한 동은 단계적으로라도 다른 이름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고, 앞으로 새 동이름을 지을 때는 이러한 혼동 지명이 다시 더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 지하철역 이름도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현재, 서울에는 많은 지하철 역이 있는데, 이 중에는 불합리하게 붙여진 것이 많다. 예컨대,'서울대 입구역'식으로 대학교 위주로 붙은 것이 많은데, '입구'란 말이 모호하다. 예를 들어 서울대 입구라면 역에서 내려 얼마 가지 않는 거리에 그 대학이 있어야 하고, 또 '입구(入口)'라는 말 그대로 길이 그 대학으로 직접 접어드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다. '---대 입구' 쳐 놓고, 정말 '입구'인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역이름은 그 지역의 땅이름 위주로 고쳐져야 한다. 또, '도봉역'과 '도봉산역', '동대문역'과 '동대문운동장역', '미아역'과 '미아삼거리역'식으로 같은 땅이름이 들어가 승객들에게 역이름의 혼동을 주는 것도 많으니 이것도 재고해야 한다. 역이름이 그 지역의 땅이름과 일치하지 않는 곳도 많다. 예를 들면 송파구의 잠실역과 신천역은 그 지역의 땅이름(법정지명)으로 볼 때 서로 바뀌어 붙여졌다. 따라서, 이 두 역의 이름은 서로 바꾸어야 한다. 최근 관계 당국에서 역의 이름이나 길이름들을 지을 때 우리 토박이 땅이름을 붙여 주는 경우를 더러 볼 수 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나 상호 등에서도 옛 땅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일은 우리 땅이름의 보존 차원에서 꼭 필요한 일이고, 앞으로 더욱 강력히 추진되고 장려되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앞으로도 이 땅에는 국토나 지역 개발에 따라 새로운 도시, 공원, 아파트, 지하철역, 길 등 많은 시설물들이 생기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이름들이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가급적이면 우리 조상들의 얼이 밴 무형 유산인, 사라져 간 땅이름들을 찾아서 후세에 전하며 겨레의 혼을 바르게 이어 가야 한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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