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제’ 글로벌 각축전, 한국의 선택은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입력 : 2016-01-09 19:17:07ㅣ수정 : 2016-01-09 19:17:07
미국의 산업세력 교체 중심에는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가 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넘어 BATX(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를 통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미래는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2년 9월 19일 오후, 기자는 안철수 당시 무소속 후보가 대선 출마선언을 하던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구세군 빌딩에 있었다. “SF 작가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대선후보도, SF 작가의 말이 대선과정에서 인용된 것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월 7일 로버트 킨클 유튜브 수석부사장이 자사가 CES에서 공개한 스트리밍 서비스 유튜브레드를 설명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이미 와 있는 미래’의 얼굴
그런데 윌리엄 깁슨은 자신이 언제 이 말을 처음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위 경구는 그의 작품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쿼터 인베스티게이터’라는 온라인매체에 따르면 윌리엄 깁슨이 처음 이와 비슷한 버전의 발언을 한 것은 1990년에 제작된 <사이버펑크>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의 영어 원문은 “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very evenly distributed”이다. 사실 안 당시 후보가 언급한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단지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 정도가 더 정확하다. ‘이미 와 있는 미래’란 무엇인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변화 또는 희망, 진보와 통하는 걸까. 윌리엄 깁슨은 앞서 다큐멘터리에서 ‘이미 발생된 미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 생각에는 이미 세계 인구의 일부분은 진짜로 ‘포스트휴먼’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비벌리 힐스에 있는 백만장자의 건강조건과 방글라데시의 거리에서 굶주리는 사람의 조건을 비교해보세요.” 그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사람이 여전히 농사를 짓는 지구의 사람이라면, 비벌리 힐스의 남자는 뭔가 다른 존재(포스트휴먼)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깁슨이 생각하는 미래란 오히려 기술적 격차가 삶의 격차로 이어지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마다 1월 초가 되면 전 세계 IT업계의 촉각은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쏠린다. 이곳에서 열리는 소비자가전전시회(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이하 CES)에서 발표되는 신제품과 기술동향이 사실상 미래의 트렌드가 되기 때문이다. 1967년부터 시작돼 48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CES에서는 비디오 레코더(1970), 레이저디스크 플레이어(1974), 캠코더(1981), 디지털 위성시스템(1994), HDTV(1998), 블루레이 디스크(2003) 등 생활가전 제품과 관련 기술이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IT·가젯의 발달로 최근에는 대중의 관심도 집중되었지만 원래 이 전시회는 업계 관계자 위주의 행사다. 주최 측에 따르면 올해 행사에 참여한 기업은 약 3600개다.
“등골이 서늘했다.”
올해 행사에 참여한 빅데이터 전문기업 아르스프락시아 김도훈 대표가 1월 7일 CES 행사장에서 열린 IBM의 최고경영자(CEO) 지니 로메티의 기조연설을 보고 페이스북에 올린 소감이다.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처음으로 CES에 참여해 기조연설을 한 IBM은 이날 일본의 소프트뱅크와 함께 로봇 페퍼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시연했다.
소프트뱅크가 개발·시판한 로봇 페퍼는 실제 사업에 투입되어 있다. 일본의 미즈호(みずほ)은행에서 상담을 하고 네슬레에서는 커피머신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적용 가능성을 탐색 중이다. 김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우연히 마주친 국내 회사의 그룹장도 ‘쇼를 하네. IBM이 왓슨(인공지능 슈퍼컴퓨터)으로 정말 할 게 없었나 보다’라고 동료와 이야기하며 웃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사전에 각본을 주고 로봇과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면이다. 멀리 1980년대부터 심심치 않게 봐왔던 장면이다. 하지만 과거의 ‘연출된 장면’과 이번 CES에서 공개된 장면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생각이다. “IBM의 대표는 ‘다음에 올 가장 큰 변화(the next big thing)’와 관련해 ‘사물인터넷과 로봇, 인공지능이 결합된 것’이라고 단언했는데, 미래의 핵심기술 키워드를 연결해 왜 하필이면 그 중심에 로봇을 뒀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로봇은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어떤 생산품보다 소비자와 밀도 높은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 주인 또는 소비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는 빅데이터를 축적하는 가장 훌륭한 매개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봇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에 대한 정보는 다시 클라우드를 통해 공유되고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되면서 인터랙션 서비스는 더 정교해지는 것이다. 다시 윌리엄 깁슨의 경구를 떠올려 보자. “슈퍼컴퓨터로 할 일이 정말 없었나 보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이폰 혁명’ 다음의 큰 변화는
2011년 초 <주간경향>은 ‘TGIF발 인터넷 혁명’에 대한 기사를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2011년 인터넷 지각변동 시작됐다’ 기획 참조) TGIF는 각각 트위터, 구글, 아이폰, 페이스북을 지칭하는 업계 신조어였다. 혁명의 견인차는 아이폰이었다. 모바일 인터넷은 애플 아이폰 발매 이후 본격화되었다.
앞서 IBM의 대표가 언급한 큰 변화(big thing)는 이 아이폰 혁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2016년. 그때부터 5년이 지났다. 기자를 만난 강정수 디지털사회연구소 소장은 “실리콘밸리 이전에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했던 스틸밸리라는 말이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스틸밸리는 미국 오하이오주 마호닝 지역의 인구 7만명의 도시다. 20세기 초, 영스타운은 철강산업이 발달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다. 영스타운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한국과 일본의 제철산업이 발전하면서 싼값에 양질의 철강을 세계 시장에 내다 팔면서부터다. 1980년대 일본 차의 공세로 이리호를 건너 마주보고 있는 디트로이트 역시 쇠퇴하면서 영스타운은 완전히 몰락했다. 한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도시는 1980~90년대 ‘미국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도시’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집권 8년 동안 버락 오바마는 자동차산업 육성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미국의 산업세력이 교체된 것이다.”
강 소장은 기자에게 흥미로운 도표를 제시했다. GAFA. 다시 말해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시가총액과 한국의 코스피(KOSPI) 시가총액을 비교한 도표다. 2008년 이들 미국의 신진 인터넷기업 4개의 총액은 208조원이었고, 한국 기업의 코스피 총액은 855조원이었다. 그리고 7년 후인 2015년. GAFA의 시가총액은 1852조원인 데 비해 한국 코스피 총액은 1204조원이었다. 한국의 전체 상장기업들이 약 45% 성장한 사이 GAFA의 시가총액은 약 9배가 뛰어 4개 기업이 한국 전체 기업의 시가총액을 앞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8년 당시 이들의 시가총액에 비해 매출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48조원) 매출은 여전히 시가총액보다 적다. 406조원이다. 하지만 매출만 놓고 비교해 보면 약 20배 증가했다.
“이들 기업의 특징은 엔지니어가 노동생산성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글 전체 종사자의 약 37%, 페이스북은 38%, 애플은 20%, 아마존은 19%가 엔지니어다. 삼성전자의 엔지니어 비율도 22%에 달한다. 외형상으로는 유사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르다. 삼성전자와 달리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엔지니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개발자가 인터넷 서비스를 혁신하고 기업 내 생산성을 높이는 핵심 주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래프가 보여주는 것은 이들은 벌어들인 돈 대부분을 다시 개발에 투여했다.” 미국의 산업세력이 과거 자동차나 정유로부터 이들 인터넷기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강 소장의 지적이다.
앞서 2011년 기사에서 거론한 TGIF에서 하나가 빠지고 하나가 들어왔다. 빠진 것은 트위터이고 들어온 것은 아마존이다. 강 소장은 특히 아마존의 혁신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반 소비자가 인식하는 아마존의 사업은 책을 중심으로 한 전자상거래나 킨들이다. 하지만 또 하나 아마존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은 스토리지, 클라우드 산업이다.
1월 6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행사에서 IBM CEO 지니 로메티(왼쪽)와 소프트뱅크의 요시다 켄이치 부사장(가운데)이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이 결합된 로봇 페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한국시가총액 넘어선 GAFA의 ‘질주’
특히 유럽 시장에서 아마존은 각국의 스토리지 시장을 거의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정부조차도 아마존의 클라우드를 사용해 웹사이트를 서비스할 정도다. 검색(구글)이나 SNS(페이스북)뿐 아니라 스마트폰에서도 아이폰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유럽의 위기의식은 구체화되어 있다. 시장의 붕괴와 인력 유출로 유럽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 기업들이 노리는 것은 이제 검색이나 SNS에 머물지 않는다. 운영체제나 하드웨어, 온라인스토어뿐만 아니라 전통산업 영역으로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 통신 및 IT기기뿐 아니라 의료건강이나 상거래, 에너지·시설에서부터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금융(핀테크), 운수와 여행으로까지 나가고 있다.(표 참조)
다시 아마존의 경우를 보자. 이 기업은 2013년, 식품배달·판매 부서로 아마존 프레시를 만들었다.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조프는 ‘원클릭’으로 유명하다. 알고리즘의 혁신으로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것이 그가 구현할 목표였다. 2014년, 이 기업은 ‘아마존 대시’를 내놓은 데 이어 2015년에는 ‘대시버튼’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대시의 실물은 마이크처럼 생겼다. 특정한 물건이 떨어졌을 때 바코드를 찍거나 상품명을 말하면 상품이 자동배달되도록 하는 서비스다. 대시버튼은 오프라인으로 구현된 ‘원클릭’이다. 상표가 붙어 있는 작은 버튼인데 와이파이로 휴대폰과 연동된다. ‘반복해서 구입하는 상품’이 떨어지면 그 상표가 붙은 대시버튼을 한 번 누르면 배달되는 시스템이다. 대시와 대시버튼은 프레시가 구현되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디지털기기다. 이런 테크놀로지가 보편화된다면 실제로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까. 강 소장은 말한다. “데빌 커머스(Devil Commerce)라는 말이 있다. 실제 인구 20만~30만 미만인 유럽 도시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경제의 도래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진 구글세 논란은 그에 대한 응전이이라는 해석을 그는 내놓고 있다. “과거에는 군사력이나 자동차, 오일을 앞세우는 팍스아메리카였다면 이제는 디지털 기업을 앞세우는 디지털 팍스아메리카나 체제에 의한 점령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봐야 하는 움직임이 있다. 중국이다. ‘세계의 공장’ 역할로 기능하던 중국 역시 하드웨어 생산기지에서 머무르지 않으려 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BATX다. 즉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다. 이들 역시 검색과 온라인 쇼핑몰, 게임, 스마트폰이 주력상품이었지만 GAFA가 확장하는 영역에 대응하여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군사와 경제영역에서 G1(미국)과 G2(중국)의 각축은 정확히 디지털 영역에서의 대전(對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무엇일까.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의 TV 토크쇼를 본 적이 있다. 알리바바의 임원이 나와 인터뷰를 하는데, 월스트리트저널의 애널리스트가 알리바바를 두고 중국에서도 아마존처럼 온라인 상거래가 잘 이뤄지느냐고 묻는 질문에 ‘알리바바는 아마존이 아니며, 아마존 역시 당신이 생각하는 아마존이 아니다. 알리바바는 데이터컴퍼니다’라고 답하는 것을 인상 깊게 봤다.” <주간경향>은 샤오미의 급부상 실태를 다룬 기사에서 샤오미 전략의 핵심은 샤오미의 소프트웨어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1155호, “한국을 뛰어넘은 ‘샤오미의 혁신’” 기사 참조) 이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샤오미가 냉장고를 만들든 체중계를 만들든 목표는 하나다. 사용자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다.” 미국 중심 GAFA의 디지털 팍스아메리카나에 맞선 중국 BATX의 ‘디지털 실크로드 전략’에 따른 ‘디지털경제 세계대전’의 중심에는 사용자 데이터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중국의 BATX 움직임 주목해야
결국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GAFA와 BATX가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동안 한국은 왜 ‘위기’에 빠지게 되었을까. “흔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처지라며 샌드위치론을 거론하는데, 나는 넛크래커, 그러니까 호두 까는 기계 사이에 놓인 신세라고 비유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한국 1·2위 재벌기업의 경영전략과 실태를 분석한 책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삼성의 몰락>을 펴낸 심정택씨의 말이다. 그는 넛크래커에 비유해 한국 처지를 말한다면 ‘이미 깨져버려 부서진 호두 조각의 상태’라고 덧붙여 말했다. 풀이하자면 추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추월당했다는 시각이다. 계속되는 심씨의 말. “사실 샌드위치론을 꺼내든 쪽이 어디였나. 삼성이다. 우리가 이렇게 위기에 처했으니 정부에 도와달라는 것 아닌가. 중국 시장에서 삼성이 어려워진 게 글로벌 시장의 역동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본다. 삼성의 실패는 글로벌 역동성과 상관없다. 애플은 왜 중국에서 성공했나. 한국에는 애플스토어가 설치되지 않았지만 중국에는 설치했다. 삼성은 6개 총판에 맡겼고, 리테일 시장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사용자 경험이 피드백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전략 실패다. 한 기업의 전략적 실패를 왜 대한민국 정부가 돈을 들여 지원해줘야 하나.”
취재를 진행하며 <주간경향>이 접촉한 전문가들은 최근 ‘한국 IT산업’의 위기는 IT나 경제전략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시각을 보였다. 류한석 류한석기술연구소 소장은 정부가 ‘창조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부모가 자식을 때리고 학대하면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기이한 장면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류 소장의 말이다. “창조경제를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사람들이 자율성을 발휘하는 문화다. 전국의 17개 시·도에 만들어놓은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보라. 정부가 하라고 하니 두세 명 파견해놓고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다. 기업과 벤처가 연계해 협업하라고 하는데, 수도권에도 경쟁력이 있는 벤처가 없는 마당에 지방에 함께 할 벤처가 얼마나 있겠나. 열심히 하려는 사람들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벤처가 나올 문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창조경제’를 내세운 것이 잘못이었을까. “박근혜 정부가 슬로건으로 창조경제를 든 것은 맞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가장 중요하게 해야 했던 것은 문화를 바꾸는 것이었다. 재벌들은 하는 척은 잘한다. 아마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답을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 3년 동안 한국 사회가 창의성과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화로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나. 군대문화, 갑을문화만 더 세지지 않았나.”
이원재 교수는 ‘창조경제’와 관련해 이런 일화를 덧붙였다. “한 2년 전쯤 고속도로 휴게소를 지나는데, 전산과 교수가 플래카드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청년벤처 창업을 지원한다는 플래카드였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들 일행이 목격한 플래카드를 내건 쪽은 한국도로공사였다. “전산과 교수의 말은 이렇다. 정부가 창조경제를 한다고 하니 각 공기업이 알아서 기어 맞춘 것이 아닌가. 그게 이 정권 끝난 뒤에도 유지가 될까. 그 기간 동안 인생을 낭비한 젊은이들이 설 자리는 어딜까. 청년벤처 예산지원한다고 해서 특정세대가 길들여지다가 결혼할 나이쯤 되면 내던져지는 상태가 된다. 정권 홍보 차원에서야 지원으로 일자리 몇 개가 창출되었다는 식의 숫자가 나오는 것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CES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넷플릭스 창립자이자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 / UPI연합뉴스
실패로 결론 난 ‘창조경제’
5년 전 김인성 전 한양대 교수는 <한국 IT산업의 몰락>이라는 책을 펴내 한국 IT의 위기를 경고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중요한 것은 ‘분위기’인 것 같다. 한국에서 IT붐이 처음 일었을 때는 IMF 외환위기 때였다. 그때도 상황이 좋을 때는 아니었다. 내 지론은 권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막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조적 사회 분위기 자체가 뭘 할 수 없는 분위기다. 그 분위기가 중국으로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벤처를 만들기보다 삼성이나 공무원 취직을 원하고, 인터넷도 소수 기업에 의해 독점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답이 없다.”
정말 답은 없는 것일까.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행사에는 한국 기업들도 여럿 부스를 개설했다. 김도훈 대표에게 다시 물어봤다. “막상 현지에서 보면 외견상 한국의 대기업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홍보도 적극적이다. 중국이 부상한다고 하지만 몇몇 주목받는 기술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생산품의 완성도나 서비스, 디자인은 조악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 ‘뭔가 해보겠다’는 열정이 느껴지는데, 한국은 그런 활력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강정수 소장은 디지털 혁명, 혁신의 역사에서 한 가지 배울 점은 기존에 가진 것으로부터 혁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1970~80년대부터 경제를 이끌어온 산업화 세력이 지금도 그대로 있는 것이 문제다. 미국은 교체를 이뤄냈다. GAFA가 중심이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넘어 BATX를 통해 인터넷경제로 한꺼번에 이행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박정희 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독재를 했지만 적어도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카이스트나 KDI 같은 기관을 설립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인재들을 끌어모았다는 것이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정길남 박사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본에 있는 그를 데리고 오면서 집이나 직장뿐 아니라 자가용과 운전사 지급 등 최상의 대우를 해줬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경제 대전에서 기존 시장과 새로운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쟁탈전도 있지만 또 하나의 핵심은 인재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디지털 혁신의 중심지가 되면서 전 세계로부터 인력과 자본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강 소장은 정치·사회적 리더십이 바뀌어야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총선을 지나 누가 대선 후보로 나오든 나는 이런 비전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한국 사회가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기업에 포획된 공무원과 4~5년마다 바뀌어 대증적이 될 수밖에 없는 정책적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는 비전을 가진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
강 소장의 진단은 <주간경향>이 접촉한 다른 IT 전문가들의 의견과 거의 유사했다.
외부의 환경, 한국 사회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절망의 터널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지난 5년간 심화된 인식이다.
디지털경제 2진 NATU의 대두
“이제 우리는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곳에서 넷플릭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1월 6일 CES에서 기조연설을 한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CEO의 말이다. 넷플릭스는 이날 기존 60개국에 더해 130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지원 언어도 21개국으로 늘어났다. 한국도 포함되었다. 1월 7일 한국어로 선보인 서비스는 간단한 가입절차를 거친 뒤 한 달간 무료 시청이 가능하다.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과 관련해 당초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케이블·IPTV 측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콘텐츠 공룡’이라는 별명과 달리 상대적으로 빈약(약 7000건)해 해볼 만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과연 그럴까. NATU는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테슬라, 우버를 일컫는다. 강정수 소장은 디지털경제 혁명의 ‘제2진’으로 묘사했다. GAFA에 이어 역시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인터넷기업으로 기존 전통 경제영역을 잠식해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NATU 기업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이들이 온디멘드, 즉 소비자 내지 수요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업구조를 가졌다는 점이다. 중복되는 전통영역의 기존 사업자와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숙박시설 부족이라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에어비앤비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는 하고 있지 않지만, 우버는 기존의 택시협동조합 노사의 반대에 부딪혀 불법화되고 있다. GAFA와 마찬가지로 NATU 역시 데이터의 축적과 분석 기술이 핵심 테크놀로지인 기업이다. 넷플릭스는 2006년부터 ‘시네매치’라는 사용자 추천 시스템을 발달시켜 왔다. 7000여편의 콘텐츠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7000만명의 고객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던 ‘비밀’이다. 게다가 이제는 직접 콘텐츠 제작에까지 나서고 있다. 강 소장은 이렇게 반문했다. “빅데이터 시대라고 하지만 빅알고리즘을 누가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내세울 만한 알고리즘이 과연 있는가. 없다. 쇼핑몰을 보면 콘텐츠 가격을 후려치고 배송 인건비를 깎는 것이 경쟁력이었다면, 이들은 테크놀로지가 경쟁력이라는 것이 차이다.” 곱씹어봐야 하는 지적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입력 : 2016-01-09 19:17:07ㅣ수정 : 2016-01-09 19: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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