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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과 함께

엉겅퀴 국내 첫 재배 성공·건강식품화 -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

by 아름다운비행 2015. 2. 14.

* 출처 :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537436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 엉겅퀴 국내 첫 재배 성공·건강식품화로 100억 매출 꿈

차별화된 제품 개발위해 꾸준하게 준비 /

임실 체험관광농장 300만평 조성 계획 /

지역내 유가공산업 등과 연계 발전 기대

김재호 | jhkim@jjan.kr / 최종수정 : 2015.01.19 21:39:33

 

 

▲ 심재석 임실생약 대표가 가시엉겅퀴 건강식품을 선보이고 있다.

건강기능식품이 주목받으면서 약초류 재배 농가도 늘고 있다. 최근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수유, 홍화씨, 오가피, 헛개나무, 다시마, 청국장, 석류, 천마, 흑마늘, 민들레, 꾸지뽕, 울금, 돼지감자 등이다. 최근에는 산야에 자생하는 가시엉겅퀴가 간과 혈행 개선에 좋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30년 넘게 약초재배와 가공 사업을 하면서 최근 가시엉겅퀴 건강식품화에 성공한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이사를 지난 9일 만나 약초재배의 6차 산업화 가능성을 들어보았다. 심 대표는 지난 2005년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농업인’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각종 특허와 표창장, 위촉장이 수두룩하게 걸려 있었다.

-공장과 사무실을 둘러보니 심 대표께서 걸어온 길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약초 농사는 어떤 계기로 짓게 됐는가요.

“전주농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집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기계공장에서 실습생으로 3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는데, 제 인생을 걸만한 직장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약초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고 수박이며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을 지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실패했어요. 그러던 중 약초 농사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어요. ”

-기업체 취직을 않고 농사를 선택했다면, 부모님 농사 규모가 꽤 됐던 모양이군요.

“아니예요. 아주 가난한 편에 속했습니다. 전답은 논 600평, 뽕밭 300평이 전부였어요. 다행히 학교 졸업 후 1년 정도 됐을 때 어머니가 탄 쌀계 자금으로 마련한 황무지 6000평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농사는 잘 됐는가요.

“누구나 성공을 하려고 시작하죠. 당시 저의 경우는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요. 농업의 성공요인이 토지, 자본, 기술인데 당시 저에게는 황무지밖에 없었어요. 수박 참외 생강 담배 등 다양한 농작물을 심었는데 다 망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심재석이가 하는 일은 다 망한다’는 말이 들렸어요.”

-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

“그 때 떠오른 생각이 농산물은 생물 그대로 판매하면 부가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은 것을 찾았어요. 그 때 약초가 제게 왔어요. ”

-주변에 약초 농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가요.

“당시 저는 4-H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날 장수에 사는 4-H 선배가 율무 농사를 권했어요. 율무는 토질이 좋은 땅에서는 웃자라는 문제가 있는데, 우리 땅이 황무지잖아요. 이제 막 개간한 땅에 율무농사가 제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당장에 시작했어요. 그 때가 1981년이예요. 율무 종자를 가져다가 개간한 밭 6000평 중에서 절반인 3000평에 심었는데 농사가 잘됐어요. 그렇게 약초농사에 입문했습니다.”

-작물마다 알맞은 토질이 있군요. 약초농사를 계속 확대했습니까.

“그래요. 율무를 생산하니까 약초상들이 생지황을 권했어요. 생지황을 생산하면 구매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듬해에는 율무와 생지황을 함께 재배했죠. 생지황은 율무와 달리 굉장히 까다로운 작목이었어요. 거름도 많이 줘야 하거든요. 이 때부터 약초 관련 서적도 뒤져가며 공부하며 지식을 습득했어요. 그러다보니 약초 전문가 대접을 받았어요. 당시 오수에는 약초농사 유경험자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약초, 약초 재배법에 대해 문의하는 상황이었고, 내친김에 오수면 소재지에 5평짜리 ‘오수생약사업소’라는 사무실를 냈습니다. 1982년 일이었습니다. 약초농사 초보 시절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있었구요.”

-율무와 생지황은 어떻게 해서 팔았습니까.

“생지황 농사를 지어 생것으로 팔면 이익이 별로 안나는데, 껍질을 벗긴 뒤 말려서 팔면 이익이 훨씬 많았어요. 그래서 오수생약사업소 한켠에 2평 짜리 건조실을 만들고 건지황을 생산했습니다. 저로서는 가공 판매의 시초였습니다. 가공사업이 좋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었죠.”

-그러면 율무와 생지황 생산 판매에 전념했는가요.

“아닙니다. 당시 임실 북부지역에서 독활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저도 독활 재배에 나섰습니다. 제 농사를 지으면서 주변 농가에서 재배한 약초를 수매, 전주에 있는 건재한약방 등에 납품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농가에서 약초를 수매 하고, 약재상에 공급하고, 수금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창피했어요.”

-아니, 뭐가 창피했습니까.

“전주지역 건재한약방에 100만 원어치 약재를 납품하면 수금하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어요. 건재한약방에 돈 받으러 가면 주인이 손님들 진료 본다며 1시간 넘게 기다리게 해놓고 찔끔 5만원, 10만원 주는 거예요. 동냥 주듯이. 너무 창피했죠. 야, 이거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광주로 뛰었어요. 광주는 200만 원 수금하는데 3개월 걸렸어요. 조금 지나니까 경쟁이 치열해지고 제값을 못받는 상황도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대구로 진출했어요. 블루오션을 찾아 도망가는 전략이예요. 당시 독활, 생지황, 건지황, 방풍, 우술 등 다양한 약재들을 취급했습니다. 마침 1988년 88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저는 5일에 한 번씩 대구를 갔습니다. 제가 대구에 공급한 약재는 부산, 서울, 영천 등지로 공급됐어요. 88고속도로 최고 수혜자는 저였습니다. 대구는 500만원을 2개월에 수금할 만큼 수금 여건도 좋았습니다.”

-약초 경기가 아주 좋던 때였군요.

“그렇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모든 경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한약재 가격이 최고였거든요. 모든 한약재는 생산해서 내놓으면 잘 팔렸어요. 국민들이 한의원을 많이 찾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심 대표가 독활을 생산해 대구까지 진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을 두고 ‘우연의 일치였다’라고 말하는 데는 뼈아픈 뒷얘기가 있었다.

그는 1984년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느날 오수 농약사에 들렀더니, 주인이 수박농사를 권했다. 약초농사를 잘 짓고 있던 때였고, 몇 년 전에 수박농사를 실패한 경험이 떠올라 싫다고 했다. 그런데 농약사 주인이 제시하는 조건이 귀를 홀렸다. 농약사측에서 외상으로 자재를 지원하고, 수박 기술자를 지원하는 대신 심 대표는 수박농사 지을 땅과 인건비를 대면 됐다. 수익금은 나눠 가지면 된다. 심 대표는 자기 밭 6000평과 빌린 밭 3000평을 합해 모두 9000평에 수박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가뭄이 드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1억에 달하는 엄청난 손해를 봤다. 재산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손해였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엄청난 손해를 봤는데 어떻게 재기했습니까.

“세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심재석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아무도 빚을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수박농사로 망한 이듬해 제가 농어민후계자 자금 500만 원을 타게 된 것이죠.”

올곧게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융자금이었다. 농협은 빚이 많은 심대표에게 보증인 세 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절망했지만 친구 아버지 세 분이 보증을 서 주었다. 심 대표는 그 중 한 분의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 너를 보고 도장 찍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늬 눈을 보고 찍어 주겠다.’

-그 때 독활을 심었습니까.

“그래요. 1986년에 독활을 심었습니다. 독활은 심은지 2∼3년만에 수확하는데, 절묘하게도 제가 독활을 수확하던 무렵부터 가격이 크게 올랐어요. 이 때 빚을 상당히 갚고 숨통을 틀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심 대표가 당시에 공급한 독활은 어느 정도 규모였는가요.

“당시 전국 독활 생산량의 70%를 임실에서 생산했는데, 임실 생산량의 35%-40%를 제가 건조 가공 생산했습니다. 전국 생산량의 25% 정도를 제가 생산한 것이죠. 그러면서 제가 독활 전문가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수확한 독활을 잘 다듬은 다음에 껍질을 벗겨 건조해서 절단, 건재한약방에 출하했는데요, 서울과 경상도에서 1등급 대우를 받았습니다. 전국에서 제 얼굴은 몰라도 심재석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약초 사업을 잘 해 나갔는데 왜 건강기능식품쪽으로 전환했는가요.

“1990년 무렵까지 약초는 돈 버는 농사였어요. 그러다보니 약초 공급 과잉이 초래됐어요. 독활 한가지만 가지고는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작약을 선택했습니다. 1992년 임실군에 작약전문재배단지를 유치했고, 임실 농민들이 작약을 많이 심었죠. 저도 임대 농장에 3만평을 심었어요. 그 때 제 약초농사는 독활 등 6만평에 달했어요. 하지만 실패했어요. 1996년에 작약을 생산할 무렵인데 수입 개방을 틈타 중국 한약재가 많이 들어왔고, 가격이 요동쳤거든요. 약초 농사에 위기가 닥친 것이죠. 그래서 바꿨습니다. 2000년에 한약생산시설을 모두 없애버리고 건강식품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건강식품으로 전환한 뒤 농장과 공장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소비자들에게 건강식품으로 친숙한 쑥에 주목했습니다. 농장에 쑥을 심고, 인진쑥 엑기스를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또 다슬기 엑기스를 생산했어요. 사람들이 간 건강에 좋다며 다슬기 먹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죠. 저는 평소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죠. 옆과 뒤, 그리고 속에 뭐가 있지? 그것을 알려면 연구를 해야 해요. 그래서 원광대에 다슬기 성분 의뢰를 했어요. 술 마신 사람들이 간과 위에 좋다며 다슬기를 즐겨 먹는데 왜 그런지 규명해 달라고 했지요. 다슬기에 아스파라긴산이라는 핵산이 많은데, 간이 섬유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결과를 받았죠. 특허 출원하고 논문발표하고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우리회사 장수 제품이 2가지 있는데, 인진쑥엑기스와 다슬기엑기스입니다.”

-쑥과 다슬기, 산수유, 돼지감자 등 수많은 건강식품을 생산해 왔는데, 요즘은 가시엉겅퀴를 개발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가시엉겅퀴 상품은 어떤 계기로 개발하게됐습니까.

“저는 그동안 약초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농촌진흥청 특작부 명예연구관으로 활동하고, 아젠다 연구과제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하고 했어요. 농업인 중에서는 꼭대기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약초, 건강기능식품 전문가인 제가 정작 ‘심재석’이라는 이름을 걸고 개발한 히트상품이 없더라구요. 남들이 무주 천마 개발해 히트치니까 따라서 천마제품 만들었고, 의성에서 흑마늘 만든 것을 보고 흑마늘 만들어 팔았어요. 그렇게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이 창피했어요. 내가 죽기 전에 이름을 걸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꾸준히 준비해 왔습니다.

-엉겅퀴 효능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엉겅퀴가 몸에 좋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주목하지 못했죠.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매년 가을이면 엉겅퀴를 캐서 감주 등을 만들었어요. 겨우내 아버지가 드실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그러면 지게질 많이 하시는 아버지가 이듬해에는 허리어깨 아프다는 말씀을 덜 하셨어요. 그 때 어머니 말씀이 ‘엉겅퀴 한 가마니면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운다’고 하셨는데, 옛날부터 엉겅퀴는 관절염이나 허리 아픈데 효험이 있다고 전해왔다고 해요. 그 생각이 떠올라 엉겅퀴 사업화를 계획한 것이죠. ”

-엉겅퀴는 인공재배가 매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2007년부터 엉겅퀴를 연구했습니다. 산야에서 채종, 발아실험도 많이 했어요. 농사 경험이 많은데도 잘 안됐어요.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엉겅퀴 재배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재배방법이 없었거든요. 시행착오가 무지하게 많았지만, 지금은 멸종위기 엉겅퀴를 국내 최초로 재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

-연구 과정, 효능은.

“엉겅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재배기술과 엉겅퀴 효능을 규명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해 왔는데, 저의 엉겅퀴 연구가 농촌진흥청과 지식경제부의 국가연구과제에 선정됐기 때문에 그 지원금으로 모든 것을 원활히 할 수 있었지요. 야생 종자 발아율이 5%도 안되기 때문에 직파, 멀칭, 포트육묘이식 등 다양한 재배를 하며 연구했습니다. 그동안 전북대 식품영양학과, 의학전문대학원, 수의과대학, 전주대 대체의학과 등과 함께 효능 연구, 제품 개발 등을 진행했습니다. 엉겅퀴가 혈전을 없애고, 간 기능을 개선하며 관절염과 요통에 탁월하다는 등 7개 논문이 학회지에 발표됐습니다. 엉겅퀴 엑시스와 차, 파스, 크림 등 제품이 5개 정도 됩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엉겅퀴로 1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싶습니다. 또 꽃이 예쁜 엉겅퀴 농장을 대단위 체험 관광농원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엉겅퀴 농장은 꽃이 피는 5∼6월에 너무 아름답습니다. 체험 관광농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임실은 산림이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실에 300만 평 정도의 엉겅퀴 농장을 조성하면, 임실 목장과 치즈 등 유가공산업 등과 연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갖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심재석 대표는 약초농사 야심찬 도전, 가공판매 사업수완 뛰어나

심재석 대표는 전주농고를 졸업한 뒤 농촌 고향마을에서 4-H활동을 하며 약초 농사로 성공을 거뒀다. 일찌감치 농작물 생산에 그치지 않고 가공판매에 눈을 떴다.

1980년대 독활을 재배해 큰 성공을 거뒀고, 1990년대 중국산 수입 약초가 범람하자 건강기능식품으로 사업을 전환하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

요즘 심 대표는 엉겅퀴에 빠져 있다. 고교 졸업 후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6000평의 농장 등 1만 5000평에 엉겅퀴를 재배하고, 이웃 주민 계약 재배 면적도 1만 5000평에 달한다. 간과 혈관 건강에 좋다고 규명된 엉겅퀴가 현대인들의 100세 시대를 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심 대표는 농촌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지난 30년을 달려왔다.

그는 사업은 퍼즐 맞추기라고 했다. 퍼즐이 제대로 맞춰지면 성공이지만, 조금만 어긋나도 실패하듯 사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가 율무와 생지황, 독활을 재배할 때는 퍼즐이 잘 맞았지만, 작약을 재배했을 때는 퍼즐이 어긋났다.

이번 엉겅퀴 재배 및 제품화는 심 대표의 야심찬 퍼즐 맞추기 도전이다. 재배방법을 체계화하고, 성분과 효능을 규명해 제품까지 내놓았으니, 이번 퍼즐 맞추기도 일단 성공적이다.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꽃이 아름다운 엉겅퀴 농원에서 임실 최고의 엉겅퀴 축제를 열어 해마다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작년에 오수면과 지사면 일대 산 10만여평에 엉겅퀴를 뿌려봤는데 실패했다. 그만큼 예민한 것이 엉겅퀴 재배다. 햇빛 잘 들고, 땅심도 좋은 적지를 선정해 다시 도전할 것이다.


* 댓글

시골향기이송현
안녕하세요 전남신안군자은면에 귀농한지 2년차입니다 밭 1,000평을 샀는데 돼지감자를 심으러 가서 자세히보니 전부다 엉겅퀴였어요..담주에 시작하는 농대특작과에서 배울 작목이 엉겅퀴라 이거 대박이다 생각했어요 2월7일..현재 새싹이겠죠 밭 가득있는 엉겅퀴를 키워보려해요..현재 건강원을 오픈한지 1개월인데 액상차개발을 하고 싶어요..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지금 나온것이 새싹일까요
(2015-02-07 2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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