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연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57&logId=203535
...그녀, 기억하시죠?
70~80년대 숱한 한국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청순미인의 대명사 올리비아 허시.
68년 프랭코 제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사람은
누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그녀 이상의 줄리엣은 없다고..
솔직히 로미오, 했을 때 곧바로 레너드 화이팅이 떠오르는 건 아닌데
(오히려 바즈 루어만 감독의 96년작 ‘로미오+줄리엣’에 출연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줄리엣, 하면 여지없이 (클레어 데인즈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올리비아 허시가
떠오릅니다.
저만 그런 걸까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앙케이트'라는 이름으로
친구들끼리 수십가지 질문을 적은 노트를 돌려가며 답변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죠.
한창 '로미오와 줄리엣'에 감명을 받았던 터라, (정확히 말하면 올리비아 허시의 외모에 감명을 받았던 터라)
'좋아하는 배우'라는 항목에 레너드 화이팅, 올리비아 허시를 빼놓지 않고 썼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당시에는 '레오나르도 화이팅, 올리비아 핫세'라고 썼습니다.)
허시의 이름 스펠링은 Olivia Hussey(본명은 Olivia Osuna)인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올리비아
‘핫세’라고 알려졌지요.
일본인들의 발음이 바다를 건너온 게 아닐까 합니다.
(신문협회 표기원칙은 ‘올리비아 허시’여서 그에 따라
표기하겠습니다.)
동그란 눈에 달걀형의 맑은 얼굴. 윤기가 흐르는 짙은 색의 긴 생머리..
당시 그녀의 선풍적인 인기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때 연예인 사진을 파는 어디에서나 그녀의 확대 사진을 볼 수 있었죠.
특히 평상복 차림으로 빛나는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정면을 바라보는 유명한 스틸 사진은
미장원과 호프집, 기타 무수한
대한남아들의 방 벽을(저희 삼촌의 방을 비롯해) 장식했습니다.
가로로 길쭉한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저도 ‘어쩌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하고 감탄하곤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제가 가장 좋아하던 그 사진은 요즘 찾기가 힘들더군요.
햇살을 받아 빛나던 그 긴 머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아쉽습니다.
대신 캡처가 가능한 DVD에 힘입어, 영화 사진은 각 장면별로 구하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다시 봐도 가슴설레는 명작입니다.
국내에서도 '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한 한가인이나 S.E.S 출신 탤런트 유진 등에 대해
'한국판 올리비아 허시' 운운하는 말이 나오곤 했는데
얼굴은 일견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시절 분위기까지 닮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올리비아 허시는 이미 많은 이들의 기억 깊은 곳에 첫사랑의 추억처럼 절대적으로 각인돼 있으니까요.
붉은 드레스와 대비를 이루던 까만 머리,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은 아무것도 모를 듯 한없이 순진무구한 그녀는 눈동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음마저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미녀는 많지만, 서양인 가운데 올리비아 허시 같은 독특한 동안(童顔)의 청순미인은 흔치 않은데
유럽과 남미의 핏줄이 섞인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가수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를 둔 허시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성은 오수나였지만 두 살일 때 부모가 이혼함에 따라
그녀는 어머니의 처녀시절 성인 ‘허시’의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일곱살에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온 뒤 어머니의 독려로 5년간 연기 학교를 다녔고
연극 무대에 섰다가
제퍼렐리 감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실제 극중 줄리엣도 어린 나이였지만) 500명의 지원자 가운데 전격
발탁됐고,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줄리엣의 탄생이었습니다.
불과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전세계에서 팬레터를 받는 스타가 되고
골든글로브상과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상에 해당하는 오나텔로 상을 수상하는 등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명예를 모두 어린 나이에 거머쥔 듯 보였지만
허시 개인으로서는 아름다운 시절의 종말이자 힘든 나날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딜 가든지 환호성을 지르며 달라붙는 사람들이 어린 허시에겐 감당하기 힘든 공포의 대상이었고
신경이 예민해진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근 1년간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활동을 재개한 이후에도 광장공포증(Agoraphobia)으로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여 고생했는데
약물(medication) 대신
명상(meditation)으로 오래도록 쫓아다니던 불안감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 대학원생이던 아는 언니로부터
70~80년대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왕창 얻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 돼서
버리려고 하는데 가지겠냐’고 해서 얼씨구나 받긴 했는데
사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그림만 들여다 봐야 했죠.
가끔 등장하는
영어를 통해 배우들의 이름을 접하면서
예쁜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찢어서 교과서나 참고서를 싸곤 했는데
‘수학의 정석’ 표지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신의 흑백 컷이었습니다.
당시 받은 스크린 가운데 한 권에는
20대 후반쯤 됐을 법한 올리비아 허시가 비키니 차림으로 찍은 사진도 실려
있었습니다.
서양인들이 워낙 빨리 나이가 들어보이기도 하지만
그 귀엽던 얼굴이 그 때 이미 웃을 때 뺨에 주름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조각같던 턱은 볼살이 빠지니까 너무 뾰족하게 느껴져서 거슬리고
(올리비아 허시는 아래 사진에 나타나듯이 웃을 때 턱이 길어보이는 스타일로,
좀 심하게 말하면 미 대선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과 약간 비슷합니다. -_-;)
당시 사진에선 몸매도 상당히 중년 여성처럼 펑퍼짐해 보이는 것이(물속에 있어서 더 그래보였겠지만)
줄리엣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 나이가
들어 보여서 어린 마음에 실망했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도 그녀를 한 떨기 꽃처럼 청순한 얼굴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녀는 상당히 굴곡 있는 풍만한 몸매의
소유자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잠깐 노출신이 등장하는데(당시 국내 TV로 보신 분들은 대부분 못 보셨겠지만)
당시 열다섯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매는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러웠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순결하고 성스러운 역할도 잘
어울리고
따뜻한 어머니로서의 모성애적인 역할도 의외로 어울립니다.
우리나라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그녀의 소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허시는 80년대 잠시 휴식기를 가진 이후 자주는 아니지만
꾸준히 영화와 TV 등에서 활동을 해왔습니다.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모두 구사하는 관계로
미국, 영국,
남미권,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인연이 깊은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적의 영화에 출연했지요.
그러나 대중들은 그녀가 줄리엣이 아닌 다른 인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녀는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과 배역 속에 잊혀져갔습니다.
그러다가 1977년 프랑코 제퍼렐리 감독의 시리즈물 ‘나자렛 예수’에서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아 그녀에게 새로운 모습이 있음을
증명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나일강의 죽음’ ‘미망의 여인’ 등에 출연했고
‘사이코’ 4편에 얼굴을 비치는 등 깜짝출연도
몇차례 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나사렛 예수' 이후엔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던 허시에게
평생 꿈꿔오던 역할인 테레사 수녀의 역할이 주어진 것은 그녀의 나이가 50을 넘어설 때였습니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가 성모 마리아 역에 이어 또한번 '성녀'로 돌아온 것이죠.
최근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비아 허시의 이름이 오르내리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바로 그녀가 출연한 '마더 테레사'가 내년 1월 국내에서 개봉하기 때문이더군요.
사실 그녀가 테레사 수녀 역으로 캐스팅됐다는 얘기는
이미 근 3년 쯤 전에 제가 조선일보 영화섹션 '씨네카페'에 썼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허시는 평소 테레사 수녀를 너무나 존경해왔기에 이 역할을 맡게 돼서 너무나 행복해 했습니다.
“매일 최소 한 시간은 기도한다”고
할 정도로 신앙도 독실한 그녀는
테레사 출연이 확정된 뒤 “25년 동안 갈구해 온 역할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더
테레사’ 제작소식을 들었을 때 무릎을 꿇고 그 역을 맡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흘 뒤 출연 제의와 함께 대본이 도착했죠. 전 제가
출연하게 된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 마리아에 이어 이번에 테레사 수녀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줄리엣 역 이후 언제나 기품있고 우아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데다
조용하고 고전적인 역할을 주로 맡아 더욱 성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녀도 사생활을 들여다 보면 결국 한명의 속세의 인간일 뿐입니다.
스타라는 이름으로 군중 속의 고독에 시달려 왔을테니 더욱
그렇겠지요.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LA로 이주해 할리우드에서 활동해 온 그녀는
1971년 스무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딘 마틴의 아들인
록가수 고(故) 딘 폴 마틴과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해 현재 배우로 활동중인 아들 알렉산더를 낳습니다.
그러나 마틴이 불법무기소지죄로 체포되면서 스무살의 환상은
끝나버렸죠.
결국 1978년 결혼 7년만에 둘은 이혼하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너무나 서로 사랑했죠.
40대가 되면 다시 합치자고 말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과거 한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
1980년에는 일본계 가수인 아키라 후세와 재혼해 1983년 아들 맥스를 낳지요.
그러나 이 결혼생활 역시 7년만에 끝이
납니다.
허시는 1991년 세번째 남편인 록스타 출신 데이빗 아이슬리와 결혼합니다.
"데이빗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50번 봤다고 했어요. 그 말에 전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내 마음의 일부분은 아직도 내가 줄리엣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허시와 아이슬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 인디아 조이는 현재 열살이 됐습니다.
그녀가 소녀가 아닌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나이들어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다소 묘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영원한 줄리엣'인 그녀는 왠지 영원히 나이들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였으니까요.
그러나 세월과 함께 그녀도 나이가 들어갑니다.
1951년생이니 지금은 만 53세가 됐겠네요.
끝없이 이어지는 촬영과 잦은 여행에 지친 허시는
간간이 연기활동을 멈추고 아이를 키우는 데 전력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LA의 한 목장에서 열살 난 딸과 애완동물들을 돌보는 재미로 산다고 하더군요.
딸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명상의 나라
인도에 상당히 심취해 있나 봅니다.
“딸 아이가 좀더 크면 또 같이 인도에 가고 싶다”며 “인도는 마법처럼 내 영혼을 채워준다”고
하더군요.
나이가 들어도 그녀가 항상 평화롭고 맑게 보이는 이유도
그런 명상과 기도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줄리엣과 마리아, 테레사로만 기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전 충분해요."
허시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좀더 일에 충실하고, 좀더 좋은 선택을 하겠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2001년 인터뷰 당시 자서전 집필에 전력하고 있다며
‘테레사’ 촬영이 끝날 때쯤까지는 그 작업을 끝내길 희망한다고
말했는데
예정대로 출간이 됐나 모르겠네요.
‘마더 데레사’는 내년 1월 21일 세계 최초로 국내 개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작년에 TV물로 방영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극장에서 개봉하는 게 우리나라가 처음이라는 뜻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여튼 세월의 깊이만큼 주름진 올리비아 허시의 얼굴이 어떤 아름다운 감동을 안겨줄지
그 옛날 '로미오와 줄리엣' 사진을 잡지에서 찢어내던 소녀처럼 설레는 심정입니다.
국내팬 중에는 영화사측에서 최근 공개한 ‘마더 테레사’의 사진만 보고
벌써부터 “늙었구나 늙었어 쯧쯧”하며 실망을 표하는
분들이 많던데
올리비아 허시, 하면 ‘줄리엣’ 당시 모습만을 기억하는 국내팬들이
이제 더이상 꽃다운 소녀가 아닌 장년의 그녀 모습을
보러 과연 얼마나 극장을 찾을지도 의문이지요.
흰 수녀복을 입고 타인의 밑바닥 삶까지 감싸안으며 나이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사랑을 잃고 목숨을 버린 붉은 드레스의 줄리엣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허시는 많은 이들에게 영원히 열다섯살 줄리엣으로 기억되겠지만
사실 이 스산한 겨울,
그립던 그녀가 테레사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준 것이 저는 이상하게 아주 고맙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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