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나 글을 다시 듣고 싶어서 애썼던 기억들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중학교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피천득
씨의 "구원의 여상"이라는 아름다운 수필을 듣고는 그 구절구절이 가슴에 박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엔 인터넷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여기
나의 한 여상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같이 맑습니다"로 시작하는 그 글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애를 썼습니다.
그 글을
다시 읽으려고 중학교 시절에 당시에 생긴 지 얼마 안된 전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 구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있는 정독도서관까지 간신히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산호와 진주"라는 수필집, 1969년에 출간돼 빛이 바래고 맞춤법도 달랐던 그 단아한 수필집을 대출받아서 "구원의
여상"이라는 수필을 공책에 한 자 한 자 옮겨적어 온 일이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보석같은 그 글을 비로소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라디오에서 처음 듣는 노래도 그런
곡들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가락에 실려오는 공감 가는 노랫말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다가 나중에 제목과 가수의 이름만 간신히 듣고 그 노래를
찾으려 레코드 가게를 전전하던 기억도 있죠.
오늘
퇴근 길에 라디오를 듣는데,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이곳에는 NPR이라는 방송국이 있습니다. National Public Radio라고
국립공영라디오 쯤으로 번역이 될 텐데요.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운영되며 광고를 하지 않는 라디오 방송입니다. 매일 아침 저녁 출퇴근 길에 듣는 그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저는 미국의 문화와 역사, 정치, 경제 전반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오늘
방송을 통해 들은 글은 "All Things Considered"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의 "This I Bielive"
(내가 신봉하는 것)이라는 코너에 소개된 글입니다. 한 여자 변호사가 자신이 쓴 에세이를 직접 읽었는데요. 장례식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고 평소에
가르쳐주셨던 아버지의 교훈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글이었습니다. 꼭 다시 듣고 싶은 글, 혼자 듣기 아까운 그 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I
believe in always going to the funeral. My father taught me that.
저는 장례식엔 꼭 가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제게 그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The
first time he said it directly to me, I was 16 and trying to get out of going to
calling hours for Miss Emerson, my old fifth grade math teacher. I did not want
to go. My father was unequivocal. "Dee," he
said, "you're going. Always go to the funeral. Do it for the family."
아버지가 처음 제게 그 말을 직접 하신 건 제가 16살 때로, 5학년 때 수학을 가르쳐주셨던 나이 든 에머슨 선생님의
장례식에 안 가려고 애를 쓸 때였습니다. 저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했습니다. "디야. 가야 돼. 장례식엔 항상 참석해야 하는
법이란다. 가족을 위해서 가거라,"라고 아버지는 말씀 하셨습니다.
So my
dad waited outside while I went in. It was worse than I thought it would be: I
was the only kid there. When the condolence line deposited me in front of Miss
Emerson's shell-shocked parents, I stammered out, "Sorry about all this," and
stalked away. But, for that deeply weird expression of sympathy delivered 20
years ago, Miss Emerson's mother stills remembers my name and always says hello
with tearing eyes.
결국 저는 장례식에 가게 됐고 아버지는 밖에서 기다리셨습니다. 장례식장 분위기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 저만
빼곤 모두가 어른들 뿐이었습니다. 조문객 사이에 섰다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충격을 받은 모습의 에머슨 선생님의 부모 앞에 마침내 당도했을 때
저는 "모든 상황이 유감입니다"라고 간신히 우물거린 다음 성큼성큼 식장을 걸어나왔습니다. 그러나 20년 전에 제가 내뱉었던 그 아주 괴상한
위로의 말 때문에 에머슨 선생님의 어머니는 아직도 저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항상 눈물 젖은 눈으로 저에게 인사를
하십니다.
That
was the first time I went un-chaperoned, but my parents had been taking us kids
to funerals and calling hours as a matter of course for years. By the time I was
16, I had been to five or six funerals. I remember two things from the funeral
circuit: bottomless dishes of free mints and my father saying on the ride home,
"You can't come in without going out, kids. Always go to the
funeral."
이것이 제가 처음으로 보호자 없이 참석한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수년동안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우리
형제들을 장례식에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제가 16살이 되었을 때까지 참석한 장례식이 5-6 건이나 됐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장례식장을
돌아다니면서 경험한 것들 가운데 두 가지가 제 기억에 남습니다. 첫번 째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공짜 박하 사탕 접시들이고
다음으론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주는 것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는 법이란다, 얘들아. 장례식엔 항상 참석해야 해,"
라는 말씀입니다.
Sounds
simple -- when someone dies, get in your car and go to calling hours or the
funeral. That, I can do. But I think a personal philosophy of going to funerals
means more than that.
누군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차에 올라서 장례식장으로 가라, 듣기는 참 단순하게 들리죠. 그거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철학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Always
go to the funeral" means that I have to do the right thing when I really, really
don't feel like it. I have to remind myself of it when I could make some small
gesture, but I don't really have to and I definitely don't want to. I'm talking
about those things that represent only inconvenience to me, but the world to the
other guy. You know, the painfully under-attended birthday party. The hospital
visit during happy hour. The Shiva call for one of my ex's uncles. In my humdrum
life, the daily battle hasn't been good versus evil. It's hardly so epic. Most
days, my real battle is doing good versus doing nothing.
"장례식엔 꼭 참석하라"는 건 제가 정말로 정말로 내키지 않을 때에도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제가 남에게
작은 성의를 보일 수 있을 때 저는 바로 이 사실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물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고 확실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에게는 작은 불편일 뿐이지만 받는 사람들로서는 이 세상과 맞바꿀 수 없는 그런
의미라는 걸 말하는 겁니다. 참석인원이 너무 적어서 속이 상할 정도인 생일 잔치에 참석해주는 일, 한참 행복한 순간에라도 남의 문병을 가는 일,
헤어진 남자친구의 숙부들을 위해서 힌두교 의식에 참가하는 일 등등이 그런 일들이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저는 매일 선과 악의 싸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거창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개 보면 저의 진정한 싸움은 선을 행하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싸움입니다.
In
going to funerals, I've come to believe that while I wait to make a grand heroic
gesture, I should just stick to the small inconveniences that let me share in
life's inevitable, occasional calamity.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게 됐습니다. 즉, 장대하고 영웅적인 일을 말하기에 앞서서 인생의 불가피한
일들과 가끔씩 찾아오는 큰 재난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 작은 불편을 먼저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On a
cold April night three years ago, my father died a quiet death from cancer. His
funeral was on a Wednesday, middle of the workweek. I had been numb for days
when, for some reason, during the funeral, I turned and looked back at the folks
in the church. The memory of it still takes my breath away. The most human,
powerful and humbling thing I've ever seen was a church at 3:00 on a Wednesday
full of inconvenienced people who believe in going to the funeral.
3년 전 차가운 4월의 그 어느 날 밤, 암 투병을 하던 저의 아버지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에 있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이나 멍한 상태에 빠졌다가 참석한 장례식 도중 어느 순간에 우연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교회에
앉아있던 추모객들을 보게 됐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저는 아직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때까지 보아온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고,
강력하며,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던 그 모습은 바로 장례식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믿으며 불편을 무릅쓰고 수요일 오후 3시에 교회를
꽉 채운 그 수 많은 추도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방송을 직접 듣기 원하시는 분은 다음 사이트를 방문해 보세요.
http://www.npr.org/templates/story/story.php?storyId=4785079)

|
지은이 디어더 설리번은 뉴욕 시라큐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별별 일을 다
경험해 본 뒤 노스웨스턴 대학의 법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브루클린에 살면서 프리랜스 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설리번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자산은 당신의 죽음의 과정을 가족들이 충격 없이 잘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