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모교의 후원자인 한진그룹, 조중훈 이사장.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기사중 모교와 관련된 글 두 개.
파란의 블로그중 오영인님의 블로그 "파란을 일으키는 파도"중에서 옮겨옴.
* http://blog.paran.com/padoin82
오영인님의 블로그는 2004년 7월 27일 개설되었고,
일대기1~18까지를 올린 날짜가 2004.11.20인 것으로 보아
아래 기사들은 2004년 하반기에 실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영인씨가 누구인지,
왜 그는 조중훈 일대기만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고 있는지,
문화일보에서의 기사 원문 등등
좀 더 자세한 것은 추후 시간여유가 있을 때 확인해보기로 하지요.
아래 글에 나오는 나의 모교, 인하부중-인하부고-인하대에 관한 것 말고도,
내가 1970년에 중학교에 입학한 후
前 인하부고 건물(지금은 그 자리가 인하공전 건물로 되었지요)을 지을 때
그 공사현장을 구경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 미터 아래로 파니 아래는 시커먼 개흙,
한 층에 교실 7개인가..음악실, 미술실로 쓰던 큰 교실까지해도 10개는 채 안되었을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150여개를 박아넣는 모습에
'참 대단한 공사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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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중훈 일대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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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는 창간 12주년을 맞아 22일부터 주1회 기획시리즈 ‘재계 인물 현대사’를 시작합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빈손으로 시작해 오늘날 세계에 내로라하는 일류 기업들을 일궈낸 재계 영웅들의 삶을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선정된 인물은 땅과 하늘과 바다를 아우르는 한국의 물류시스템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고(故) 정석(靜石) 조중훈(사진) 한진그룹회장입니다.
그는 평생 운송·물류업에 전념하면서 ‘수출한국’의 버팀목이 되었고, 한진그룹을 종합물류 기업집단으로 키웠습니다.
한국의 짧은 현대경제사를 되돌아보더라도 부실경영이나, 문어발식 경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재벌들이 적지 않았기에 조 회장이 걸어온 ‘외길인생’은 더욱 의미를 더합니다.
조 회장은 지난 17일로 타계 1주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물류에 대한 그의 꿈은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 건설’이라는 국정과제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조 회장이 평생을 일궈온 한국물류산업의 역사를 조명함으로써 물류중심국으로 도약하려는 한국의 미래를 비춰보고자 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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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인천 남구 용현동에 자리잡은 인하대 교정에는 찬바람 속에서도 봄기운이 완연했다. 언덕배기의 진달래는 꽃망울을 머금었고, 키 큰 소나무가 즐비한 ‘하이데거의 숲’에도 파릇파릇 싹이 돋고 있었다. 정문을 마주한 본관 건물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화사한 대리석으로 새단장했다.
인하대가 자랑하는 도서관은 교정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건물의 외형은 양쪽에 스피커를 달고 사각형 학사모를 눌러쓴 오디오 모양이다. 건물 입구 오른쪽에 ‘정석학술정보관’이라는 건물의 명패가 보였다.
조중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던 2001년 자신이 직접 구상한 정석학술정보관을 착공했다. 미국의 유명 건축업체인 GWA가 설계를 맡은 이 건물은 3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지난해 9월 17일 완공됐다. 그러나 조중훈은 자신의 마지막 정열이 담긴 도서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2002년 11월 눈을 감았다. “인하대에 한국 최고의 디지털 도서관을 지어달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 되고 만 셈이다.
조중훈이 세상을 뜨고난 뒤 장남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도서관을 완공하고 ‘Jungseok Memorial Library(정석학술정보관)’라는 정초(定礎)를 새겨넣었다.
도서관은 지하2층, 지상6층에 연면적이 7500평으로 국내 디지털도서관 가운데 최대규모다. 장서 규모는 100만권에 달하고 각종 멀티미디어 콘텐츠 자료와 국제 회의를 위한 컨벤션 센터, 위성방송 수신설비 등이 구비됐다. 도서관 5층에는 미국 남가주대(USC)와 공동개발·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가상현실체험관도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인터넷으로 10.2채널 음향을 체험할 수 있는 ‘몰입형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디지털 도서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운영도 최첨단을 달린다. 3500개 열람석에는 인터넷을 통한 좌석예약제가 도입됐고 세계 유수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최신식 정보서비스 프로그램 ‘밀레니엄 시스템’도 설치됐다. 건물과 내부 시설에 들어간 비용은 총 473억원에 달한다.
정석학술정보관 1층 로비 한쪽벽에는 ‘종신지계 막여수인(終身之計 莫如修人)’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중훈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말이다. 중국의 고서 ‘관자(管子)’에 나오는 명언으로 ‘한평생을 살면서 가장 뜻 있는 일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다.
맨손으로 일어나 평생을 바쳐 총 자산규모 23조5000억원, 연매출 16조원의 세계적인 종합수송물류기업집단을 일궈낸 조중훈이었지만, 젊은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 학업을 중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평생 애틋함이었다. 기업이 육영사업과 사회환원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36년전 조중훈이 인하학원을 인수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한진상사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항공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직전인 1968년, 조중훈은 정부로부터 “인하공대를 인수해줄 수 있겠느냐”는 뜻밖의 요청을 받게 된다. 월남전 용역사업을 통해 사업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놓긴 했지만 당시 한진상사는 이제 막 기업의 틀을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사학을 인수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천’과 ‘하와이’의 첫자를 딴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하공대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교포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범시킨 학교다. 한국의 공업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아래 넉넉한 정부 보조금과 하와이 교민들의 후원을 받아 건립된 인하공대는 당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 사학’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인하공대는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자유당 정권출신 요인들이 계속해서 재단을 맡았지만 재정적인 지원은 없었다. 정치적 격변기속에 61년부터 68년까지 이사장만 10명이나 교체됐다.
하루 품삯으로 70센트를 받았던 하와이 이민 1세대가 고국의 교육발전을 위해 15만달러의 기금을 쾌척해 지은 학교가 애물단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조중훈은 하와이 교민들의 땀과 눈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부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천은 조중훈이 한국전쟁 직후 한진상사의 첫 사무실을 연 곳으로, 한진그룹에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중훈은 자서전에서 “그무렵 나는 한일개발의 설립과 인천 민자부두 건설계획 등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사학운영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시기였다. 그러나 ‘언제든 여유가 있을 때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는 평생토록 좋은 일 한번 하기도 어렵겠다’는 마음에서 맡아보기로 결심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68년 9월 인하공대를 인수한 조중훈은 우선 2억원을 기증해 교육환경 개선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7만평 인하대 캠퍼스에는 부지 곳곳에 무허가 판자집과 기와집이 50여채나 들어서있을 정도로 주변 환경이 어지러웠다. 조중훈은 판자집 주민들에게 일일이 이주비를 보상해주며 면학 환경을 조성해 나갔다. 조중훈이 재단을 인수한 지 3년만인 1971년 12월 인하공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인하공과대학 부설 중앙종합직업학교(현 인하공업전문대학)도 체계적인 기틀을 갖춰 나갔다. 70년 2월 인하공업전문학교로 개편 인가를 받은 뒤 매년 주요학과의 증원과 신설이 이어졌고 76년에는 오늘날 인하공전의 간판학과가 된 항공운항과가 신설됐다.
인하대는 교육의 중심이 서울에 과도하게 치우쳐있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대학중 유일하게 국내 10위권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87년 통상물류전문대학원을 설치한 데 이어 올해는 국내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물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물류 분야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조중훈이 지난 36년동안 인하학원에 지원한 금액은 4100억원에 달한다. 조중훈은 이밖에도 생전에 자신의 사재 대부분인 1000억원(한진그룹 계열사 보유주식 502만주와 부동산)을 학원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증해 수송물류 및 육영사업에 쓸 수 있도록 했다.
사재를 털어가며 아낌없는 투자를 했지만 조중훈은 자신이 인하학원에 기울인 정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칭찬을 받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철학 때문이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기업이 사회환원 사업을 과시하는 것을 꺼렸고, 교육의 내용이나 학교의 운영에 있어 철저하게 독립성을 보장하려 애썼다.
인하대 조석연 대외협력처장(환경공학과 교수)은 “다른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학과 인하대의 차이점이 있다면, 한진그룹에서는 인하대에 적극적인 지원만 할 뿐 간섭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격변기와 외환위기 등을 거치며 적지않은 기업과 자본가들이 사학재단을 등졌던 반면 한진그룹만은 지난 68년이래 36년에 걸쳐 단 한번의 부침도 없이 매년 100억~300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계속해온 것도 유별난 점이다. 적지않은 사학 운영자들이 거액의 기금만 던져놓고 경영은 방치했던 것과 달리 조중훈은 수시로 인하대 캠퍼스를 찾아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을 둘러보며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88년 인하사대부중과 사대부고의 교사 신축공사 당시의 일화는 그가 사학운영에 기울인 각별한 애정을 말해준다.
당시 조중훈은 공사가 어렵다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축 부지로 시유지였던 남구 학익동의 돌산을 사들였다. “시야가 탁트인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공부하는 학생과 빌딩숲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공부하는 학생과는 호연지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인천시내와 앞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 곳에 학교를 지을 것을 고집했다.
화강암산을 깎아 학교를 짓는 과정에는 1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됐고, 기초공사에만 1년 이상이 걸렸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중훈은 매주 현장을 찾아 진척 상황을 점검하고 직원들을 독려했고, 황혼기에 접어든 90년대 후반까지도 수시로 학교를 찾곤 했다. 예고없이 찾아온 조중훈을 맞는 것은 당직 교사들의 일과중 하나였다.
인하사대부중 이성인 행정실장은 아직도 생전 마지막으로 학교를 찾아온 조중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97년 7월 오후 1시쯤, 학교에서 일요당직을 서고있는데 회장님께서 지프를 타고 갑자기 찾아오셨습니다. 저에게 같이 학교를 한번 돌아보자고 하시더군요. 거동이 불편하셔서 학교 뒷동산에 멈춰 차에서 내리실 때는 제가 직접 부축을 해드려야 했습니다.” 이 실장은 “힘든 몸을 이끌고도 학교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부족한 시설은 없느냐’고 물어보시던 회장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인재 양성은 조중훈에게 평생 공들여 가꾸고 보살펴야 하는 인생의 ‘업’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가 반평생에 걸쳐 소리없이 뿌려놓은 육영사업의 씨앗은 올해로 개교 50주년을 맞은 인하학원의 교정 곳곳에서 조용히 그 열매를 맺고있다.
* http://blog.paran.com/padoin82/857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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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중훈 일대기 18
1991년 2월20일. 아침부터 하늘을 무겁게 뒤덮고 있던 먹구름은 오후가 되자 끝내 눈송이를 뿌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굵어지면서 세상은 금세 새하얀 눈옷으로 갈아입었고, 인하대 교정에는 포근한 융단 카펫이 깔렸다. 180명의 한진산업대학 졸업생들은 조심스럽게 눈을 밟으며 인하대 강당에 마련된 졸업식장으로 향했다.
밀려드는 설렘에 지난 밤을 설쳤지만 노모와 아내와 자식들의 손을 잡은 발걸음은 날아오를 듯이 가벼웠다. 적어도 오늘만은 세상이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졸업식장은 가장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가족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연방 졸업가운을 고쳐 입었지만 어색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후 3시. 식이 시작되자 연단 위로 조중훈이 나타났다.
“오늘부터 우리 회사는 여러분을 4년제 정규대학 졸업자와 조금의 차별도 없이 동등하게 대우하겠습니다.”
조중훈의 엄숙한 선언에 졸업식장에는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못배운 설움과 직장에서의 차별을 벗어던지고자 지난 2년을 주경야독으로 살아온 그들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기립 박수로 조중훈의 선언에 환호를 보냈지만 정작 아버지의 눈가는 이미 젖어있었다. 최고령 졸업생인 정용태(43) 대한항공 부품정비과장이 졸업생 대표로 사각모를 받아쓰자 만학도들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하나둘 고개를 떨구었다.
한진산업대학은 배움에 대한 직원들의 갈증을 풀어주고자 조중훈이 기획한 작품이었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온 나라가 들떠있던 87년 9월, 조중훈은 대한항공에 ‘사내대학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생계에 쫓겨 학업을 중단했어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평생 사라지지 않음을,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88년 3월 국내 최초의 사내대학인 ‘대한항공 산업대학’이 설립됐고 2년 과정으로 항공기계과와 항공전자과가 개설됐다. 5600명에 달하는 고졸 직원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입학 경쟁이 너무 치열해 부서장 추천으로 지원자를 추려야 할 정도였다.
“미적분을 풀지못해 쩔쩔매다가 고등학생 딸아이에게 배웠습니다.”
“강의실에 앉으면 잠이 쏟아집니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버티고 있습니다.”
만학도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 듣고 조중훈은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낮에는 조선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헌책방에서 빌려온 책을 허기진 듯 읽어치우곤 했었다.
조중훈은 사내대학을 그룹 전체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91년 3월 대한항공산업대학을 한진그룹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한진산업대학’으로 재탄생시켰다. 교과 과정은 총 8학기에 144학점. 개설학과는 조선공학과와 기계공학과, 경영학과, 산업공학과가 추가됐다.
한진산업대학의 수업 내용은 교련과 체육을 제외하면 정규 대학과 똑같았다. 학생들은 매주 사흘씩, 밀려오는 잠과 싸워가며 3시간 동안 꼬박 강의를 들어야 했다. ‘사내대학’은 커녕 ‘사회 재교육’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이었고, 한진산업대학은 출범과 함께 숱한 화제를 뿌렸다.
조중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졸업생에게 4년제 대졸 사원에 준하는 대우를 보장해주라”는 파격적인 지시를 내린다. 임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조중훈은 “학벌로 대우받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말로 이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한진산업대학은 이후 다른 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쳐 ‘사내대학’ 설립 붐을 일으켰다. 그리고 99년 교육부는 마침내 일정 요건을 갖춘 사내대학에 대해 학위를 공식 인정해주는 법안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한진산업대학이 졸업생에 대한 학위인정제를 시행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한진산업대학은 국내 최초의 교육부 학위인정 기술대학인 정석대학으로 발전했고 올해로 3회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중훈은 후일 자서전에서 사내대학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사내 산업대학 졸업식에는 만사를 제치고 참가했다. 사내대학 졸업생들의 인간승리의 사연은 때로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황폐해진 현실에서 이들이 갖는 의미는 밝고 유쾌한 일이기도 했다.”
정석대학이 배움에 대한 직원들의 한을 풀어줬다면 한국항공대학은 조중훈에게 ‘항공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소명을 안겨준 학교다. 조중훈이 국립항공대학을 인수한 것은 1979년의 일이다. 국립항공대학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항공전문인력의 육성’이라는 거창한 목표 아래 정부가 세운 학교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정은 항공대학의 전문 기술교육을 지원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심끝에 조중훈에게 “대한항공이 국립항공대학을 인수해 제대로 키워달라”고 요청했고, 조중훈은 두말없이 수락했다. 그 역시 항공전문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8년 12월22일 학교법인 정석학원 설립 신청을 마친 조중훈은 그 날 오후 아무런 예고없이 항공대학 캠퍼스를 찾았다. 고양시 철도청 부지에 들어선 항공대학의 환경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학생수 700명, 개설학과 5개의 ‘초미니 대학’인 항공대의 학교 시설은 무허가 건물 몇 채가 고작이었다. 갈 길이 멀기만 했다. 조중훈은 캠퍼스를 돌아보던 중 도서관에 들러 빈약한 시설 속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도서구입비로 500만원을 내놓았고 운항학과 학생들의 교육실습용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세스나 경비행기 2대도 기증했다.
이듬해 3월5일 한국항공대학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조중훈은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우선 시설 설립기금으로 현금 2억원과 1억원 상당의 주식을 재단에 출연하고, 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한일빌딩(당시 시가 40억원)을 수익재산으로 기증했다. 그리고 학교 인근부지를 사들이며 교사 신축을 준비했다. 정석학원 산하 항공대학을 중심으로 항공공고, 항공전문대학, 항공대학원을 설립하고 대한항공 기술연구소를 이 곳으로 이전해 항공교육과 산·학협력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것이 조중훈이 그린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난관이 발생했다. 19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 이후, 항공대 발전을 위한 장밋빛 계획들이 개발제한지역 규제에 묶여버린 것이다. 81년 1월 정석학원이 정부에 제출한 ‘도시계획시설 학교 설정신청’은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고,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로 도서관 증축계획마저 반려됐다. 삽질 한 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92년 4월에는 국방부로부터 “군 시설로 써야하니 항공대 부지를 비워달라”는 통보까지 떨어졌다. 조중훈은 할 수 없이 경기도 안성에 10만여평 땅을 사들여 학교 이전을 검토했지만 이번에는 학생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학교 개발계획이 기약없이 지연되자 학생들은 “항공대를 차라리 국립으로 전환해달라”며 학내 시위를 일으켰다.
하지만 조중훈은 항공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홍순길 한국항공대 총장은 “회장님께서는 항공대를 방문하셨을 때 활주로를 두드려보며 강도를 확인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계셨다”며 “규제에 묶여 시설 증축이 어려워지자 최고의 실습·연구용 설비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조중훈은 82년 7월 대만에서 PC6 항공기를 들여와 항공대에 연구용으로 기증했고, 이어 최고급 훈련기종인 무니(Moony) 비행기 6대를 기증했다. 92년 10월에는 다시 신형 실습기 구매자금으로 40억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다독이며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설득을 계속했다. 정부와의 밀고 당기는 실랑이는 장장 15년간 계속됐고, 94년 8월9일 마침내 정부에서 ‘개발행위완화허가’가 떨어졌다.
조중훈은 당장 500억원을 투입해 부지 3만평을 추가로 사들이고 시설 신축을 시작했다. 허허벌판이었던 교정에는 공학관·과학관·학생회관·실습동·도서관 등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섰다. 조중훈이 15년간 가슴 속에 그리고 있던 항공대의 청사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항공대는 총 10개 학부에 교직원이 300여명, 재학생은 4135명에 달한다. 그리고 1952년 이래 항공대를 졸업한 1만1838명의 학사와 1042명의 석사, 100명의 박사들은 대한항공은 물론 국내외 항공 관련 연구소와 유수 항공업체, 공공기관 등에 진출해 맹활약중이다.
한국항공대학은 작고 강한 특성화대학을 목표로 세계 제일의 항공대학인 미국 엠브리 리들 대학 등 13개국 23개 대학과 활발한 교류 활동을 펼치며, 학생수 8000명 미만인 ‘소규모 대학’으로서는 독보적인 인프라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특성화 최우수대학’에 선정됐고, 올해는 ‘2차 대학발전계획’ 아래 시설 증축을 계속하며 정부에 개발지역 추가 완화를 신청했다. 항공전문인력 양성을 향한 조중훈의 꿈이 그가 두들겨보곤 했던 항공대학 활주로에서 이륙하고 있다
* http://blog.paran.com/padoin82/857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