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가장 추운 겨울날. 매섭고 시린 겨울바람마저도 끌어안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서는 어머니의 포근하면서도 강인한
백합의 향기가 흐르고 청롱하면서도 우렁찬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 년에 한 번 우는 꾀꼬리'의 후예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천 년에 한 번 난 백합'의 자애로운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라. (모윤숙의 김활란 추모시 중)
“이 땅에 완전한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날까지 기필코 이화를 여자대학으로 키워나가겠다.” 김활란 박사의 확실하고 단호한 다짐이다.
지난 주말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이 곳에서 한평생 배우고 가르치며 총장직까지 지냈던 그를 좀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이대 교정을 찾았다. 김활란
박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아직도 이 곳에서 그리고 많은 여성들로부터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김 박사에 대해 묻자, 한 여학생은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나 지나치게 과오의 행적을 들추는 것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며 “(그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월(又月) 김활란. 그에게는 '여성운동가', '교육자', '최초의
여자 박사', '신앙인', '외교가'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그는 지난 1899년 인천
배다리마을(현 동구 창영동)의 작은 초가지붕 아래서 여러 형제들 중 막내딸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김진연·金鎭淵)는 선비풍의
섬세한 용모를 지닌 침착한 분이었다고 한다. 평북 철산의 농토를 조카들에게 맡기고 개항이 되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인천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부모님이 지어준 그의 이름은 '기득'(己得).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에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얻게 된다.
이 세례명은 미신을 신봉하던 그의 가정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한 백 헬렌 여사의 이름과 같다.
백 헬렌 여사의 끊질긴 설득으로 전
가족이 내리교회에 나가게 됐고, 교회에 나간 지 여섯달 후 전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다. 김 박사의 조카 김정옥은 '이모님 김활란'이란 책에서
'그 당시 인천 바닥에 자자하게 소문이 퍼질 만큼 화제가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목사님의 실수만 없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김또라'가 됐을 것이다.
'이모님(김활란)의 세례명 헬렌은 본래 외할머니가 원했던 이름이었다. 자신을 기독교 신자가 되도록
이끌어 준 전도부인 헬렌을 좋아했던 외할머니는 자기도 똑같은 이름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세례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목사님이 잠깐 착각을 일으켜
어머니 몫인 헬렌과 막내딸(김활란) 몫인 또라를 바꿔 부르고 말았다'.
김 박사의 조카 김정옥이 쓴 책인 '이모님 김활란'에 나와
있는 글이다. 향후 김정옥은 이화여대를 나와 이대교수로 봉직하면서 이대 학생처장, YWCA 고문, 동구학원 이사장 등을 지낸다. 이모(김활란)의
뒤를 따라 한평생을 여성교육에 앞장서온 그는 지난해 노환으로 별세한다.
조카 김정옥은 김활란 박사의 별명이 '화평둥이'였다고
고백한다. 형제사이에 다툴 줄 모르고 싸움이 벌어지면 '얘는…'하고 자리를 피할 뿐 맞서서 아웅다웅하는 성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8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영화소학교에 입학한다. 내리예배당 운영을 맡은 조원시 목사는 지난
1892년 내리교회 구내에 강재형 전도사 부처와 함께 아이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학생을 맡아 가르친 학급은 후에 '영화학교'가
되고, 그의 부인이 여학생을 맡아 지도한 것이 '영화여자학교'의 시초가 된다.
김 박사는 영친왕이 11살의 나이로 일본의 볼모가
돼 인천항을 떠났을 때의 슬픔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왕자를 배에 태우려 하자 왕자는 어마마마를 불러 통곡하며 안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더라고 했다. …몰래 뒤뜰로 가 축축한 굴뚝 뒤에 숨어 흐느껴 울었다. 잠자리에서도 남몰래 울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최초의
슬픔이었다…'. 그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글이다.
김활란 박사의 인천에서의 소녀시절은 곧 끝나지 않으면 안됐다. 큰외삼촌의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태산 같은 빚을 지게 되자 집과 남은 살림은 모두 빚쟁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서울의 한 빈촌에 집 한 채를 얻어 하숙을 치기
시작했고, 이 때 김 박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이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인천 내리교회에는 김활란 박사의 사진과 약력이 패널로
걸려 있다.
이화학당의 장학생들(1911).
대학과의
윤심성, 김메레(뒷줄 왼쪽부터)등 상급생들과 함께 이화학당의 장학생으로
선발된 12세의 김활란 선생님(오른쪽
끝)
김 박사가 기독교·교육계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소녀시절을 바로 인천에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시립인천대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개항 후 서구문물이 제일 먼저 들어온 인천에서 소녀시절을 보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기숙사에는 많은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집안 사정이나 고민을
털어놓고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제자 김자경씨는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운 신세에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래 자경아, 너는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수 있어'.
“선생님의 이 말씀이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내 음악 인생을 이끄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녀의 교육에 대한 의지는 여러 사례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6·25전쟁때, 피란 중에 세운 학교는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녀의 의지였다. 또한 많은 제자들이
졸업을 하고 너무 빨리 결혼해 가정에 묻혀버려는 것을 보고 계속 배우지 아니하고 사회에 봉사하지 아니하는 것을 개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의 간섭과 억압이 점점 심해지면서 이화를 지켜내기 위한 그녀의 노고는 조심스럽고 민감한 사항이다. '창씨개명',
'한국어 말살', '일본어 강제 사용' 등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당시 여성교육을 관철시키겠다는 그녀의 의지와 희생이 후에 친일 행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봉사하는 곳에 열정을 쏟느라 다른 여유가 없어 결혼을 안했다는 그녀는 독실한 신학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헬렌 킴이라는 이름으로는 외교활동을 했다.
YWCA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30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이라는 논문으로 우리 나라 첫 여성박사가 됐다.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6·25전쟁 시절에는 '코리아 타임즈' 영자신문을 창간했다.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공익부문상을 수상하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다락방상을
수상했다. 70살이 되던 1970년 유언에 따라 '개선행진곡'과 '할렐루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금란동산에 모셔졌다.
그녀의
여성 교육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했을 때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동상을 세우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두려움이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의 지나친 호의가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 괴로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해져서 양심을 찌릅니다'.
그녀의 삶이 과장되었는 지, 과소하게 평가되었는 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역사의 몫일 것이다.
김활란의 친일
지난해 11월, 정부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광복60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해찬 총리와 함께 장상 전 국무총리 서리가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됐으나 지난 1월 장상 전 국무총리 서리는 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이화여대 총재 시절 '김활란 상’을 제정하려 했던 일이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공정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여러 시민단체들의 힐책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조카 김정옥은 그녀가 병중에 있을 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 다닌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술회했다고 전했다.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의 저자 정운현은
“이것은 엄밀히 말해 반성도, 사죄도 아니다. 뒤늦은 자괴로 봐야 한다”며 “그녀가 지난 과오의 행적을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 책에서 '그녀가 60년 가까이 이화인으로 살면서 일제하에서부터 건국기까지 이대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이 너무 많다'고 적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실장은 더욱 강경하다.
김 연구실장은 “그녀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학교를 지키기 위해 친일적
행위를 했다지만 그것은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며 “친일행위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활란을 친일파 명단에 넣은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현했다.
'김활란이 없었으면 오늘의 이화여대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김활란, 모윤숙, 송금선,
황신덕… 그들은 민족을 반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겨레를 살리기 위해 일제하에 엄청난 고난을 감수했다'.
기록이 남아 있기에
그녀가 일제의 침략정책을 선전하고 징용을 부추기는 활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친일의 동기가 무엇이며 당시 현실상황에서
얼마나 절박할 수밖에 없었느냐를 감안해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자가 이화여대에 자료 협조를 요청했을 때 취재 의도와 기사의
내용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김활란 박사가 또다시 친일논란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학교측은 김 박사의 업적을 무시한 채 친일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김 박사의 주변 인물과 역사 학자들도 극도로 말을 아꼈다.
여성운동·교육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김활란 박사의 친일논란은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개정안'과 더불어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설치로 더욱 공론화 될
전망이다.
[인터뷰] 김형욱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박사
“김활란 박사의 친일 행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목(46) 박사는 16일 “김활란 박사는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자 여성운동가
위치에 있었다”며 “민족의 양심을 가졌더라면 차라리 현실에서 도피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개인 김활란이 아닌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활란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박사는 “김활란이 평범한 한 여성이었다면 그녀의 친일행위를 문제삼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일제 식민지였다는 한계성은 있지만 그녀의 친일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김활란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교육 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김 박사는 “김활란이 우리나라 여성의 고등교육을 이끌어 온
인물임은 분명하다”며 “그녀가 교육계와 여성계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활란을 통해 우리나라 교육계의
작태와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우리 교육계는 자기 대학 출신들만 챙기는 일명 동종교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교육운동과 육영사업이 지나치게 미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자신의 명성과 기득권을 얻기 위해
교육사업을 벌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며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던 사학재단의 비리가 이 같은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에서 교육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많다”며 “이런 인물을 찾아내고 알리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말했다.
목동훈·mok@kyeongin.com / 2005. 2. 17
* 사진출처: 독사진 http://bluecabin.com.ne.kr/split99/khr.htm,
다른 사진 http://home.ewha.ac.kr/~Ewhaalum/html3/ewha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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