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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등기제도", 이제는 바로잡자는 기사 한 꼭지 - 신동아 게재 글

by 아름다운비행 2023. 3. 3.

우리나라 등기제도는, 

등기를 하라고 해 놓고는 그 등기의 '공신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등기에 '이 땅의 주인은 홍길동'이라고 기재를 해놓고, 그 기록관리를 정부가 한다. 

그런데 문제는, 등기상 소유자가 홍길동이라고 해서 그 소유자가 반드시 '홍길동'이냐? 

그게 아닐 수도 있다. 

등기는 홍길동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주인은 홍길동이 아닌 임꺽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이런 사례가 실제로 적잖이 있다. 

대법원 판례도 많다. 

소송을 통해 '그래 홍길동이 아니라 임꺽정이 꺼네'라고 판결을 받으면, 

홍길동 명의의 등기는 말소되고 그 때부터는 임꺽정이 주인이 된다는 얘기다. 

홍길동이는 분명히 前주인 홍대감에게 거금을 주고 산 땅인데도 불구하고, 홍길동 명의는 삭제되고 만다. 

 

그럼 억울하게 땅 뺏긴 홍길동이가 손해본 것은 어떡하라고? 

그건 홍길동이가 홍대감과 별도로 따질 일이다. 

우습지만 이게 우리네 현주소다. 

 

 

아래 글은 우리 역사의 線上에서 민법 개정의 필요성을 논한 기사이다. 

그런데 내 눈엔 그 민법개정 필요성보다도 그 배경으로 얘기한 역사 이야기가 더 눈에 들어온다. 

 

고조선 8조 법금이 현재의 복잡다기한 법령체계로 확장(?)되었으니 

우리 사는 모습도 그만큼 복잡해졌다는 얘기다. 

 

내게는, 이 기사가 

'그 사는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결국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속내가 들어 있는 글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여기 역사 글무리에 옮겨놓는다. 

 

 - - - - - 

 

 

o 출처 : 신동아 2023년 3월호 

              한동훈 법무부 민법 개정 실망스럽다 : 신동아 (donga.com) 

한동훈 법무부 민법 개정 실망스럽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한민국 엉터리 법치주의 역사

입력2023-02-04 10:00:01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 위기의 조선, 고민 많았던 정조
● 토지 측량할 역량도 여유도 없어
● 韓 근대적 토지 소유권 기원은…
● 지금껏 완수 못한 지적조사사업
● 등기의 공신력 인정 않는 법체계

 

한동훈 법무부 장관(가운데)이 1월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법무부 2023년 정부 업무보고’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구거(溝渠, 민법 제229조)’, ‘몽리자(蒙利者, 민법 제233조)’, ‘승역지(承役地, 민법 제293조)’와 같은 일본식 표기 한자를 비롯해 ‘임의후견임감독인(민법 제959조의15)’과 같은 오탈자, 시대변화를 담지 못한 1958년 제정 당시의 법제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1월 26일 법무부가 발표한 ‘법무부 2023년 정부 업무보고’의 내용이다. 2023년 법무부가 추진할 5대 핵심 과제 중 ‘미래번영을 이끄는 법질서 인프라 구축’ 가운데 민법과 상법의 전면 개정 필요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제시된 단어들의 뜻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법무부의 취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구거’는 도랑 구(溝), 개천 거(渠) 자를 합친 한자어다. 국어사전은 ‘도랑’을 순화어로 제시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제시된 몽리자의 뜻은 이렇다. “이익을 얻는 사람. 또는 덕을 보는 사람.” 승역지는 지역권이 설정된 경우 다른 땅의 쓸모를 돕기 위해 활용되는 땅이다. 대체로 다른 토지에 접근하기 위한 도로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명백한 오탈자를 수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을 국민이 스스로 읽고 이해할 수 없다면 국민이 법을 지킬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일상적으로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 단어들을 이해하기 쉽게 바꾸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의 발표와 보도자료를 보면 의문이 남는다. 기껏해야 단어 몇 개를 고치고 오탈자를 바로잡는 것을 ‘전면개정’이라 할 수 있을까? 질문을 좀 더 키워보자. 2023년의 우리가 민법의 전면 개정을 추진한다면, 그 핵심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역사적 소명의식을 품고 없애야 할 ‘일제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조선 왕조가 해결 못한 악순환

1917년 일본인 토목기사들이 전남 무안에서 ‘토지세부측량’을 하고 있는 모습. 당시 총독부에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이와 같은 세부측량이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동아DB]

잠시 18세기로 돌아가 보자. 조선의 임금 정조는 고민이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황폐화된 국토에서 시작한 조선 후기. 가뭄, 홍수 등으로 기근이 들 때마다 자영농이 헐값에 내놓은 땅을 주워 담으며 가진 자들이 더욱 땅을 늘려가는 행태가 반복됐고, 빈부격차는 하늘을 찌를 듯 커졌다. 농민에게 토지를 돌려주지 않으면 ‘농자천하지대본’의 나라 조선의 근간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다. 성호 이익은 농민 각자에게 절대 팔 수 없는 토지, 영업전을 분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연암 박지원의 해답은 토지소유 상한제였다. 당장 부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부자들이 자손을 낳을 때마다 재산이 분할되도록 해 자연스럽게 빈부격차를 해소하자는 것. 다산 정약용은 마을 단위의 토지 공동 소유를 제안했다.

제안 중 실현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날로 커지던 권문세가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보유 상황을 확인할만한 학문적 역량도 행정적 여유도 없던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나는 왜 조선의 여성을 파고 들었는가’(2017년 1월 30일)라는 인터뷰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첫째는 비용 문제입니다. 나가서 토지를 측정하는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려면 돈이 드는데 재정이 부족하니까 지방에 비용을 물려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파산이 속출한다는 거예요. 관리 말먹이며 점심 값이며. 그래서 토지 측량 하지 말라는 상소가 쏟아지니까 못 한 거예요.

둘째는 수학을 몰랐어요. 토지제도를 바꾸려면 토지를 정확히 측량해야 하고 그걸 하려면 수학을 알아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정조가 결국 하지 말라고 해요.”

조선은 왕조 국가다. 왕은 나라의 주인이다. 나라의 주인인 임금조차 자기 땅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국가 재정이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 정확한 자료가 없으니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도 없고, 따라서 재정이 악화된다. 악순환이다. 조선 왕조는 일제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이 악순환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메이지 유신’과 토지 거래의 자유

1860년대 일본,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중심이 된 존왕양이파가 막부를 몰아내고 왕정복고를 달성했다. 일본은 메이지 천황을 중심에 두고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메이지 유신’에 들어갔다. 기존의 행정 제도를 바꾸고, 사무라이들이 칼을 차고 다니지 못하게 하며, 개인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여러 개혁이 추진됐다.

그 중 핵심이 토지의 개인 소유 및 거래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1872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토지란 공을 세운 부하에게 윗사람이 하사해주는 것이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게 됐다. 토지의 개념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세금도 달라졌다. 땅에서 나오는 곡물의 수확량이 아니라 땅의 가격을 기준으로 세금을 내게 했다.

이 모든 변화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전국의 모든 토지를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1876년부터 일본은 농경지, 시가지, 산림, 원야의 순서로 토지 조사를 시작했다. 당장 세금을 걷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조사가 수행됐다는 것을 그 순서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과업은 1876년 내지 1877년에 농경지와 대지를, 1880년에 전국 조사를 완료하면서 끝났다.

빠르고 일사분란하게 근대화의 길을 걸은 일본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주변국을 병합해 나갔다. 식민지를 만들고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토지 조사를 수행했다. 1887년 대만, 1910년 조선에서 지적(地籍) 제도가 시행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근대화 과정을 밟은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주의 문학은 당시의 토지 조사 및 지적 제도 시행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토지 조사를 핑계로 조상 대대로 물려온 땅을 수탈해갔다’는 논리다. 앞서 말했던 역사적 맥락을 다시 떠올려 보자. 제대로 된 지적 조사가 수행되지 못했던 조선에서도 강자에 의한 약자의 토지 수탈은 빈번하게 벌어졌다. 반면 근대적 부동산 소유권 및 제반 제도가 작동하는 대한민국의 시민인 우리는, 적어도 조선 후기의 백성들보다는 안심하고 내 재산을 가질 수 있다. 부동산의 소유권은 쌍방의 합의에 의한 계약이 아니면 이전되지 않으며 그렇게 소유권이 이전될 경우 등기를 해서 공시하도록 돼있다.

이와 같은 근대적 재산 보호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일제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지적 제도 때문이다. 나라 안에 땅이 얼마나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샅샅이 파악한 후, 그 소유 관계를 밝히고 등록해놓았기 때문에, 내 땅과 네 땅의 구분이 분명하며 남이 내 땅을 제 것이라 우길 수 없다. 국가의 힘이 강력한 만큼 개인도 그 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애석하게도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지 못한, 근대적 토지 소유권인 것이다.

불부합지 15%, 말이나 되는 일인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일제는 패망했다. 광복의 그날이 도적처럼 찾아왔고, 분단의 아픔 속에 태어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은 스스로 통치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했다.

앞서 우리는 정조의 지적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 결국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에서야 제대로 된 지적 사업이 시행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일제가 물러나고 엄연한 독립국으로 자립하게 된 한국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최대한 빨리, 정확하게, 우리의 땅을 우리 스스로 측량하고 그 소유 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현실은 정 반대로 진행됐다. 지적 사업은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달성된 바 없다. 우리는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적재조사사업을 완료하지 않았다. 1945년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후 80년 가까이 일본의 식민지 지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필자는 퍽 당황스러웠다. 상당한 독자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본다. 사실이 그렇다. 지금껏 대한민국은 단 한 번도 스스로 지적조사사업을 해내지 못했다. 한반도의 산과 들이라는 물리적 대상은 일제로부터 해방됐으나, 국가가 그것을 파악한 대상으로서의 ‘국토’는 여전히 일제가 측량한 그대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 대만의 경우는 어떨까.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반일감정이 심하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일제 잔재’를 극복하는 실질적 과제만큼은 우리보다 훨씬 잘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대만은 1975년부터 지적재조사사업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대만의 토지는 일제로부터 독립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아무 시도조차 없는 건 아니다. 2012년, 드디어 지적재조사사업이 시작됐다. 2030년 완성을 목표로 현재 진행 중이다. 아직도 7년이나 더 일제가 만든 지적도를 써야 한다는 뜻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한국은 경제 규모와 행정력에 비해 ‘지적불부합지’가 턱없이 많은 나라다. 지적불부합지란 지적대장에 올라 있는 내용과 실제 사항이 맞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 지적재조사사업 홈페이지에 따르면 전국 3760만여 필지 가운데 무려 15%가 불부합지다. 지적도는 국가가 지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정보다. 그 중 15%가 잘못돼 있다. 그 상태로 해방 후 거의 80년을 살아오고 있다.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인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민법

2023년 1월 5일 서울 성북구의 한 부동산 밀집지역으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국민, 주권, 영토. 근대 국가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다. 어떤 나라가 자국 영토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지속해온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해방 후 대한민국이 온전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굴러왔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의 주제인 ‘민법 개정’으로 돌아가 볼 차례다.

소이탄으로 도쿄가 불바다가 됐고,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쑥대밭이 돼버렸던 일본의 경우. 1951년 6월 1일 ‘국토조사법’을 공포하여 지적조사를 다시 시행하고 국가 재건에 나섰다. 일본이 그렇다면 1950년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할 일도 분명했다. 마땅히 스스로의 힘으로 국토를 측량하고 지적도를 다시 그리며 권리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이 남겨둔 지적도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 지적도는 일본의 수도 도쿄를 측량원점으로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더욱 오류가 커졌다.

스스로 근대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1950년대의 국회는 더욱 이상한 결정을 내렸다. 부동산 소유권 이전은 ‘형식주의’를 따르는 듯한 제도를 만들어놓고 등기부 등본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조합을 만들었다.

‘형식주의’란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하기 위해 당사자의 합의 뿐 아니라 등기소에서 등기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부동산을 등기하면 소유권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시민들은 서로 믿고 거래할 수 있으며 국가는 세금을 걷기 좋으니 일석이조다. 정조가 이루지 못했던 꿈,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후에야 도달할 수 있었던 근대화의 길이다.

문제는 등기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악의를 갖고 남을 속이려 한 경우는 범죄이므로 논외로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와 착오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잘못 기입된 등기의 경우에도 공신력을 인정해, 등기부를 믿고 사고 판 사람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등기부만 보고 덜컥 믿으면 안 되는 걸까? ‘진짜 사실관계’를 확인할 책임이 매수자에게 있다고 해야 할까?

등기란 해당 부동산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시하는 제도다. 국민은 등기부에 등기된 사항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부동산 거래에서 형식주의를 따를 경우 등기의 공신력은 인정돼야 마땅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얼음이 들어 있는 차가운 음료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민법 체계는 그렇지 않다. 부동산 거래를 하고 등기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사실상 등기를 강제하면서도, 등기의 공신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공신력을 부여하지 않을 거면 등기를 뭣하러 한단 말인가? 그 당시 국회의원들은 ‘현실적으로 등기부가 정확하지 않다’, ‘등기부에 공신력을 부여하려면 등기관에게 실질적 심사 권한을 주어야 하는데 우리의 형편상 불가하다’, ‘막대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같은 이유를 들어, 등기를 강제하면서도 등기부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법체계를 만들어냈다.

등기가 필수지만 등기부의 공신력은 없는 나라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 대한민국뿐이다. 입법자인 국회가 법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사법부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 대법원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등기부의 공신력을 부정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민법 위에서 부동산 매매를 하며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국민이 돼있는 것이다.

민법은 2004년에 가족법을 중심으로 한 차례 크게 개정됐다. 그 과정에서 등기의 공신력 문제가 논의됐지만, 결론은 ‘현 상태 유지’였다.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너무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지금처럼 해도 별 문제없지 않느냐, 공증제도의 정비를 위해 고용해야 할 인력과 비용이 크다,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냐 등, 뻔한 반발에 묻히고 말았다.

주체적 근대화의 첫 단추

이런 반대 논리의 뿌리는 1950년대 국회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자면, 1800년대 정조 시대의 토지 조사와 개혁에 반대하던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국가가 제시하는 등기부를 국민이 믿으면 되는 나라, 모든 거래가 국가에 의해 파악되고 그것이 곧 진정한 권리관계인 근대국가라면 통하기 어려운 논리다. 대신 구구절절하고 난삽한 ‘현실론’이 난무한다.

지금도 대충 잘 돌아가는데 굳이 왜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해야 할까? 국가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작동 원리는 누구나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도록 이성적인 법칙에 따라야 한다. 국가가 마련한 등기부를 보고 집과 땅을 사고팔았는데 어느 날 ‘진정한 권리자’가 나타나 거래를 무효로 만드는 일이 가능한 나라. 국민이 등기부를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되는 나라. 이런 나라를 근대국가라 부를 수 있을까?

법무부와 한동훈 장관이 민법 전면 개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이 주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우리 민법의 일제 잔재 극복은 구거, 몽리자, 승역지 같은 몇몇 단어를 고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일제가 만든 지재부를 놓고 수십 년을 살아왔다. 권리 관계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등기에 공신력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엉터리 법치주의의 역사를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극복이자 주체적 근대화의 첫 단추다. 2030년 완성을 목표로 진행 중인 지적재조사사업에 발맞춰 민법 개정을 통해 등기의 공신력을 보장해야 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