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현대 서예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의 예술혼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검여의 서(書) 세계를 온전히 이어가고 있다는 원중식(64)씨를 찾았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한적한 시골마을에 새로 지은 2층 집이 눈에 띄었다. 2층 서실에서 마주한 원씨는 검여 작품 몇 점과 검여를 소개한 책자 등 이런저런 자료부터 꺼냈다.
“지금 우리 서단의 기초를 마련한 분이 바로 검여 선생이십니다. 선생님이 활동하실 당시엔 대부분의 서체가 당나라 이후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하지만 남북조 서체를 하셨어요. 지금은 모두가 그 남북조 서체를 하고 있습니다.”
검여가 우리나라 서예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얘기다. 이런 검여가 인천출신이다. 서구 시천동이 검여가 태어난 곳이다. 하지만 검여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검여의 작품도 고향 인천엔 많지 않다.
오른손으로 경지에 이를 즈음 중풍을 얻는 바람에 오른 쪽이 마비됐다. 다들 검여의 예술활동도 끝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검여는 다시 일어섰다. 왼손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서단에선 유일하게 좌수서(左手書)로 일가를 이뤘다. 검여의 삶은 이렇게 드라마틱했다. 검여 유희강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로 꼽히는 이경성(85)씨는 자신의 책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서 “검여 유희강의 예술은 겸허한 인간성 위에 자리잡고 있기에 옥같이 은은한 빛을 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검여는 각 체를 모두 잘 했으나 특히 행서에서 필치의 묘미를 드러냈다. 그 행서가 무르익을 무렵 불행하게도 그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오른손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수십년 간 오른손에 의탁하여 연마했던 서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만 것이다. 원점에로의 귀환,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며 그 예술가가 이미 일가를 이룬 경우 그 비극은 더욱더 커진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쯤에서 그의 역사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의 예술가 검여는 다시 돌아온 원점에서 왼손으로 새로운 서체를 개척해 낸다”라고 검여를 평가하고 있다.
이씨는 특히 검여를 한국예술의 전형을 세웠다면서 두 가지 예를 든다. 하나는 그 능력의 결정으로 이룬 서예의 예술적 완성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의지로 초극해 수준 높은 예술을 창조한 기적이란 것이다.
서구 검단 오류리에 있는 '검여 유희강 선생 묘비'엔 검여를 오히려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전통과 속기(俗氣)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근대에 와서 추사 김정희가 비로서 새 경지를 개척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검여가 그 뒤를 따랐다고 할 수 있다. … 쓰라린 변천이 계속되는 민족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와 방랑과 청빈 질병과 싸우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을 즐기면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갔으니 아아 검여는 불우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다행했다고 할까….”
검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제자 원씨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검여가 1960년대 초 한 달여 동안이나 간첩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62년 아니면 63년일 겁니다. 서울 안국동에 서실이 있을 때예요. 아침 10시면 꼭 나오시는데 그 날은 안나오시는 거예요.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이른 아침 댁(인천 남구 도화동)에 지프가 와 선생님을 모셔갔다는 겁니다. 월북한 명륜학교 동창생이 북에서 내려왔는데 선생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잡혔다는 거예요. 간첩을 재워주고,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고문을 받은 모양입니다. 선생님은 하지만 일체의 말씀이 없으셨어요. 때문에 그 얘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1911년 5월 22일 태어난 유희강은 우리나라 전통 서예의 마지막 세대로 불린다. 서예는 어릴적부터 한학에 기초해야 하는 가학(家學) 전통이 중요한데 검여는 유명한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현감을 지낸 유태형이 할아버지로, 유년기에 튼실한 한학과 서예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또 24세부터 27세까지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을 다녔다. 이후엔 경성기독교청년회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도 졸업했다. 여기서 배운 중국어를 바탕으로 1938년엔 아예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서화와 금석학 연구에도 매달린다. 항간엔 백범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중국 유학을 떠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이란 얘기다. '한구무한보'와 '남창민보' 등 중국 신문에서 기자생활도 한다. 검여는 또 35세이던 1945년부터 1년여 동안 광복군 주호지대장(駐●支隊長) 비서도 지냈다. 귀국하기 전 서예가로선 드물게 서양화도 공부한다. 서양화 실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동시에 출품해 둘 다 입선한 것이다.
1946년 고향에 돌아오자 마자 지역 예술·교육활동에 전념한다. 인천시 성인교육회 서곶지부 교육부장,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문총 인천지부 집행위원, 인천 해성중학교 미술교사,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시립도서관장, 인천 한미문화관장, 인천시문화위원, 인천교육대학 강사, 한국서예가협회 회장 등의 이력이 검여의 왕성한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1968년 중풍으로 쓰러진 검여는 수원에서 치료받으며 좌수서를 시작한다. 상형문자를 주로 해 좌수서의 경지를 한층 높인 그는 1973년엔 발병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른손으로 쓴 '柳得恭 洗心 第六句節' 작품을 제6회 검여서원전에 출품한다. 당시 동양TV는 이런 검여의 치열한 예술세계를 특집(인간만세)으로 다루기도 했다.
1976년 10월 16일 간송미술관 사군자전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온 검여는 이튿날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이 재발하고, 다음날 세상을 뜬다.
[인터뷰] 죽정서원 연 제자 원중식씨
검여 유희강 선생의 '먹갈이'를 하면서 그의 서풍을 잇고 있는 원중식(64)씨는 강원도 시골에서 후학양성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원씨가 집을 서당식 2층으로 지은 것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란다. “서예는 어릴 때 하되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을 이름을 따 '죽정서원'이라고 정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 미술반 시절 '인천시 중·고 미술전람회'에서 2등상을 받을 때 심사위원이던 검여를 처음 봤다는 원씨는 1960년 대학 1학년 때 검여에게서 직접 서예를 배웠다.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 몇 명과 같이 가 선생님에게 서예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계셨는데 박물관 한 편에 우리를 모아놓고 붓 잡는 법부터 가르치셨어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검여'를 배우게 된 원씨는 3년 만인 대학3학년 때 국선에 입선한다. “선생님은 시·서·화를 다 해야 하는 우리 전통 서예 맥락의 끝머리에 있는 분입니다. 특히 선생님은 작품을 팔지 않았어요. 돈을 받고 (작품을)줬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애관극장 근처에 있던 은성다방에서도 전시회를 하셨어요. 작품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전시장 임대료를 작품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방 주인도 선생님 작품을 여러 점 갖고 있을 겁니다.”
작품을 팔지 않다보니 검여는 표구비 마련도 어려웠다고 한다. “1962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제2회 전시회를 가졌는데 표구를 맡았던 박당표구사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을 보관했어요. 그런데 그만 박당표구사에 불이나 작품이 모두 없어졌어요. 이 때부터 선생님의 작품세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정말 아쉬워요.”
10년여 전에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강원도로 들어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원씨는 검여의 예술혼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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