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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땅으로 본 한국 현대사(3/15) - 反託운동 역이용한 숙청공작

by 아름다운비행 2007. 12. 25.

조병현 님의 "북한토지연구소" 홈피에서 전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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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反託운동 역이용한 숙청공작

그럼에도 스탈린은 9월20일자로 공포한 「 점령정책」 제4항에서 『붉은 군대는 일본 정복자를 분쇄하기 위한 것일 뿐 조선에 소비에트식 체제를 도입하거나 조선을 영토로 삼으려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였다. 이것은 미국 3 省조정위원회가 미군정에 시달한 「최초의 기본훈령」(1945. 10. 3)에서 「귀하의 민정업무는 카이로선언에 따라 기존의 실정법과 절차법을 계속 유지」하라는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카이로선언에 따르는 한 美蘇 양군은 「기존의 실정법과 절차법」에 따라 오로지 점령군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으며, 자치권의 부여나 토지개혁 등은 모두 事後(사후)에 협의하여 시행될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평양입성 직후부터 赤化 공작부터 착수하고서는 겉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한 羊頭狗體(양두구체)였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계략이었으니, 이 점이 커밍스가 눈치채지 못한 해방정국의 진상이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한반도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1943. 11. 27)은 얄타 비밀협정(1944. 2. 4) 때 루스벨트의 제안에 따라 美英中蘇 4개국의 신탁통치로 낙찰 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 개최된 모스크바 3相회의(1945. 12. 16∼27)의 결정에 따라 美蘇 양군의 5개년간 신탁통치안이 공포됨으로써 남북한이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反託(반탁)운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이를 계기로 하여 소련군 최대의 정치 드라마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즉 소련군은 曺晩植 등 우익측이 반탁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이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최용건 등 좌익계로 하여금 조선민주당을 장악하게 하였다. 反託운동을 역이용한 기막힌 숙청공작이었다.

반탁의 열기가 서울거리를 휩쓸던 1946년 1월16일∼2월5일에 서울에서 개최된 美蘇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던 소련대표가 평양으로 되돌아간 2월8일이었다. 소련군은 북조선 5道행정국을 북조선임시인민위 원회로 개편하고 金日成을 위원장으로 앉히었으니, 이것이 행정과 당을 통합한 인민정권 즉 인민공화국의 사실상 출범이었다. 그리고 제1차 美蘇공위는 당초 3월5일에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소련군은 치스차코프의 승인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의일자를 일방적으로 연기하고서는 바로 이 날짜로 공포한 것이 놀랍게도 북조선 토지개혁법령이었다.

이로써 불과 25일 만에 전국 1만1500개 里洞(이동)별로 선출한 8만명의 농촌위원을 동원하여 그로차르가 주장한 대로 인구수에 비례하여 96만3457정보의 농지를 67만275 5호에 분배하였으니, 이것이 소련군이 단행한 토지개혁이었다.

이 개혁은 커밍스의 주장처럼 「밑으로부터의 혁명」이었지만 실은 100% 官權개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기준에 따라 불과 25일만에 말 많고 탈 많은 토지개혁이 일사 천리로 완료되었다는 것은 위로부터의 강력 한 통제와 강제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개혁이 거의 끝나가던 3월20일 에 서울로 온 소련군은 제1차 美蘇공위에 임하고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반탁파의 제거를 美蘇공위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金日成도 3월23일자 방송으로 제시한 「20 개조 정강」에서 『모스크바 3국 외상의 결정에 따라 창설된 蘇美공동위원회는 이달 20일에 서울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하였습니 다.… 조선인민이 절실히 요구하는 통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였다.

결국 소련군이 제1차 美蘇공위를 일방적으 로 연기한 것은 토지개혁을 하기 위해서였 으며, 이로써 曺晩植의 3·7제를 지지하던 지주층이 일거에 퇴출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월남이라는 민족이동으로 이산가족을 양산한 시발이었다. 소련군은 표면상 루스벨트의 신탁통치를 수용하는 것처럼 행동 하면서도 실은 미군이 충족할 수 없는 반탁파의 제거를 내걸고 신탁통치를 와해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소련군은 왜 美蘇공위 이전에 토지 개혁부터 단행했는가.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가장 첨예하게 표출하는 것이 土地 문제여서, 해방정국의 정치적 이면은 바로 소련군의 토지개혁과 관련되었다. 차례로 검토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