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향기 - 장미의 화원"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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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안준철 (jjbird7@hanmail.net) 2003/6/2(월) | |
아내를 위해 국수를 삶았습니다
아내는 나이가 마흔 아홉이고, 저는 한 살이 더 많아 쉰입니다. 아내는 아직 사십대라는 것에서 위안을 받고, 저는 나이 쉰에 붙여진 지천명이라는 근사한 말에서 위안을 찾곤 합니다. 아내와 저는 갓 스물에 만났습니다. 젊고 철없던 그 시절의 정서가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탓인지, 집에서 둘이서만 함께 지내다보면 서로의 나이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런 재미로 서로 늘 붙어 다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퇴근 무렵,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오늘 기분이 이상해. 집에 빨리 들어와. 알았지?" "왜? 무슨 일이 있어? 나 오늘 학년 모임에 참석하고 가야하는데, 어쩌지?" "오래 걸려?" "아니, 밥만 먹고 빨리 갈게." "그럼 바로 와." 전에도 아내에게 그런 비슷한 전화를 몇 차례 받은 적이 있어서 아내의 기분을 대강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십대 후반의 여성에게 오기 쉽다는 일종의 심리적 공황 같은 것이겠지요. 아내는 전업주부이고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이어서 한 번 그런 마음의 상태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 듯했습니다. "여보, 나야." "예." 초인종을 길게 누르며 큰 소리로 부르자 아내가 안에서 반갑게 응답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내는 평소에는 저에게 말을 놓지만 기분이 좋으면 말을 높이는 버릇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아내의 대답소리에 내심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안으로 발을 들이고 보니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습니다. "여보, 오늘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내가 이 밥을 꼭 먹어야하나, 내가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싶고, 정말 내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런 말끝에 아내는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호들갑을 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한 일이 없다니? 철딱서니 없고 허랑방탕한 남편 이렇게 잘 건사한 건만 해도 어딘데. 거기에 살림 알뜰하게 잘 하고 아들 훌륭하게 잘 키우고 당신이 한 일이 어디 한 둘이야?" 그런 말들이 아내에게 위로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던져본 말이니 그야말로 아내의 타령조에 추임새 역할만 제대로 할뿐이었습니다. "당신은 학교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도 쓰고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데, 나는 당신이 벌어온 돈으로 밥이나 축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밥만 축내다니? 당신의 가사노동을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해도 얼만데 그래." 역시 그 말도 추임새로 곁들여졌을 뿐, 아내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짜증이 났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저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퇴근하는대로 방에 들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속 생각까지 아내는 귀신같이 알아냅니다. "당신 지금 내가 귀찮지? 빨리 컴퓨터 앞에 앉아 글쓰고 싶지?" 저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이런 말을 내뱉고 맙니다. "당신, 요즘 너무 편해서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야? 너무 호강에 겨워서." 아내가 침대로 몸을 던진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실수를 했구나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저는 아내 곁으로 다가가 이렇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사람이 다 그렇잖아. 고생을 하거나 뭔가 부족하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인생의 허무니 하는 생각을 못하다가 요즘처럼 당신 마음 편하고 우리 사이도 너무 좋고 그러니까 그런 허망한 생각이 드는 거 말이야. 그렇다는 것이지. 내 말은…" 그런데 아내의 응수의 방향이 조금 엉뚱했습니다. "당신 돈이나 많이 벌어오면 사고 싶은 것도 사고 그러면 좀 마음이 풀릴텐데 당신 박봉에 그럴 수도 없고. 내가 요즘 사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저는 그 말에 퍽 고무되어 아내의 어깨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사고 싶은 것을 사면되잖아. 뭘 사고 싶은데?" "옷도 사고 싶고 가방도 사고 싶고." "당장 일어나. 지금 사러 가자구." "그럴 돈이 어디 있어. 이번 달에 당신 잠바 사고, 사을이 연주회 한다고 양복도 해주고…" 이런 대화는 늘 끝이 뻔하지만 상대방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지긋이 눌러 참고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자칫 방심하다보면 속에서 불같은 것이 솟구치는 것을 놓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이 왔습니다. "당신 정말 이러지 마.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당신이 필요한 거 있으면 사면 될 거 아니야. 당신도 알다시피 내게 무슨 비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느닷없이 반격을 당한 아내는 말문이 막히는지 저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침대로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는 속울음을 우는지 아내의 어깨가 파도가 일 듯 잠시 흔들렸고, 잠시 후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누가 옷 같은 거 사고 싶데.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지만 그건 백 분의 일도 아니야. 그런 게 문제라면 돈도 있겠다 눈 딱 감고 사버리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이런 마음 당신이 알기나 해. 자기는 자기 일에 빠져 있으니까 모르지. 남편에게 위로 받으려고 투정을 부리는 건데 그런 아내 마음도 몰라주고 버럭 소리나 지르고. 당신이 무슨 시인이야?"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왜 또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을까? 좀더 참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상황이 다시 짜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경우 제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 짜증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합니다. 저는 언젠가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여보, 자식도 따지고 보면 남이야. 너무 기대하지마.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 아플 때 솔직히 난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도 있어. 당신 늘 두통에 시달려도 난 머리가 아파 본 적이 없어서 당신이 어떻게 아픈지 알지도 못해. 같이 아파 주고 싶어도 그게 안돼. 어디 몸 뿐이겠어? 그러니 나한테만 너무 의지하지 말고 이제 당신 삶도 좀 챙겨봐." 그런 충고에 대한 효과가 나타나긴 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어느 만큼 접은 것입니다. 부모로서 사랑의 의무는 다 하되 그 사랑을 되돌려 받을 생각은 하지 말자는 어떤 합의가 우리 부부 사이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남편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가 서로 각각일 수 없다는 것이 아내의 지론이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저도 아내처럼 문자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끔 아내가 장롱 깊숙이 숨겨놓은 통장을 꺼내와서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저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통장 비밀번호를 말해줄 때도 저는 건성으로만 듣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이 세상에 없는데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한 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저를 좀더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 말입니다. 아내가 지금보다도 훨씬 젊고 예뻤던 시절에도 아내는 저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내는 저의 욕망과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교환인 가능한 여자였습니다. 인륜이나 부부간의 의리를 무시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아내를 교환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존재로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마흔이 조금 넘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팽팽했던 아내의 이마가 마른 대추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나랑 살 거야?" "응. 그런데 좀 고쳐서 살고 싶어." "만약 고칠 수 없다면?" "그래도 당신하고 살아야지. 당신은?" "나도 당신하고 살고 싶어. 고치고 말 것도 없이." "하긴 그동안 당신이 다 고쳐놓았으니까." 이런데도 가끔은 아내의 존재가 불편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은 어쩔 수없이 이기적인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깨닫고도 아내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저를 꼬집고 발로 차기 시작하는 아내를 어쩌지 못하고 그냥 당하고만 있다가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래, 이대로 당하고 있자. 아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자.' 그것만이 제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약 10분 가량이 흐른 뒤, 아내가 저를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서 글 쓰고 싶으면 써." "아니, 오늘은 그냥 잘 거야." "아니야, 가서 써." "됐다니까. 급한 글도 아닌데 뭐." 그런 대화 끝에 저는 잠깐 사이 잠이 든 모양입니다. 꿈결엔 듯 생시엔 듯 한껏 밝아진 아내의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갑자기 배가 고프네. 감자를 삶아 먹을까? 국수를 삶아 먹을까?" 저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감자가 좋겠다, 그지?" "아니, 국수가 먹고 싶어. 당신이 삶아주면 더 좋고." 여기까지가 어제 밤 아내를 위해 처음으로 국수를 삶게된 자초지종입니다. ------------------------------------------------------------------------------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안준철 기자는 전남 순천 효산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이다.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등을 상재. 또 국민일보 가족연재소설 '사을이네 집' 연재한 뒤 단행본 '아들과 함께 인생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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