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현 님의 "북한토지연구소" 홈피중에서 전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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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농지개혁이 남한의 赤化를 막았고 북한의 토지 국유화에서 비롯된 1990년대의 가혹한 天刑이 북한의 외투를 날려버렸다
월간조선 2000년 8월, 金聖昊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의 글 땅으로 본 한국 현대사를 나누어 실습니다.
순서
1. 38선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2. 소련군의 기막힌 술수
3. 反託운동 역이용한 숙청공작
4. 北의 토지개혁은 국가에 의한 소작화
5. 金九는 해방정국의 낙오자
6. 美군정 反共정권보다 독재정권 우려
7. 농지개혁 싸고 李承晩-金性洙 대결
8. 李承晩의 농지개혁을 저지시키려고…
9. 왜 남한 농민들은 궐기하지 않았나
10. 自作地 비율 92.4%의 大성공 / 기막힌 역사의 장난
11. 金日成은 한국편?
12. 1·4 후퇴 때 만난 「鄭鑑錄」
13. 민족의 유토피아 남조선은 어디인가?
14. 北은 5·16 직후와 흡사한 상황
15. 정감록의 종착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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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8선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1945년 8월10일이었다. 광복 5일 전인 바로 이날 원자탄의 섬광에 놀란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통보해 옴에 따라 對日戰(대일전) 을 총괄하던 미국 3省조정위원회(SWNCC)의 전략정책단은 일제의 항복문서 초안을 부랴부랴 마련하게 되었다.이날 밤 11시 30분부터 12시까지 30분 사이에 정책단이 결정 해야 할 난제는 10일자로 압록강변의 웅기에 상륙하여 南下(남하)하기 시작한 소련군과의 관계설정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무려 600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밖에는 오지 못했기 때문에 對日戰을 다 이겨놓고 서도 한반도를 고스란히 소련군에 넘겨주어야 할 그러한 형편이었다.
이때 전략정책단장 GA 링컨 준장이 『내일 아침 우리는 소련군이 일본해협의 쓰시마를 점령했다는 뉴스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 』고 경악하였고, 해군제독 가드너는 『만 일 소련군이 한반도의 수도를 점령했다면 미군은 한반도 최남단의 부산이라도 점령해야 할 게 아니겠느냐』고 투덜거렸을 정도로 사태는 긴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일 駐韓 유엔?font color=red>본渶�活막?승진한 35세의 정책과장 CH 본스틸 대령이 한반도 지도를 보면서 30분 만에 짜낸 아이디어가 바로 한반도의 중간 허리를 자르는 38선이었다.
38선은 한반도의 중간일뿐더러 서울·인천이 38선 이남이어서 이것을 구획선으로 책정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38선을 미리 그어 놓고 소련군과 반반씩 나누어먹자는 흥정이 아니라, 시시각각 남하하는 소련군더러 38선에서 발을 멈추라는 요구여서, 스탈린이 이 제안을 수용할지 어떨지는 예측불허였던 하나의 전쟁모험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항복문서 초안은 8월15일자로 트루먼의 裁可(재가)를 거쳐 스탈린에게 통보되었다. 정책단 전원이 마음을 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자로 스탈린이 전격적으로 트루먼의 메시지에 답해 왔다. 그것도 미국의 38선 제의에 동의한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 북해도 북쪽을 소련군이 접수할 수 있게 수정되도록 요구했다는 것이 미국 CI A 요원이던 TM 하리마오씨의 증언이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소련이 일본 본토와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해도 문제를 점잖게 빼돌림에 따라 스탈린은 38선만을 수용 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민족의 비극선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인의 의사와 한국의 역사, 심지어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조차 무시한 채 그어진 38도선! 결국 『미군의 단견이 38선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크나큰 원인이 되었다 』(조순승)는 것이 38선에 대한 우리들의 예외 없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38선은 소련군의 南下를 저지하기 위하여 30분 사이에 만들어진 작전상황이어서 한국인의 의사와 역사 등을 미주알 고주알 따질 때가 아니었다.
8월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가 여운형과 대좌한 자리에서 『소련군이 늦어도 17일 오후 2시경까지 서울에 입성할 것 같소』(송남헌)라 말했을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급류를 타고 있었던 순간이었다. 만일 38선이 그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국토는 분단되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미군의 인천상륙(1945. 9. 8 ) 이전에 소련군은 이미 부산까지 점령했을 것이고 일단 점령한 땅을 미군에 되돌려 주지는 않았을 것인 만큼, 오늘까지 50년간 우리는 속절없이 金日成(김일성)·金正日 (김정일) 아래서 헐벗고 굶주려 왔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38선이 그어진 것만 같지 못하다. 국군의 북진 때 통일하지 못한 것이 북한주민에게 미안한 숙제로 남게 되었지만, 여하튼 38선을 수용한 스탈린의 선택이야말로 한반도 전체를 무혈로 차지할 수 있었던 절호의 찬스를 스스로 놓치고만 어처구니없는 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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