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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물 45] 기념비 조각과 월북작가 조규봉

by 아름다운비행 2006. 10. 14.

월북 1세대 조각가들의 노력

 

기념비 조각과 월북작가 조규봉

 

* "기분 좋은 문화중독 - 컬쳐뉴스"에서 전재.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3&title_down_code=007&area_code_num=113&article_num=4731

 

 

 

 

지난 몇 시간 기념비 조각을 감상해보았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기념비 조각이 설립되는 위치선정의 문제와 이를 창조해낸 조각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기념비 조각은 어떤 곳에 설립되는가?

이러한 기념비 미술의 웅장성은 단순히 작품의 크기와 규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조형적 구성, 주위 환경과의 관계 등과도 많이 연관된다. 기념비 조각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대중 교양의 위력한 수단이라는 가능성에 걸맞게, 광범한 대중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기 위하여 흔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야외에 건립되기 때문이다.

엄청난 규모, 만큼 많은 수의 예술가와 물질적 비용이 투입된 이 조각의 존재의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조각을 감상함으로써 정서적 공감을 통한 선전 선동에 있다. 따라서 기념비 미술 창작에서는 언제나 주위 환경과의 조화 문제, 유기적 결합 문제가 제기되며 작품이 다른 물체들에 의하여 가리워지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충분한 조건을 마련하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물체들과 대조되어 돋보일 수 있는 장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하고자 하여, 현재 북한에 건립되어 있는 기념비 조각들은 대부분 산마루나 언덕 위나, 방대한 광장에 조성되어 있다. 또한 기념비 미술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사적지에 기념비 조각을 세움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기념비 조각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념비 조각과 주위 환경의 형태적 조화를 탐구하는 데서 보다 중요한 점은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기념비 조각을 조형적으로 부각시키 위해 주위 환경을 복종시키는 한계 내에서이다. 환경은 언제나 기념비 조각의 배경으로서만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기념비 미술과 그 배경으로서의 자연 환경은 총체적으로 한폭의 그림이 되어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삼지연대기념비>, <주체사상탑>, <천리마 동상> 등 기념비적 미술은 모두 절승풍경 속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집단 조각의 제작은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예상했겠지만, 우수한 조각가들이 집단적으로 제작해낸 작품들이다.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한 것이 북한 사회이다. 개인보다 조직이,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시 되는 사회. 우리의 시선으로 북한사회를 들여다볼 때 굴절이 생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작품은 널리 알리나 그 것을 창작해낸 작가에 대해 외부에 소개하는 것에는 인색한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특히 1990년대 이후 북한의 태도는 많이 변화된 듯 하다. 우수한 예술가들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조각계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북한 조각계를 대표하는 조각가로 누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 여러 작가들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조각가 조규봉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분단 이전 근대기 미술계에서 조각가의 숫자는 회화 장르에 비해 상당히 빈약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전통시대 서화만을 예술로 인정하고 조각가들을 장인, 쟁이로 여겼던 산물일 수도 있고, 당대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이 그러하였으니 평양화단도 그리 녹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북한 조각계는 앞 시간에 살펴본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구상조각을 다루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누가 이들을 교육해 내었을까? 생각해볼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이름이 조규봉이다.

기념비 조각과 조각가, 조규봉

1917년 인천에서 출생한 조규봉은 19살 되던 해인 1936년 미술가가 되겠다는 푸른 꿈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그 유명한 동경미술학교의 조각과에 입학하였다.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여 미술계에 등단한 이래로 계속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문전에도 출품하여 입선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44년 부모가 있던 중국 동북 장춘시로 와서 창작생활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최초의 조각가 단체인 ‘조선조각협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1946년 8월 인천시립예술관 개관기념미술전에 출품한 뒤 바로 월북하게 된다. 북한측 기록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강원도 해방탑 건설 준비 위원회가 해방탑 건설과 관련하여 조규봉을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북조선미술가동뱅 조각분과위원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1946년 말 모란봉에 세우는 해방탑 제작에 참여하는 등 그는 북으로 오자마자 창작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9년 9월 평양미술대학이 창립되면서 조각학부 교수로 참여하여 이후 40여년 간 평양미술대학에서 가르치면 실질적으로 북한의 조각계를 이끄는 조각가들을 생산해 왔다.

1959년 제작된 <남녘땅의 어머니>(높이 93㎝)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으로 당선되기도 한 작품이다. 허기진 아이를 가슴에 안은 피끓는 모성의 절절함이 강인하게 전달되어 오는 작품이다. 가녀린 아이의 가냘픈 어깨와 대조되는 편안하고 넓은 손. 여읜 아이의 어깨로부터 등까지 감싸안은 마디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은 모성애가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

여리고 가냘픈 여성의 몸매가 아닌, 모진 풍파를 든든하게 막아내고 있는 굳건한 가슴과 강인한 어깨의 어머니. 그 몸 구석 구석의 촉각적 터치에서 묻어 나오는 삶의 무게를 견디어온 흔적들.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에 머금고 있는 처절한 절망과 조심스런 그러나 옹골진 용기가 전달되어 온다. 이와 같이 조규봉 조각의 특징은 대상의 심리 상태를 표현해 낼 수 있는 예리한 표현력. 터치를 통한 촉감적 표현, 세부를 선택하여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것 등이다. 또한 <남녘땅의 어머니>에서 보듯이 특히 흙을 다루는 것에 뛰어났다. 이 작품은 현재는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한 조각계에서 조규봉이 차지하는 역할은 단순히 그가 좋은 조각작품을 남겼다는 데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북한 조각사에서 대기념비 조각 창작이 시대적 과제로 제시되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창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창작을 지도하는 지도 성원으로 많은 대기념비 제작 사업에 참가하였다.

<천리마동상> 창작에 참여하였고, <보천보전투 승리 기념탑>의 초안을 설계하였으며, <만수대기념비>, <왕재산대기념비> 등 대기념비 창작 사업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 북한의 대기념비조각의 창작자들은 대부분이 조규봉 그가 해방 후 미술대학에서 키워낸 조각가인 해방 후 세대들이었다. 대기념비미술에 대한 선례가 없던 북한에서 이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 재능 있는 조각가들을 키워냈고, 그와 더불어 대기념비 조각을 성공적으로 건립해 내는  중심에 조규봉이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대기념비 조각의 성과는 대학 초창기부터 이 사업을 담당하고 모든 심혈을 쏟아부은 조규봉, 김정수 등의 역할 속에서 얻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북한미술계에서 조규봉의 위상은 바로 이 속에서 결정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고 있는 북한당국은 그가 70고령이 훨씬 지날 때까지 조각실기교수뿐만 아니라 조선미술사, 외국미술사, 인체조형해부학을 비롯한 전공이론강의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조규봉은 조각 교육을 위해 『나무조각기초』 등 교육을 위한 참고도서들을 많이 집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식 교육 실정에 맞는 석고상교재도 수없이 창작하여 실기교육에 이비지하였다. 이는 그가 얼마나 교육에 열정적이었으며, 그의 영향이 북한 조각계에 얼만큼 뿌리내리고 있는지 인식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월북한 1세대 조각가들의 노력 속에서 북한의 조각계가 성장되었다는 사실은, 분단이라는 이 시대의 끊나지 않은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북한은 거대한 기념비 미술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은 만큼 많은 기념비 미술이 제작되고 전시되고 있다. 이는 여러 미술 장르 중에서 기념비 미술이 일반 대중들에게 줄 수 있는 사상 미학적 교양의 파급력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 중요성만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조형화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규정이 정책적으로 제시되어 있어 안타깝다. 이는 기념비 미술을 형식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감 때문이다.

 

조규봉의 <남녘땅의 어머니>나 이외 기념비 미술의 부주제군상에서 보여지는 사실주의 조각의 높은 수준이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형식과 구성이 보다 다양한 기념비 미술이 창조될 수 있는 토대가 북한의 미술계에 이룩되었으면 한다. 이제 북한미술계도 자신의 예술가들을 믿고, 대기념비미술 창작과 관련된 세세한 원칙들 대신 보다 느슨한 규정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보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기념비 조각들이 출현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계리 _ 한국미술연구소 선임연구원/ 2005.10.26 오존 10:5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