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16>대마도 재발견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 일제시대 한국인 2만여명 살아
섬 전체의 9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돼 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명에 지나지 않는다.
1999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만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고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 비기도 한다.
● 한복입고 참가하는 ‘아리랑 마쯔리’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
대마도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리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 조선왕실의 관직임명장인 ‘고신’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끌었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그래서 그런지 취재팀에 특별히 전시장 내부 촬영을 허락한 자료관 직원은 왠지 고신에 대해서만 “박물관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며 촬영에 난색을 표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취재팀이 고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그 직원은 거북한 표정으로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 들었다. “왜구에 꼭 일본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과 중국 출신도 많았다. 고신은 한국 출신 왜구로서 조선왕조의 스파이 역할을 하다가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라고.
● 대마도의 원주인은 백제계 유민?
리아스식 해안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아사우(淺海)만은 요즘 한일 양국의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낚시터이지만 오랜 기간 왜구의 소굴이었던 천혜의 요새다. 조선 태종 때 이종무 장군도 아사우만 일대에 한 달간 머물며 왜구를 소탕했다.
이 일대에는 667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다. 백제와의 인연은 13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인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 다시 거세게 이는 대마도의 한국 붐
대마도에 다시 한국 바람이 거세다. 3월 시로 승격한 대마도엔 산을 깎고 온천과 골프장 등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의지가 섬 곳곳에서 느껴진다.
대마도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長崎)현은 정부에 ‘대마도 특구’ 법안을 제출했다. 이 안에는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 면제, 섬내 토지이용 및 취득 규제 완화, 한국어 교육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한국인 단체관광객과 학생은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또한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 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돼 있다.
● 주민증만 내보이면 땅도 살 수 있어
취재 도중 미쓰(美津)지역에서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흥미로운 벽보를 발견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벽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한국 사람인데 대마도의 농가주택을 구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인 부동산업자는 “한국의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살 수 있고 등기도 가능하며 가격은 평당 20만∼30만원대”라고 대답했다.
대마도 시청의 우치다 히로시(內田洋) 총무기획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50km 떨어진 부산엔 400만∼500만명이 살고 있는데 150km 떨어진 후쿠오카의 인구는 200만명에 불과하다. 눈앞에 좋은 시장이 있는데 왜 한국과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 교류 활성화로 대마도와 연을 잇자
일본이 실효적으로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그보다는 교류 활성화로 대마도를 한국의 경제권과 문화권에 편입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6년째 여행 가이드를 해 온 홍관영씨의 생각도 같다. 그는 “대마도가 일본 땅이 된 이유는 척박한 땅이라고 해서 한국이 방치해왔기 때문”이라며 “영토 분쟁보다는 경제와 문화 교류를 통해 한국과 대마도의 연을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대마도의 한국관련 유적 및 행사 | |
조선통신사 행렬도 |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길이 16.58m짜리 두루마리 그림. 이즈하라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보관. |
아리랑 마쯔리 | 매년 8월 첫째 토-일요일에 개최되는 대마도 최대의 축제. 조선통신사의 행렬 재현. 노젓기 대회,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 |
바이린지(梅林寺) |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파됐던 연고지에 건립됐다고 전해지는 고찰. 1436년 조선에 예속된 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선박에 대해 문인(도항증명서)을 발급해주는 사무를 보던 곳. |
가나다(金田)성터 | 일본 최고(最古)의 성터. 높이 2∼5m의 성벽이 5.4km에 걸쳐 남아 있는 백제식 산성. 667년 백제유민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짐. |
신라사신 순국비 | 왜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신라의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잡혀 처형당했던 신라 사신 박제상을 기리는 순국비. 1988년 한국과 대마도의 학자와 유지가 힘을 모아 건립. |
코즈나(小綱)의 고려불 | 칸온지(觀音寺)에 본존불로 안치돼 있다. 불상 속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1330년 주조돼 고려 부석사에 봉납한다고 쓰여 있으나, 어떤 경로로 대마도에 유입됐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대마도=특별취재팀
* 출처 : 동아일보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407220321
기사입력 2004-07-22 18:32
* 이 기획보도 씨리즈는 2005년 제22회 관훈 언론상을 수상한 저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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