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에서 시작하는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참 좋습니다.
근세에 개항기를 거치며 가장 격변을 겪었던 최초의 곳, 바로 인천이지요.
역사를 알아보려면 우선 그 곳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경인일보의 시도가 참으로 참신하다고 생각됩니다.
최초 근대화 새 세상 연
숨겨진 '씨줄·날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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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 길을 떠나려 합니다. '인천 사람' 말입니다. 인천에서 난 것 만으로 '인천사람'일까요. 인천에서 살며 인천을 위했으면 다 '인천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경인일보는 올 해로 창간 44년을 맞았습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경인일보는 이제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자세로 '인천사람'을 만나려 합니다. 인천의 역사를 새로 쓰려합니다.
가장 역동적인 인천시대를 열었지만 잊혀지거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인천의 인물'이 많습니다. 그들을 온전히 찾아 새 역사의 씨줄과 날줄로 삼으려 합니다. 격동의 한세기 동안 문화·예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인천의 인물 100인'을 선정해 매주 한 명씩
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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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천의 인물'인가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도시의 효시로
불립니다. 인천항은 남북교류, 특히 서해안을 하나로 잇는 중심항이었습니다. 물론 해외 교역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인천엔 다양한 사람이
살았고, 그 만큼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인천의 인물'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근대 인천의 형성은 그 이전인 '구
인천'과는 비연속성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불행했던 '식민지 항구'로 시작됐지만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개항과 함께
인천은 전혀 다른 도시로 태어난 것입니다. 외국인 거주지도 따로 있었고, 각종 문물이 드나드는 하나의 용광로였던 셈입니다. 그 치열함과 긴박함
속에서 살며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이 인천엔 유난히 많았습니다. 결국 '인천의 인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곤 했습니다.
중풍으로
오른 손을 쓸 수 없자 왼손으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해 '좌수서'란 특별한 서풍을 일으킨 검여 유희강으로 첫 페이지를 열려 합니다. 조봉암과
장면 등 우리나라 근현대 정치사의 거물도 있습니다. 늘 친일문제에 휩싸여 있는 이당 김은호 화백과 여성계의 대표주자격인 김활란 여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항해술사인 신순성, 한국미술사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여성야학의 뿌리를 심은 것으로 평가받는 박창례,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를
만든 엿장수 출신 인천갑부 정치국 등이 대표적 인천의 인물입니다.
최근들어 이런 인천의 인물을 볼 수 없다는 얘길 많이들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인천은 늘 서울의 변방이었고 인천 만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인물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항만 기능이
축소된 데서 그 이유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천이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항만'이란 상징성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천국제공항이 동북아 허브공항을 꿈꾸며 초일류공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송도, 영종, 청라 등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자유구역입니다. 송도신도시엔 거대한 항만시설을 새로 짓습니다. 인천은 이제 '제2의 개항'을 맞고 있다고들 합니다. 새로운 '인천의 인물'이
나와야 하는 당위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보려 합니다. '인천의 인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끈으로 잇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천의 인물'을 어떻게 만나나
한 인물을 얘기하다 보면 늘 긍정적
모습과 부정적 모습이 함께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각 분야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합니다. 소문으로만 있던 한
인물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도록 갖가지 '끈'을 모으려 합니다. 지금까지 정리된 자료를 토대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가족과
지인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독자와 전문가들이 할 것입니다. 인물의 선정과 그 인물과 관련한 '끈'을 찾는데 각계
전문가들도 함께 합니다. 최대한 많은 분량의 자료와 증언을 모으겠습니다.
아직까지 인천의 인물을 100명이나 선정해 다뤄 본 적이
없다고들 합니다. 옛 일을 정리하는 데 그만큼 무심했던 것입니다. 미래로 향한다는 뜻에서 배제는 최소화하고, 포용은 최대한 많이 하려
합니다.
인천은 일제 강점기엔 친일도 유난히 많았고, 동시에 독립을 향한 본거지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무렵엔 좌·우의 대립도
여기서 공존했습니다. 그래서 '인천의 인물' 중엔 친일문제와 좌·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
자체가 인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동한 쉬쉬하고, 숨어서 얘기해야 했던 것들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생산적인 '미래 읽기'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섭니다.
'인천의 인물'을 찾아 나서는 일은 인천을 '열린 도시'로 만들어가는 길 닦기라는 생각입니다. '인천의 인물'과
함께 동행하며 제대로 된 '인천 찾기'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의 의미 /최원식
인하대 문과대학장
“비전이 없었던 시대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제2의 개항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부흥의 기운을 맞고 있는 지금의 인천에선 꼭 옛 일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원식(55) 인하대 문과대학장은 “인천의
과거사 정리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근대역사 중 가장 역동적이었던 인천을 무대로 해 살았던 인물을
찾아내고, 발굴하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또 “인천에서 아직까지 근대 이후의 인물 중 100명이나 뽑아낸 적은 없는 것
같다”면서 이번 경인일보의 기획시리즈가 갖는 의미를 부여했다.
“개항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개항 이후 인천은 전혀 다른
개념의 새 도시를 창조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영욕과 함께 하며 산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바로 인천의 현대사를
거꾸로 재정립하는 기회가 된다고 봅니다.”
최 교수는 인천을 '근대 도시의 흥미로운 실험실'이자 '근대 도시사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식민지 항구'로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새 도시를 형성했고, 특히 가장 반식민지적이었고, 진보진영의
거점이 될 정도로 근대 인천은 역동적이었다는 얘기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연 인천엔 그 만큼 '인물'도 많았습니다. 문화·예술,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인천사람들이 전국의 중요 인물로 꼽혔습니다.”
최 교수는 그 당시 인천의 인물들이 꿈꿨던 각종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이게 우리나라 현대사의 불행이라고도 했다. “이승엽과 조봉암 등 좌 성향의 프로젝트(정치세계)와 장면의
자유민주주의적 프로그램 등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분단상황이 용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왜 실패했는 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의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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