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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땅으로 본 한국 현대사(2/15) - 소련군의 기막힌 술수

by 아름다운비행 2007. 12. 25.

조병현 님의 "북한토지연구소" 홈피에서 전재함

 

 

소련군의 기막힌 술수

38선은 미국의 요청을 스탈린이 수용함으로써 설정된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국토의 군사적 분계선이었을 뿐 민족의 분단선은 아니었다. 그러면 누가 국토의 분단을 민족의 분단으로 전환시켰는가. 386세대의 영웅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중앙정부가 없었던 북한에서는 평안남도가 중앙정부를 代行했었음을 알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1945년 8월24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조선인들이여! 기억하시오! … 이제 모든 것이 완전히 당신들의 세상』이라 외치며, 미군과는 달리 호호탕탕 해방군을 자처하면서 기세를 올리었다. 그리고 2일 후인 8월26일, 북조선에서 신망이 가장 높았던 우익측의 曺晩植(조만식)·현준혁과 일본인 평남지사 고가와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서는 『26일 오후 8시를 기하여 평안남도의 행정권을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정치위원회에 인계한다』(송남헌)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9월12일자 정치위원회 중앙회의에서 曺晩植은 소련군이 제시한 인민정권 수립과 토지개혁을 반대하면서 地主制를 전제로 한 3·7제를 선포하여 소련군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자 이에 당황한 소련군사령부 정치지도원 그로차르는 9월14일자로 「인민정부 수립요강」을 발표하였으니, 그 제1항에서 인민정권을 표방한 다음 제2항에서 「토지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인구수에 비례하여 재분배해야 한다」고 우익측을 몰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서는 9월 8일에 조만식의 수하 현준혁을 평양의 백주대로에서 쳐죽이고, 평남 인민위원회로 하여금 그로차르의 「수립요강」을 수용하게 하여 각道 로 파급시켰다.

그리고 10월10일자로 조만식에 대체시킬 33세의 젊은 金日成을 부랴부랴 소련에서 귀국시켜 14일자 평양 군중대회에 화려하게 데뷔시키고서는 曺晩植의 조선민주당(11. 3)에 대항하여 김일성을 북조선공산당(12. 17) 서기로 임명했던 것이다. 결국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즉각 자치권부터 허용한 것은 조선인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실은 토지개혁으로 인민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기막힌 술수였던 것이다.

월간조선 2000년 8월, 金聖昊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의 글 땅으로 본 한국 현대사를 나누어 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