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두희(劉斗熙)'.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이 거세던 1920~1940년대 초기 인천지역에서 노동, 교육,
언론 등 다방면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중심적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철저히 외면당한 이름이다. 항일의 최선봉에 섰지만 일제 하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이후 지금까지 그에 대한 행적은 철저히 지워졌다.
지난 7일 오후 7시30분께 인천시 계양구 작전2동의 한 허름한
아파트. 어렵사리 수소문해 유두희 선생의 아들인 대관(80)씨를 찾았으나 그에게선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 “아버님에 대해
듣고 싶어 왔다”고 하자 백발의 노인이 된 아들은 “그 사람 여기 없다”면서 현관 문을 닫아버렸다. 말씀해 주시면 (아버님의 명예회복에)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면서 계속해 문을 두드렸지만 “됐어요!”란 한 마디 이후엔 대꾸도 없었다. 6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가족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그 속에서 아들은 팔순이 될 때까지 얼마나 큰 응어리를 안고 살았으면 저렇게 아버지를 부정할까 하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 날엔 동사무소 관계자를 대동해 다시 대관씨 집을 찾았지만 여전히 현관 문을 열 수는 없었다.
유두희 선생은 1901년 12월
24일 강화에서 나 인천 영화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영화초등학교엔 선생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고 했다. 1945년 11월
11일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행적은 당시 신문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1945년 11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전하고 있는 대중일보는 유두희 선생을 '인천 노동사상(史上) 잊지 못할 무산계급(민중) 교사였다'고 칭하고 있다. 또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유를 '재직 당시에 받은 혹형으로 다년간 병석에 누웠다가 별세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일보는 기사 말미에 선생의 약력을 적고 있는데, ▲동경에서 고학 ▲19세부터 소년운동 지도, 한용청년회·제물포청년회
등을 결성해 청년운동에 열성 ▲1925년 이래로 인천 무산청년동맹을 비롯 각 지방 청년회를 결성 지도,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조직 그리고 인천
최초의 공산당 및 공산 청년동맹원으로 지하운동에 심혈을 경주 ▲중외일보 기자와 무산자신문 지사장 등으로 언론지도 ▲조선 노동동맹, 경기도청년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5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피검돼 8년간의 옥중 생활에 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등 다방면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활약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일제는 노동운동과 공산당활동을 가장 경계했다고 한다. 민족주의
인사들보다 노동운동이나 공산주의활동을 한 경우 고문의 강도도 높았고, 형량도 월등했다고 한다. 이 당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체포돼
수감생활 중 얻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20년대부터 인천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노동, 교육, 언론 등 각종
단체의 주요 인사 명단에 '유두희'란 이름 석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923년 10월 1일부터 영화학교에서 시작된 노동야학의
교사로 참여한 것으로 당시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 이 야학이 이듬해엔 인천소년회 창립으로 발전한다. 1924년 5일 영화학교 강당에서 치러진
인천소년회 창립대회에서 유두희 선생이 취지를 설명할 정도로 주도적으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인천소년회 총무를 맡았다. 또 1925년엔
취학연령에 있으면서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을 설립,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수는 30여 명, 교사는 선생과
고일씨를 포함해 8명이었다. 선생이 펼친 노동야학이 소년운동으로 그리고 초등교육기관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매년 조직과 역량이
커지던 선생은 1926년 2월 12일 일본검찰에 붙잡힌다. 방역비 임치금문제로 인천신용조합장 최응삼과 충돌이 있었는데, 당시 검거된 인사는
선생을 비롯해 곽상훈, 고일, 안기성, 강복양 등 5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인천정미소 파업운동을 주도하는 등 노동운동에
매진, 1926년 8월 25일엔 인천청년노동조합 창립 발기인대회 임시의장을 맡았다.
그는 특히 1927년 12월 5일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에서 곽상훈씨 등과 함께 총무간사를 맡는다. 회장은 하상훈씨였다. 이후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노동사건엔 늘
선생이 끼었고, 경찰에 여러 차례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선생 별세 6개월 여 이후인 1946년 5월 1일 치러진 노동절
기념식에선 최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권평근 선생과 함께 유두희 선생도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이날 노동절행사를 대중일보(5월 3일자)는 “해방
후 처음 맞는 공업도시 인천의 메이데이 기념식과 동 대회는 1일 오전 10시서부터 시내 도원동 공설 그라운드에서 시내 60여 노동단체가 참가해
성대히 거행되었다”고 보도했다.
유두희란 이름은 이날 노동절 표창 이후엔 '일제 때부터 이름있는 인천지역 공산주의자'로 내몰렸고,
'반공'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수십년 동안을 묻혀 있었다.
취재후기 : '빨갱이 치부' 연구배척, 유가족 냉담도
가슴아파
해방 60년을 맞는 올 해지만 아직도 '자랑스러워 해야 할 항일투쟁'에 대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제 강점기 인천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유두희 선생을 취재하면서 더욱 그랬다. 사회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해방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아직도 '빨갱이'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팔순의 아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살아 있다.
아들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전체의 '병'인 것이다. '유족을 취재해 살아있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대원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절반의 취재가
부끄러웠지만 아픈 현실이라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사를 작성했다.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유두희 선생은 인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시기 사회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배척돼 왔다”면서
“이제라도 올바른 역사의 끈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선생 등에 대한 연구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유두희 선생이 참여했던
공산당주의운동은 일제에 항거할 가장 강력한 무기로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것이란게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우리민족의 힘만으로 일제를
물리치기엔 현실적 어려움이 있어 전세계의 노동자의 힘을 빌려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 정권 수립
이전에 공산주의에 참여했다가 해방직후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까지 여전히 '공산당'이란 멍에를 씌워선 안된다는 것이다.
유두희 선생의
아들 대관씨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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