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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23.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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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01년 5월14일 오후 2시 새로 건축된 서울 상동교회에서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제17회 한국선교회가 열렸다.
 
이날 무어 감독(Bishop D. H. Moore)의 주례로 시란돈, 조원시, 로보올 등 서양 목사 보좌를 받아 대한기독교감리회 인천내리교회 초대 교인인 김기범(1868~1920년)이 김창식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기범은 목사 안수를 받은 그 해 한국 개신교의 씨앗이 뿌려졌던 인천 내리교회의 초대(외국인 목사 포함하면 3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됐다.
 
미국 감리교회는 1885년 한국 파견 최초 선교사로 인천내리교회의 선구자였던 아펜젤러 목사와 2대 조원시 목사의 뒤를 이어 최초의 한국인 목사를 임명함으로써 신앙과 선교활동의 폭 넓혀 가기 시작했다.
 
김기범은 1903~1905년, 1907~1910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교세 확장은 물론 교육운동과 항일운동등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는 목회활동에 주력했다.
 
김기범은 황해도 연안의 부농 양반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보부상의 중심지였던 개성에서 태어난 만큼 서울을 자주 오가며 서양 문물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보부상과 함께 인천(당시 제물포)을 찾은 김기범은 아펜젤러 목사를 도와 전도활동에 매진하던 노병일 권사, 백혜란 전도사 등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한발 더 나가 이명숙, 장경화, 복정채 등과 함께 인천내리교회의 초대 교인으로 본격적인 신앙인의 길을 택한다.
 
인천내리교회가 지난 1985년 펴낸 '내리 100년사'는 “(김기범은)노병일씨의 전도로 후임 내리교회 전도사가 돼 1899년 신학회 전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그 해 원산(元山)으로 파송됐다가 1901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뒤 그 해 내리교회의 초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내리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로 봉직하던 김기범은 교회 안에 영화학교를 설립해 인가를 받아내고 1904년엔 벽돌로 된 교사(校舍)를 신축하기도 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 때 교회 청년회가 항일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체되기도 했다.
 
김목사는 1902년 11월 미국 하와이로 50여명의 교인들이 이민을 떠난 뒤 급격히 교세가 위축되자 헌신적 교인을 모으고 신앙심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특히 김목사는 당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선교활동에 애를 먹던 외국 선교사들과 달리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고 성실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 두터웠다고 한다. 덕분에 교세가 확장됐지만 김목사는 건강을크게 해쳐 서양 선교사들처럼 1905년 유급 안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인 목회자를 경시했던 개신교의 풍토에서 김목사가 유급 안식년을 받아낸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급 안식년제 요구가 교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목사는 스스로 교회일에서 손을 떼고 안식년에 돌입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쓰여진 연례보고서를 비롯, 각종 선교사 자료엔 이후 행적이나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목사는 교계의 미움을 산 것으로 추측된다.
 
향토사학계와 한국기독교계 일부 인사들은 “미국 선교사들보다 훨씬 능력있는 지도자로 추앙받던 김기범의 1905년 이후 행적이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백인우월주의의 귀결”이라고 평가한다.
 
거부의 아들인 김기범이 안식과 돈 때문에 미국 선교본부에 유급 안식년을 요구했을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김기범의 유급 안식년 요구는 7년마다 1년씩 갖는 인식년 적용을 한국인 목회자에겐 허용하지 않는 서양 선교사들의 민족차별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기범의 구체적인 행적과 활약상은 변변한 자료나 고증도 없이 영영 역사 속에 묻히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최영호 인천내리교회 행정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족적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김기범 목사님의 흔적을 찾는데도 힘쏟고 있으나 자료 발굴이 매우 어려워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기범의 장증손녀 김민자(46)씨는 “할아버지는 안식년은 물론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를 마친 뒤로도 지금의 북한 지역과 옹진군 섬지방을 돌며 선교활동에 힘 써 왔다고 선친들로부터 들었다”고 전한다.
 
그녀는 또 “이 과정에서 당시 서해안 곳곳에서 출몰하던 해적들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병을 앓게 됐고 병환이 심해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1920년 영면한 이후 그의 묘지는 수봉공원에 있었으나 1972년 지금의 서구 왕길동 묘역으로 옮겨 졌다.

 

윤관옥·okyun@kyeongin.com / 2005.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