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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8. 항도체육 영원한 후원자 정용복

by 아름다운비행 2005. 8. 16.

1954년 10월 중순께.

인천시 중구 도원동 공설운동장(종합운동장 전신)에는 '망치'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젊은 체육인들과 인부들은 시커멓게 그을린 드럼통 밑과 윗부분을 쇠톱으로 도려내고 중간부분을 잘라 드럼통을 펴기 시작했다.

'쫙' 펴진 드럼통은 허허벌판 논 한 가운데 위치해 있던 공설운동장 담장을 사용됐다. 당시 미군 트럭에 실려 도착한 드럼통은 수천개에 이르렀다. 양회(시멘트)와 목재 등도 속속 도착했다. 당시로선 엄청난 물자였다.
 
이 광경을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40대 중반의 신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인천 체육계의 '영원한 후원자' 정용복(丁龍福·1910~1977)씨. 그는 자주 공사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힘들게 얻어 온 드럼통과 시멘트, 목재 등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가건물에서 숙직도 자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운동장에서 사이클 선수로 활동했던 이홍복(72·58년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 2관왕)씨는 “하루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시커멓게 그을린 드럼통 수천개와 양회(시멘트), 목재 등이 미군 트럭에 실려 운동장에 속속 도착해 어리둥절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연을 알 수 있었지요. 펴진 드럼통은 담으로 쓰였고 흙으로 되어 있던 운동장과 야구장의 계단식 스탠드에는 시멘트가 입혀지면서 흙위에 덮여 있던 가마니가 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선수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곧 '희망'이었지요.”
 
일제시대를 거쳐 6·25사변이 터지면서 주춤했던 인천 체육계의 새로운 시작은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이듬해 정용복씨 등 몇몇 지역인사들에 의해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정용복씨는 당시 인천에선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54년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김정렬 시장의 권유로 정용복씨는 촉탁이긴 하지만, 시정자문위원직에 올랐다. 김 시장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일본어와 영어가 능통하고 사교성이 뛰어난 정 선생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가 뛰어난 사교술로 능력을 발휘한 것이 공설운동장 보수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미군에게서 얻어낸 일이다. 당시 인천에선 이 일이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정용복씨가 그 많은 드럼통과 자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대형 화재가 계기가 됐다. 미군 기름저장소인 '히다찌(현 남구 용현동 대우전자 일대)'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 기름 수만통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인천대표 야구선수 출신인 이덕영(84·사망)씨는 “그때 사람들이 그을린 드럼통을 집으로 가져 가느라 난리였습니다. 물자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야구인 등 일부 체육인들이 드럼통을 얻어다 공설운동장의 담으로 써 '바람이라도 막아보자'고 정 선생께 제의했고, 시장과 협의를 거쳐 한미친선위원회의 도움으로 드럼통과 시멘트, 목재 등을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1년여동안 공설운동장 개·보수가 이어지면서 정용복씨는 가족들과도 적잖은 갈등이 있었다고 큰 딸 경자(71·이화여대졸업)씨가 전했다. 경기도 분당에 살고 있는 경자씨는 “집 부엌이 헐고, 천장 지붕이 뚫려 빗물이 안방으로 흘러 들어도 운동장에 쌓여 있는 그 많은 양회(시멘트) 한줌 가져 오지 않으셨습니다. 공공의 물건을 무서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였지요. 당시는 왜그리 야속하던지….”
 
그는 “아버님은 오로지 인천의 체육발전과 사회활동만을 위해 정열을 쏟았다”며 “인천 체육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가족들에게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정용복씨가 체육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인 박흥순(지난 2001년 91세로 사망)여사가 딸 경자씨에게 전해준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한 터라 모든 분야에서 부정투성이다. 당당하게 겨뤄 깨끗하게 승부를 내는 것은 운동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운동하는 체육인들을 좋아한다.”
 
경자씨는 나이가 들어 이제는 아버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용복씨는 공설운동장 개·보수를 마친 뒤 인천지역 체육인 뿐만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체육계 후원자'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50~60대 정용복씨는 시 사회복지과 한편에 체육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인천지역 체육인들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57년부터 60년까지 경기도 체육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활동은 체육계 후원이외에도 많은 분야에서 활동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1948년에는 한국보이스카우트에 경기도 야영부장으로 취임, 57년까지 10년여동안 활동했다. 보이스카우트연맹 관계자들에 따르면 월미도에 대원들을 데리고 야영을 할때 미군부대에서 과자, 소시지 등 음식을 지원받아 연맹에서 3년여동안 사용한 일은 아직도 연맹의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또 곽상훈(전 국회부의장)씨의 국회진출에 발벗고 나섰다. 경기적십자병원 신축(55년)때 미군부대로부터 자재를 지원받거나 약품을 공급받도록 주선했고 현재 옥련동사무소 터 80평도 그가 시에 기부한 것이다.
 
이런 정용복 선생의 '체육사랑'은 드럼통으로 공설운동장 담을 쌓던때부터 10년뒤인 1964년 결실을 보게 된다.
 
1964년 9월 3일 제45회 전국체육대회가 인천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동안 정용복씨의 남다른 인천 체육계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원로체육인들은 전하고 있다. 당시 정용복씨는 “10년전 미군들에게 물자를 얻어 공설운동장을 개·보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스탠드에 앉아보기도 하고 트랙을 밟아 보는 등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1910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정용복씨는 그해 아버지 정일보씨와 어머니 손정수씨와 함께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는 인천창영초등학교와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38년 일본대학 법정대에서 3년간 수학했다. 1948년 주원기씨의 설득으로 당시 재건운동이 한창이던 보이스카우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민선시장에 당선된 김정렬씨의 권유로 촉탁직에 앉아 시정전반에 관한 업무에 관여했다.
 
1955년에는 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인천시 문화상(체육)을 수상했으며 1970년 대한체육회 창립50주년을 맞아 공로패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이런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곡상(땅장사를 했다는 말도 있음)으로 엄청난 돈을 번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을 한 지식인으로 여유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인천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자 했다. 어수선한 시기에 유학을 통해 배우고 익힌 언어와 사교능력성을 지역사회에 환원한 셈이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체육계도, 지역사회도 순수했던 그의 봉사정신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1976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1년여간 병원에서 병마와 싸우다 1977년 11월 3일 눈을 감았다. 그는 백석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소에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흔적을 적은 비문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인터뷰] 아시아경기 사이클2관왕 이홍복씨

“저에게 선생님(정용복)은 '아버지'셨고, 50~60년대 인천지역 체육인들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셨습니다.”
 
1958년 동경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 부문에서 2관왕을 차지한 인천의 원로체육인 이홍복(72)씨는 정용복씨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 그가 정용복씨를 처음 만난 것은 18살되던 해(1951년) 였다. 영화중학교 사이클 선수였던 그는 남구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사이클 연습도중 선생을 처음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그 많은 종목의 선수들 중에서도 유난히 사이클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특히 저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지요. 가끔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도 하고 당신이 아끼시던 옷도 자주 내어주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때는 옷이 무척 귀해 큰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경기에서 우승하고 돌아오면 성대한 환영식를 어김없이 준비해주시던 선생님은 저에게 아버지셨던 셈이죠. 사이클을 좋아했던 터라 막내 아들 일영(50·미국거주)씨에게 동산고 시절 선수생활을 잠시 시키기도 했었지요.”
 
그는 정용복씨의 남다른 '체육인 사랑'과 운동장에서 만큼은 엄격했던 때를 기억했다.
 
“선생님이 화를 내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일이 있었습니다. 60년대초 공설운동장에 가건물 3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인천의 체육계 관계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3곳중 한 곳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자, 선생님께서 무척 화를 내셨습니다. 신성한 운동장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체육인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당시 음악소리를 집 밖으로 흘러 나오게 했던 체육인은 '혼쭐'이 나기도 했지요.”
 
그는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뿐만이 아닙니다.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운동을 하는데 담배를 피우시던 코치 선생님이 하루는 정용복 선생님에게 무척 혼난적이 있었습니다. 운동선수는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파이프 담배를 자주 피우셨지만, 운동장에서 만큼은 피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후원과 그의 그칠줄 모르는 노력은 1958년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 2관왕(도로와 단체)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금메달 2개를 목에 걸고 돌아왔을때 선생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시청 앞은 물론 답동성당까지 성대한 환영식을 마련해 주시고, 저녁에는 '화선장' 요리집에서 만찬을 베풀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각종 행사에는 물론 방송출연까지도 직접 챙겨주시던 자상하신 어른이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왕년의 사이클 2관왕 답게 중구 답동 신흥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자전거대리점을 운영하며 정용복 선생의 뒤를 이어 인천체육 꿈나무들을 격려하고 있다. 인천체육회 이사인 그는 오늘도 오전 일찍 자전거 대리점 문을 닫고 후배 체육인들을 만나기 위해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는 집을 나서면서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선생님의 순수했던 봉사정신을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 인천체육이 이 만큼 발전한 것도 선생님 같은 분들의 공이 컸는데.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 마저 떠나면 누가 기억해 줄는지….”

 송병원·song@kyeongin.com / 2004.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