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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친일사학계 비판

by 아름다운비행 2008. 1. 26.

친일사학계 비판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아야 하며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 순간의 쉼도 없이 지금도 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부분을 채워 가고 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흘러간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한 E.H 카아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있게 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것에 투영되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족의 역사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광, 시련과 애환이 깃들이어 있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 정신을 간직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 존망을 결정하는 중지 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의 자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민족의 올바른 역사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사대주의와 외래사상은 일 만년 역사 속에 찬연했던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왜곡하면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 민족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 날조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서구의 퇴폐적 물질문명과 외래 사상의 폐해는 민족 역사와 정신의 근저까지 흔들어 놓았다. 이제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상처투성이의 억눌려 왔던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로 정립하고 계승, 발전하고 오늘에 재조명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달해야만 하는 과제가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1.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과 민족 역사의 왜곡

 

'먼저 조선 사람들의 자신의 일.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일제는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악랄한 정책을 이행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와 역사의 말살을 꼽을 수 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 신앙들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특히 동제를 중점적으로 탄압했는데 촌산지순의 연구에 의하면 동제는 일본의 신도와 공통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현실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민중 심성을 개발하는 가장 으뜸가는 향토 오락이며, 성씨별 분열을 막고 이를 통합하는 기능을 지니고, 마을 사람들의 심신을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일제의 반일본화 작업에 있어 방해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다각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경찰국에서는 중추원 시정 연구회의 연구를 자문 받아 무녀 취체 법규를 제정하고 무당들을 경신 단체에 가입시키는 한편, 강력한 취체 행정으로 이를 금압하고, 학무국에서는 신사.신도 정책을 펴 나가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사회과에서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함) 으로 간주하는 사회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사서 20 여만 권 소각과 더불어 시작된 조선사의 편찬은 당시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소위 '공명.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혀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즉 '공명.정확'한 사서의 편찬을 위해 사료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1차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37년까지 이루어 졌고 압수 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 고사서, 조선 지리, 애국 충정을 고취하는 위인 전기.열전류 및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조선 세종때부터 단군관계 사서를 수집하여 장서각 및 규장각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들 사서 가운데는 귀중한 단군 관계 고사서가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사 편찬시 상당수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는 이병도, 신석호, 최남선, 권중현, 박용구, 이완용, 박영효 등이 있다. 다음에 다시 서술하겠으나 우리는 이병도 씨가 이 작업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조선사의 성격과 구성 내용 등을 살펴보자. 일제의 식민 사관을 성립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만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 적이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선사는 위의 요건을 충실히 따랐고 또 단군 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악질적인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 (금서룡) 같은 자를 중추 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때 결의한 시대구분인 상고 삼한. 삼국. 통일 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 시대. 신라 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 때는 신라 통일 이전. 신라 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몇 가지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 (반도 북부--중국의 식민지, 반도 남부--임나 일본부) 조선 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다 (당쟁.반란의 의미 확대) 조선의 조정은 동학란 때문에 청나라를 불러 들여왔으나 일본이 처음 무찌르자 합방해 주기를 원하므로 합병하여 조선인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잘 살게 되었다라는 등이 있다.

2. 오늘날 우리의 사학계

 

위와 같이 일본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 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고 당시 조선사 편찬에 참가한 이병도씨 (금서룡의 제자) 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 사학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보자.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 1세대인 이병도 씨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신석호씨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라고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 (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씨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유원동, 변태섭씨 등이 있다. 제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씨가 있다. 우선 이들이 저서나 강연회 등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민족사학에 조금이라도 눈이 뜬 사람이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아 오를 것이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 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씨는 몇 해전 타계하였고 죽기 전 친구의 설득으로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교수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 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8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의 "국사 교과서 개편 방향을 보고" 라는 제하의 그의 글을 보자 "....... 물론 필자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면 불만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데 고조선을 문화권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경우에, 초기에는 요령 지역이 그 중심지였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운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필자가 우둔한 탓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

 

이씨는 그의 종래의 주장대로 고조선의 영역이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진관수 : 그런데 여기서 여러 선생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규원사화} 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이기백 : 한영우씨가 한국학보에 쓴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도가사학이라고 했어

             요. 그런것이 걸리는데, {규원사화}의 선구적인 것은 고려말에 있었나 봐요.

진관수 : {규원사화} 와 같은 계열이라고 하는 '단기고사'... 발해의 대야발이 만들었다는 것이 있

            다는데, 본다 본다 하면서 아직 못 보았읍니다만...

이우성 : {단기고사}는 이조 말에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규원사화} 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만.

이기백 : 이런 것들이 혹은 단재가 애기한 묘청이라든지 풍수도참과 연결된 그런 계통이 아닐까

             요?

이우성 : 여기 도가는 도교적인 도가가 아니라 화랑 국선하는 선, 단군도 선인지후라 했지만 그 선

             에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도가라고 말하기보다는 선가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성싶어요. 그 선가는 약간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노장사상의 그런 도가

             는 아니니까요.

이기백 : 그렇다면 잘 이해가 되는데, 여하튼 지금 사료적인 가치는 인정할 수 없는 책들이 아니겠

            읍니까?

이우성 : 단군 임금의 역대 임금이 다 나오니 그것을.....

진관수 : 환웅 밑에 고시가 한반도를 다스리고, 신지가 만주를 다스리고, 치우가 하북 산동을 다스

             리고 했다는 건데요.

이우성 : 요 임금 시대에도 직계가 다 나오고, 그리고 기자의 호동왕도 다 나오지 않습니까? 여하

            튼 단군의 이름까지 다 나오니 재미있어요
<삼성문고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자들은 어디서 온 작자들인가? 진정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할 만한 자들인가? 또 한사람 김원용씨가 있다. 이 자는 일본이 날조해 낸 황국 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 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또 이 자는 을지문덕이 중국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이다.

 

마지막으로 혜성의 사나이 이기동씨가 있다. 87년 5월 29일, 30일에 있었던 역사학 대회에서 고대사 되찾기 운동을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70 년대와 유신 체제의 분위기의 연장" 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는 또 "실증 사학이 마치 식민 사관의 장본인 인양 단정되고 일부 민족 민중 사관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선 고대사 연구는 존립 기반이 질식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상 여러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성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들이 주름잡고 있는 사학계의 현실 속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까지 이런 작업에 끼여들었다. 이들은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국사 교과서에서 아예 빼 버리자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한국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갈래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 이것이 안되니까 한국의 국조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이 단군 국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연세대 교수 김동길씨 (지금은 사퇴하고 정치일에 뛰어들었음) 의 단군성조에 관한 견해를 보자.

"곰과 인간의 염색체수가 다른데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또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들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원전 60년에서 20년 사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 2천년쯤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이 사람의 머리에는 일제가 그렇게 바라던 식민 사관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으로 일제가 저질러 온 민족문화와 민족 역사의 말살을 살펴보았고 민족 역사인 경우 해방후 우리 사학계의 실태까지 살펴보았다. 글의 초두에서 밝혔듯이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반일본화 시책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은 민족 역사의 철저한 왜곡이라고 보고 교과서적인 조선사 편찬을 위해 (다른 어떤 교재보다 교과서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의 우리 민족 사서를 소각 내지 압수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의 수십 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압수를 위한 발악이라 표현하고 싶다) 민족의 몇몇 선각자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위 글중 식민 사학자들의 대화에서 비쳤던 규원사화, 단군세기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 간 민족사서의 고갈 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보 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 '황당하다' 는 이유로 천시되고 따돌림받는 이유는 어인 일인가?

최근에 들어 고고학의 발달과 고적의 출토 등으로 이들 사서들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뚜렷해질 것이라 믿고 환단고기를 처음 본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의 지보' 라 하였고 중국 사람은 '서역까지 밝혀 주는 주옥의 지보' 라 예찬했던 점을 상기시켜 본다.

 

 

* 원출처 : 한얼 한국 고대사 미스테리(http://cafe.daum.net/hankook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